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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처럼 보글보글 익어가는, 정든 맛, 가족의 맛[김민경의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밥처럼 보글보글 익어가는, 정든 맛, 가족의 맛[김민경의 ‘맛 이야기’]

파란 하늘에서 기운 넘치는 햇살이 쏟아져내려오는 5월이 되면 공원 잔디밭은 행복한 가족들 웃음 소리로 가득 찬다. [GettyImage]

파란 하늘에서 기운 넘치는 햇살이 쏟아져내려오는 5월이 되면 공원 잔디밭은 행복한 가족들 웃음 소리로 가득 찬다. [GettyImage]

어린이날이 지났다. 우리 부부에게는 그저 쉬는 날이라 흐물흐물 게으름을 떨고 있는데 아침부터 동네가 웅성웅성한다. 아파트에 살지만 희한하게도 특별한 날의 분주함은 공기를 타고 13층까지 잘도 전해진다. 쓴 커피 한 모금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하늘이 너무 고와, 장바구니 하나 들고 슈퍼마켓을 향해 일없이 나서봤다. 자동차에 나들이 짐을 옮기는 어른들, 그 주변을 뱅뱅 뛰는 아이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찻집 테라스에 앉은 이들 얼굴이 하나같이 해사하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칙칙폭폭 밥 끓는 소리와 훈훈한 밥 냄새는 지금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GettyImage]

칙칙폭폭 밥 끓는 소리와 훈훈한 밥 냄새는 지금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GettyImage]

나의 부모님도 계절 좋은 5월이 오면 어린 우리 남매를 데리고 어디든 가서 뭐라도 보여주려고 애를 쓰셨다. 당시에는 집 나서서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이 주로 도시락이어서, 엄마는 단란한 한 끼를 준비하느라 소풍 가기 전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분주하셨다.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김승희 시인의 ‘새벽밥’을 읽을 때마다 희뿌연 아침에 엄마가 부엌에서 만들어내던 달그락 소리와 훈훈한 밥 냄새가 떠오른다. 박형준 시인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주문하고 나면 자기 앞에 밥이 차려질 때까지 밥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이미 퍼 놓은 밥 한 공기를 온장고에서 꺼내주지만 마음속에서는 칙칙폭폭 밥 끓는 소리가 난단다. 밥 끓는 소리와 냄새 속에 자란 사람이라면 이토록 기분을 좋게 하는, 훈훈한 최면에 걸릴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학교 소풍엔 김밥을 가져가곤 했지만, 가족 소풍엔 땅콩과 잡곡을 넣어 지은 밥과 여러 가지 마른 반찬, 달걀말이, 김치, 길게 썬 오이와 고추장 듬뿍 그리고 마른 오징어 한 마리가 늘 함께 했다. 길가에 작은 정자나 한적한 주차장이 나오면 그곳에서 도시락을 나눠 먹고, 보온병에서 바로 따라 낸 따뜻한 보리차로 입가심을 했다.

무탈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일상

어린 시절 가족 나들이를 앞둔 날이면 엄마는 단란한 한 끼를 준비하느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분주하셨다. [GettyImage]

어린 시절 가족 나들이를 앞둔 날이면 엄마는 단란한 한 끼를 준비하느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분주하셨다. [GettyImage]

어머니 뭐해요 김밥 싸야지요/ 오늘은 휴일인데 아침해도 밝네요/ 고단하신 아버진 가을볕을 먹어야 해요/ 푸른 하늘물에 시린 눈동자 씻어야 해요 (중략) 오늘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에/ 천천히 흙길을 걸어보아요/ 우린 가슴샘에서 솟아나는 참얘기를/ 오롯이 나눈 지가 너무 오래 되었어요 (후략)



박노해 시인이 쓴 ‘김밥 싸야지요’의 일부다. 노동운동가로 길고 고단한 시절을 지낸 그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하는 소박한 한 끼, 아무렇지도 않은 산책 같은 바람을 김밥에 담았다. 시인의 ‘김밥’이 우리들 도시락처럼 발랄할 수는 없지만, 무탈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일상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모두가 쉬는 날 떠나는 소풍은 어디로 가나 차가 막히고, 어디에 도착해도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행복한 가족들 소리로 가득 찬 공원 잔디밭에 우리 가족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무릎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내 하늘에 눈을 씻고, 바람같이 크게 웃는다.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 푸른 풋콩 말아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어 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후략)

서정주 시인의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의 풍경과 닮은 가족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우리가 깔고 앉은 이곳에 돋아난 모든 풀이, 꽃이, 지나가는 나비가 함께 웃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작은 울타리에 우리 네 식구

박지웅 시인의 ‘즐거운 제사’라는 시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나와 오빠는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며’ 뛰었고, 그러다 지치면 엄마 아빠 품에 푹 엎어져서 숨을 돌렸다. 그렇게 과일 몇 쪽 삼키고, 과자 한두 봉지 까먹고, 공 좀 차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짐을 싸고 하나둘 떠난다. 돌아오는 길은 항상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엄마의 다리를 베고, 오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꿀잠을 잤다.

저녁 때가 지나 다 늦게 집에 돌아와도 엄마는 여지없이 새 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여 내셨다. 반찬은 도시락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지만 집에서 먹으면 그 맛이 또 달랐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새 맛이 든 것 같다.

작은 울타리에/ 우리 네 식구/ 하루의 먼지/ 서로 털어주며/ 저녁 식탁에 둘러앉으면/ 일상의 오만가지 티끌들마저/ 꽃이 되고 별이 되지// 삶의 중심점 위에 서서/ 온 마음 모은 작은 손으로/ 저녁상 차리노라면/ 오늘도 쉴 곳 찾아/ 창가에 서성이는/ 어둠 한 줄기마저/ 불러들여 /함께 하고프다

이 시는 최봄샘 시인의 ‘저녁 식탁’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포근함이야말로 짧은 여행이 주는 진짜 기쁨이다. 함께 저녁밥 먹고 밤을 보낼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평범함이, 지금 돌이켜보니 기적 같은 축복이었다.

#밥끓는소리 #김밥싸야지요 #추석전날달밤 #가족의맛 #신동아



신동아 2021년 5월호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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