2020년 12월호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노정태의 뷰파인더⑩] 증오 선동하는 자들이 자유민주주의 등에 칼 꽂아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입력2020-11-2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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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빨간 거짓에 희생당한 프랑스 교사 사뮈엘 파티

    • 표현의 자유는 원래 ‘불편한’ 것

    • 탈진실(post-truth) 용어, 사태의 본질 왜곡

    • 공산주의자가 공유한 나치, 파시스트 선동 화법

    • 敵 공격 위해 거짓과 폭력 거리낌 없이 동원

    • 與의원 “X자식들” “X탱이”… 국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

    • 文정권의 진실 결여, 검찰총장을 대선후보 만들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연일 정권에 쓴 소리를 하며 사회참여 지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당의 상근부대변인이 10월 13일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예형은 ‘삼국지연의’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처형당한 지식인이다. 사진은 진 전 교수가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진행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대담에 참석한 모습. [박해윤 기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연일 정권에 쓴 소리를 하며 사회참여 지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당의 상근부대변인이 10월 13일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예형은 ‘삼국지연의’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처형당한 지식인이다. 사진은 진 전 교수가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진행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대담에 참석한 모습. [박해윤 기자]

    사뮈엘 파티(Samuel Paty). 목이 잘려 살해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이름이다. 표현의 자유는 그가 공들여 가르치는 주제였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가 지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동안 시사 풍자 잡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일러스트를 수업 교재로 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의 맥락을 온전히 보도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나쁜 백인’이 ‘선량한 유색인종’을 도발해 벌어진 일처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상은 그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암울하다. 이 사건을 ‘표현의 자유 대 종교 감정’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표현의 자유 기능하려면 불편함 참아야

    가장 먼저 지적할 점은 프랑스 정규 교육은 표현의 자유를 교과 과정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티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르쳐야 했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려면 본질적으로 도덕 감정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미국 도색잡지 ‘허슬러’ 발행인이던 래리 플린트의 인생을 떠올려보자. 영화 ‘래리 플린트’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그는 성(性)과 쾌락에 엄숙한 혹은 위선적인 미국 기독교인의 종교 감정을 건드렸다. 신앙인의 표를 노리는 보수적 정치인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 래리 플린트마저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보호해줬다. 



    즉 표현의 자유란 본래 ‘불편한’ 것임에도 법과 제도 및 사회적 관용을 통해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명언이 뜻하는 바도 그런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하려면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내 감정에 거슬리는 내용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걸 배워야 한다. 그것이 공교육의 역할이다. 

    사뮈엘 파티는 학생들에게 “이 수업은 특히 무슬림 학생들에게 불편할 수 있으며, 내가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도 좋다”고 말한 후 수업을 진행해왔다. 종교적으로 예민한 소재를 다루고 있긴 했지만, 전문적인 자격과 경력을 지닌 교육자가 진행한 정상적인 수업이었다. 파티는 수년 동안 계속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를 소재로 수업을 진행해 왔고 별 문제가 없었다. 

    2020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페이스북에서 사뮈엘 파티의 수업에 대한 반대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유명한 무슬림 선동가 압델카힘 세프리위(Abdelhakim Sefrioui)가 있었다. 그는 파티의 수업이 “무책임하고 공격적”이라는 취지의 영상을 올렸다. 세프리위에게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의 딸 자이나(Zaina)에 따르면, 파티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무슬림 학생들에게 이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손을 들어 표시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슬림 학생들은 종교 감정을 모욕당하고 프랑스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즉 인종주의·국수주의 행태의 희생자가 됐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다. 자이나는 파티의 수업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슬람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은 파티는 교장에게 불려갔고 교육청의 감사도 받았다. 교육청은 그의 수업 내용과 방식을 보고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경찰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다. 파티는 자신을 비방한 압델카힘 세프리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파티를 향한 무슬림들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 혐오자라는 온라인 폭로가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적개심이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자가발전하기 시작한 증오는 점점 더 커지더니 결국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향했다. 압둘라흐 아부예도비치 안조로프(Abdoullakh Abouyedovich Anzorov)라는 18세의 무슬림 난민 소년이 그 증오에 휩쓸렸고, 칼을 빼들었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버지인 사뮈엘 파티는 2020년 10월 16일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

    수업 중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무슬림 청년에게 테러를 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10월 17일(현지시간) 그가 근무하던 파리 북부 콩플랑생토노린의 부아돈 중학교 앞에 꽃을 놓고 촛불을 켰다. [콩플랑생토노린=AP 뉴시스]

    수업 중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무슬림 청년에게 테러를 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10월 17일(현지시간) 그가 근무하던 파리 북부 콩플랑생토노린의 부아돈 중학교 앞에 꽃을 놓고 촛불을 켰다. [콩플랑생토노린=AP 뉴시스]

    프랑스의 공교육이 제공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학교 측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며,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항의 시위를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의 형성과 표출은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가 그렇듯,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 하에 보호받는다. 

