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家 ‘이건희 컬렉션’ 2만3000여 점 기증 결정
국보 ‘인왕제색도’ 등 가격 매길 수 없는 명작 즐비
상속세 신고 및 납부 기한 이틀 앞두고 기증 발표
“개인 수장품을 박물관에서 개방하는 건 사익과 공익 조화”
관계자 “삼성家, 미술품으로 상속세 내는 ‘물납’ 원했으나…”
미술품 시장 사적거래·다운계약서 비일비재
“세금 많이 거둬들이는 방식” “과소 과세도 문제”
물납제 시행 전 거래 양성화, 감정 공신력 확보해야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을 약속한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인왕산에 비가 내린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순간을 대담한 필치로 담은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다. [삼성 제공]
이 회장 유족이 기증을 약속한 미술품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등 지정문화재만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 포함돼 있다. 파블로 피카소, 클라우드 모네, 마크 로스코, 알베르토 자코메티, 김환기 등 유명 작가 작품도 많다. 월스트리저널(WSJ)과 로이터 등 해외 언론도 이 회장이 남기고간 미술품에 대해 심도 있게 다뤘다. 이 회장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세 자녀는 왜 이 귀한 작품들을 기증하기로 마음먹었을까. 그 배경엔 우리나라의 독특한 미술품 상속세 과세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상속세 물납 고려하다 기증 결정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삼성 제공]
현재 공개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가치는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상속세가 수조 원을 상회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신동아’ 취재 결과 유족은 당초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물납(物納)을 희망했다. 기획재정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했으나 불가능하다는 유권해석 결과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세금을 현금 대신 물건으로 내는 물납제 대상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부동산과 유가증권, 비상장주식으로 한정돼 있다. 미술품의 경우는 시장에 되팔아 현금화 한 뒤 세금을 내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간송문화재단이 ‘운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고려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은 일이 알려지면서 미술품 물납제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지만, 아직 제도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 회장 유족이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고자 소장품을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귀한 미술품이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도 컸다”며 “이 회장 유족이 기증을 선택해 우리 국민이 공공 미술관에서 귀한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차제에 이런 위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미술품 상속세 물납제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 회장 유족이 기증을 결정하기 전부터 이미 관련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2월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건희 회장 컬렉션이 국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물납제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어 3월 3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를 포함한 12개 단체와 전 문화체육부 장관 8명이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수집가의 열정과 희생으로 지켜낸 귀중한 문화재나 뛰어난 작품 중 상당수가 상속과정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급히 처분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개인 수장품이 국·공립 박물관 소유가 돼 공공에게 개방되는 것은 사익과 공익의 조화”라고 조속한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
음지 속 거래 난무…정확한 과세 어려워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삼성 제공]
여기서 주목할 표현이 ‘예술계의 오랜 문제점’이다. 이건희 컬렉션이 공론화의 단초 구실은 했지만 수면 아래에는 묵은 난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미술품 물납제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대다수 전문가가 공감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미술품 물납제가 자리 잡기 위해 두 가지 선행 과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제도권 밖에서 이뤄지는 거래를 양성화하고, 공신력 있는 가치 감정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해결책이다.
현행 과세 제도는 6000만 원 이상 미술품 거래에 관해 미술품 가격의 20%를 양도소득세로 부과한다. 미술계에서는 수많은 작가가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그만큼 미술품도 많다. 당국이 부동산 공시지가처럼 일일이 가격 흐름을 헤아려 세세히 기록하기 어렵다. 이렇다 보니 다운계약서를 쓰거나, 아예 계약서도 없이 고가의 돈이 오가는 등 불투명한 거래가 횡행하기 쉬운 구조다. 이재경 건국대 상허교양대 교수는 “현재 미술품 시장은 규제 법령이 없어 규제 수단이 전무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15년 ‘미술품 관련 돈세탁에 대한 법률적인 접근’(일감법학 제31호)을 발표한 바 있다.
미술계에서는 미술품을 사적으로 거래하거나 미술품을 통해 돈세탁이 이뤄지는 사례가 잦다고 입을 모은다. 음지에서 이뤄지는 거래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서는 2019년 2월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미술품 유통 및 감정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국가가 화랑과 경매소 등록을 의무화하고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적발되면 처벌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투명한 시장을 만들겠다는 취지였지만 20대 국회 임기 종료와 동시에 폐기됐다.
국세청 상속세 과세도 주먹구구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김환기 화백의 '여인들과 항아리' [삼성 제공]
미술품 감정은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진위감정사(Authenticator)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치감정사(Appraiser)로 나뉜다. 가치 감정을 전문으로 하는 인력이 필요한 이유는 미술품 재화의 독특한 성격에 있다. 일반 재화와 달리 미술품은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력, 작품의 미술사적 의의, 환경 요인, 기호에 따라 가격이 영향을 받는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어도 창작 연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미술품 가격은 전문가들의 합의를 통해 형성된다. 현재 국내에는 전문 감정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합의를 이룰 만한 전문가 집단의 규모가 작다. 공신력 있는 가치 감정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품 시장인 미국에서는 미국감정가협회(AAA) 같은 오랜 전통의 민간 협회가 인증하는 가치 감정사들이 있다. 경매업이 발달한 프랑스는 경매기업이 전문성을 갖춘 경매사들을 고용하고 이들이 작품의 가치를 감정한다.
미술품 가격은 △실거래 가격 △전시 가격 △공정 가격으로 나뉜다. 실거래 가격은 작가가 실제로 작품을 판매하려는 가격을 뜻한다. 전시 가격은 흔히 화랑에서 거래되는 가격으로 작가의 평판, 전시 공간 임대료, 화랑이 가져가는 수수료, 기타 홍보비, 후원 명목 비용 등이 포함돼 유명 작가가 아니고서는 실거래가보다 높게 형성된다. 공정 가격은 여러 전문가의 합의된 의견에 따라 형성된 가격이다. 가치 감정은 공정 가격을 추산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명확한 가치 감정 기준이 없다 보니 국세청의 상속세 과세 기준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김윤섭 소장은 “국세청의 과세 방식은 최대한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한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케슬린 김 법무법인 리우 변호사는 “현재 국세청은 유족의 신고 가격과 작품 구매 당시의 장부 가격을 기반으로 과세한다”면서 “과잉 과세도 문제지만 구매 시점에 비해 가격이 오른 작품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과소 과세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민관이 협력해 공신력 있는 감정 기준 마련을 위해 미국식 모델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대규모 컬렉션이 과세 대상이 되면 국세청(IRS) 소속 가치감정사와 외부 민간 가치감정사, 예술학자, 큐레이터 등 전문가들이 위원회를 구성한다. 케슬린 킴 변호사는 “국내에도 가치감정사가 되길 희망하는 학생이 많다”며 “정부가 정규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국세청이 이들을 고용해 정부가 앞장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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