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는 왜 반성과 전향 대신 친북 세력과 타협했을까[민경우 586칼럼]

운동권 인사들이 ‘사상의 은사’라고 부르는 사람
당산 지진과 뉴욕 정전 비교에 드러난 사회주의 편향성
제3세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북한을 만났을 때
북한은 가난하지만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_{*586세대 NL(민족해방 계열) 이론가이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 출신인 필자가 문재인 시대에 표하는 유감.}

운동권 인사들은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라고 부른다. [동아DB]

3월 중순 이후 한반도와 주변 정세가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미·중 고위급 회담이 열리는 상황에 북한은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중 신냉전, 북·미 대치 국면이 다시 도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이한 것은 한국 정부의 태도다. 3월 하순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대북 인도적 지원을 거론하고 대통령은 서해수호의날 행사에서 남·북·미 대화를 들먹였다.

옭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퍼즐 조각 중 한국이 맞춰야 할 퍼즐 조각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헛돌고 있다. 필자는 여러 차례 문재인 정부 통일정책의 기원이 되는 1980~90년대를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이 문재인 정부를 이해하는 유효한 경로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은 리영희다. 리영희는 운동권 인사들이 ‘사상의 은사’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민주화를 주도한 운동권의 과거 상당 부분은 은폐되거나 미화됐다. 리영희에 대한 평가도 그러하다.

1세계, 2세계, 그리고 제3세계

1970년대에 지구촌은 미국과 소련 양대 국가로 양분돼 있었다. 사람들은 미국을 정점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을 1세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을 2세계라 불렀다. 1세계와 2세계 사이에 많은 국가가 있었는데 이런 국가들을 3세계 또는 비동맹 진영으로 불렀다. 2세계와 3세계는 혼동하기 쉬웠다. 제3세계 국가 대부분이 사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중국은 사회주의 진영이면서 미소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 3세계의 대표 국가이기도 했다.

1960~70년대 한국은 반공국가였다. 한국은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적인 자기 영역을 갖지 못한 소련의 꼭두각시라고 여겼다. 우리는 중국 본토에 있는 지금의 공산당 정부 대신 대만에 있는 중국 정부를 자유중국이라 불렀다. 자유중국이 중국인들의 합법 정부이고 중국공산당은 타도해야 할 정부라고 생각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을 베트콩이라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1960~7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중국을 시작으로 알제리·베트남에서 제국주의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신념과 역사를 지닌 세력임이 명확했다.

리영희의 작업은 이 근방에서 작동했다. 그는 구체적인 사실과 데이터를 통해 중국과 베트남의 현실을 거론하며 조악한 반공적 시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리영희와 비슷한 작업이 서방세계에서도 있었다. 6·8혁명의 주된 이슈 중 하나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침략적 본성에 대한 규탄이었다. 이 과정에서 ‘지옥의 묵시록’ 같은 베트남전쟁을 주제로 한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운동권 출신은 물론 주류사회 많은 사람이 리영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주로 이 맥락이다. 이것이 우리가 리영희를 평가하는 첫 번째 지점이다.

리영희의 업적은 세상이 1, 2, 3세계로 나뉘어 있을 때 2, 3세계에 걸쳐 있던 나라, 구체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2, 3세계 특히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리영희의 작업은 연쇄적으로 중국·베트남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중국·베트남과 유사한 북한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제3세계 사회주의에 대한 리영희의 평가를 잘 보여주는 것은 1976년 중국의 당산시 지진에 대한 평가다. 그는 1988년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976년 당산 지진과 1977년 뉴욕시 정전 사태를 비교한다. 사회주의 치하의 당산 지진에서 시민들이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 자본주의 치하였던 뉴욕 정전 사태에서는 무정부상태였다는 것이다. 양자를 비교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이 지점이 리영희를 평가해야 하는 두 번째 지점이다.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그는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중국은 지금 미국식의 물질적 풍요를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민들은 코카콜라에 입맛을 들였고 지식인들은 보다 절묘한 노동자 관리를 위해서 MIT 대학 경영학 교과서를 들고 밤을 새운다. 자본 원리와 물질주의의 신이 도덕주의와 평등사상을 추방했다. 지금 중국 사회는 타락과 부패, 사기와 횡령, 범죄와 인간소외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당산시의 무역대표단이 한국자본주의를 배우러 온다는 소식이다. 나는 사랑하는 당산 시민들을 위해서 애도사를 쓴다.”