    여기서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가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런 금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지만, 한번 무너지고 나니 확실히 보이는 선이 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파티의 수업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그 수업을 실제로 듣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직 진실에 근거해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압델카힘 세프리위와 자이나는 상식적이고 올바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을 기반으로 페이스북에 선동적 영상을 올렸다.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지만, 자신들이 들쑤셔놓은 사뮈엘 파티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들의 증오 선동에 넘어가 범죄를 저지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 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대립을 논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요소를 빠뜨리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사뮈엘 파티가 이슬람 혐오자이며 교실에서 무슬림 학생들을 모욕하고 쫓아냈다는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파티가 진행한 표현의 자유 수업은 프랑스의 정규 교과 과정 중 일부였다. 그는 그것을 교장과 감독관이 볼 때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증오할 거리를 찾고 있던 선동가인 압델카힘 세프라위는 딸의 거짓말을 믿었거나 딸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다. 거짓을 연료로 타오른 증오의 불길은 사뮈엘 파티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파티를 살해한 18세 소년 압둘라브 안조로프의 인생까지 망가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종교적 감정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에 대한 모욕 아닐까. 세상 그 어떤 종교도 ‘남에게 거짓말을 하고 네 이웃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특히 거짓으로 남을 고발하고 선동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규칙이다. 그 어떤 대단한 이유와 핑계를 들이댄다 한들 거짓 선동과 폭언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의 대립 구도는 표현의 자유 대 종교가 아니다. 진실 대 거짓이다.


    레닌, 히틀러, 트럼프

    요즘은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저런 고상한 표현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탈진실 같은 건 없다. 탈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고 한국에서도 거짓말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자들이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근간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의 등에 칼을 꽂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전설적인 서평 전문 기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에서 거짓을 근간으로 삼는 폭력적 언어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에 따르면 나치와 파시스트의 선동 화법을 공산주의자들도 공유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의 좌파 학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주로 고학력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대중문화를 거점 삼아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1세기가 되자 오히려 우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문화주의에 편승해 진실을 부정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탈진실’의 물결에 가담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트럼프 대통령 옹호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논의를 이용해 트럼프의 거짓말을 변명하고 싶어 하고, 우파는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기후변화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대안사실(alternative fact)을 홍보하고 싶어 한다.”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거짓과 폭력의 승리였을 뿐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히틀러뿐 아니라 레닌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다시 가쿠타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레닌은 언젠가 자신의 선동적인 언어가 증오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어법은 상대 계급을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깨부수려고, 적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적을 파괴하려고, 적의 조직을 지구상에서 전멸시키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이런 어법은 실로 적에 대한 최악의 생각, 최악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 모두가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언어(‘힐러리 클린턴을 가둬라’), 영국 브렉시트 운동의 과격한 지지자들이 사용한 언어, 대서양 양쪽 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 운동이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언어의 원형처럼 들린다.” 

    즉 선동의 언어는 좌우의 구분을 넘어선다. 서구냐 비(非)서구냐, 근대적 세속국가냐 종교냐 하는 대립과도 무관하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거짓말과 폭력을 거리낌없이 동원하고자 하는 태도의 문제다. 사뮈엘 파티를 향한 적개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이나가 거짓말을 했고 압델카힘 세프리위가 선동을 했던 것은 그 흐름 위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종교의 신성함이나 신앙의 자유와는 상관이 없다.


    말론 브란도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11월 4일 국회 운영위원회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대통령경호처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11월 4일 국회 운영위원회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대통령경호처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11월 4일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속기록에도 기록돼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논란이 커지자 노 실장은 11월 1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국민에 대해 살인자라고 한 적 없다. 어디서 가짜뉴스가 나오나 했더니, 여기서 나온다. 속기록을 보라”고 했다. 탈진실, 아니 거짓말이다.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국민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가장 우려스러운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국민을 상대로 폭력과 증오의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X자식들’이라는 폭언을 던지고,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국민에게 ‘X탱이’라고 문자를 보낸다. 언어 습관이 고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웃고 넘길 일도 아니다. 그들은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당 상근부대변인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상대로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는 말을 한 일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예형은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마는 지식인이다. 집권 여당의 부대변인이 지식인을 향해 예형을 운운하는 건 문자 그대로 협박이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 어떤 점잖은 제안이 아닌 협박인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민주화 이후 그 어느 정부도 이렇게 대놓고 국민에게 위협을 가한 적은 없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문재인 정권의 이런 행태는 어쩌면 일찌감치 예견됐을지도 모른다.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타 후보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고 18원의 후원금을 넣는 등의 방식으로 공격적 행동을 할 때 문재인 당시 후보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는 친문세력뿐 아니라, 문 대통령 본인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짓을 기반으로 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진실의 결여에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렵기에 ‘검찰개혁’이라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해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걸까.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독일에서는 전례가 없다. 일본에서는 1954년 법무대신이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하던 뇌물 정치인 사건을 불구속 지휘한 사례가 유일하다. 결국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 사퇴했다.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라도 해서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기가 어렵다. 이 거짓의 정권으로 인해, 민심은 급기야 퇴임하지도 않은 현직 검찰총장을 차기 대선후보로 바라보게 됐다.


    설령 진실이 아프더라도

    거짓말쟁이를 추궁하면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래도 끝까지 물어보면 나중에는 의심당하는 자신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되레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에서 쏟아지는 ‘막말’들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품위가 없어 생기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폭언과 선동은 거짓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올바른 정치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고 의제를 파악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을 견인하는 등 여러 과정이 필요할 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실이다. 설령 그 진실이 아프고, ‘우리 편’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해야 한다. 너무 뻔하고 식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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