1970~80년대 운동권 인사들에게 ‘자본주의는 경제성장에는 우월하지만 본질적으로 부패한 체제이고 사회주의는 경제적으로는 낙후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자본주의보다 낫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리영희는 그 같은 인식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70년대 후반 제3세계는 나라의 독립을 넘어 경제발전을 두고 분화되고 있었다. 알제리와 베트남 등 거의 모든 나라가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제3세계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리영희가 착목했던 중국과 베트남은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며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가 은연중 추앙했던 사회주의적 미덕을 지닌 사회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적 신념과 가치를 고수하겠다고 주장한 나라와 정치세력이 있었다. 북한이 대표적이다. 북한 이외에는 나라 차원에서 그런 국가를 찾기 어렵다. 굳이 들먹이자면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라틴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등을 들 수 있다. 북한은 소련 사회주의권이 멸망했음에도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키자며 전 세계의 군소 정치세력을 모아 1992년 평양선언을 발표한다.

제3세계 국가로서 북한이 나아간 경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찾기 어려운 군소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락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운동권 중 다수가 이런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리영희다.

리영희가 북한 사회주의에 대해 내린 평가는 흔치 않다. 그는 본질적으로 1970년대 중후반 중국과 베트남을 두고 씨름했던 인물이다. 그는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났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성향을 민족해방의 관점을 넘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이는 3세계 분화 과정에서 북한이 걸은 ‘정신과 제도’를 중시하는 길과 맥이 닿아 있다. 이 길의 마지막 쯤 있는 것이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다.

1970년대 리영희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북한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제3세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북한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그것이다.

1970년대를 거치며 학생들은 사회주의적 신념을 굳힌 상태였다. 중국과 베트남이 그러하다면 북한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면서 주사파가 본격 태동한다. 주사파가 학생운동에 본격 출현하는 과정에서 리영희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다만 1970년대 중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리영희의 정신적 궤적은 북한 사회주의의 발전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1980년대 후반 친북 성향의 조국통일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61세가 되던 1989년 한겨레신문 창간기념 북한 취재 계획과 관련해 구속되기도 했다.

1988년에서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조국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1989년 문익환과 임수경, 황석영 등이 북한을 방문했다. 1980년대 중후반 사회주의가 살아 있던 시기와 달리 1989년 무렵에는 사회주의 동요와 와해 징후가 뚜렷했다. 그 같은 국면에서 북한에 대한 레토릭이 필요했다. 사회주의가 붕괴됐지만 어떻게든 사회주의를 변호하고 조국통일운동의 근거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구도가 만들어졌다. 자본주의는 본성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하지만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고 사회주의는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만 정식적으로 고결한 존재라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1989년 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한국외대 재학생 임수경. [동아DB]

카를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우월한 체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경제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는 없었기에 정신적 우월성을 앞세워 상황을 호도한 것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리영희가 했던 작업이 본질적으로 그러했다. 이 레토릭에 가장 잘 맞는 대상이 북한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중국과 베트남은 운동권이 알던 마르크스류의 사회주의가 아님은 명백했다. 따라서 중국과 베트남을 들먹이며 사회주의를 변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정신적인 승리와 사회주의적 신념을 강조하는 북한이 남한 운동권들의 신념 구조와 잘 맞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연이은 방북 투쟁이 벌어졌고 그들은 북한이 가난하지만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인상을 전했다. 북한을 방문한 황석영의 방북기 제목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그러나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91년 밀입북한 민혁당 김영환은 북한의 낙후함에 대해 실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영환의 소감이 사실에 좀 더 부합할 것이다. 반면 조국통일운동 진영은 그들이 한때 가졌던 사회주의적 신념을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논리를 앞세워 그것을 합리화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통일운동은 ‘가난하지만 순수한’ 또는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민족적 존엄을 버리지 않는’ 북한을 상대로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이 무렵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명료하지 않다. 여기서부터는 기록보다는 증언이 유효하다. 필자가 들은 증언을 요약하면 “그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을 많이 버렸지만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로 요약된다. 더 극적인 평가도 있다. 당시 운동권 주류들은 리영희 선생이 반성과 전향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막았고, 리영희 선생은 소극적으로 이를 묵인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리영희는 반공국가 한국에서 중국과 베트남의 진실을 알리며 지식인의 면모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반면, 그가 믿었던 제3세계 사회주의는 소련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국면에서 그는 그가 한때 믿었던 사회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을 주저하고 1990년대 초반 친북적 통일운동을 도모하는 당시 운동권과 어떤 형태로든 타협했다.

리영희와 통일운동의 먼 유산이 30년을 거슬러 지금에 이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추모한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추모하는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문필 활동이 주로 기억되는 반면 1980년대 후반 그의 생각이 현실적으로 검증되는 시기에 그가 했던 사상적 편력과 지식인으로서의 자세는 제한적 또는 선택적으로 기억되거나 아예 망각되고 있다. 그들이 망각을 강요하는 부분, 중국과 베트남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태도에서 북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친북적 통일운동으로 계승되는 부분을 기억해야 한다.

#리영희 #조국통일운동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