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무령왕릉·천마총·황남대총…망자의 초대에 응하는 우리의 자세

[명작의 비밀] 능·총 내부 공개 논란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1-05-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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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 후 걸어 잠근 무령왕릉

    • 최초로 무덤 내부 공개한 천마총

    • 부장품 특별전만 두 번 황남대총

    • 무덤 내부 분위기 살린 전시 인기

    1971년 7월 9일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 발굴 단원들이 관의 널조각을 꺼내고 있다. [동아DB]

    1971년 7월 9일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 발굴 단원들이 관의 널조각을 꺼내고 있다. [동아DB]

    1971년 무령왕릉(武寜王陵) 발굴, 1973년 천마총(天馬塚) 발굴, 1973~1975년 황남대총(皇南大塚) 발굴. 한국 고분 발굴사(史)에서 1970년대는 매우 각별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형 고분이 모두 이 시기에 발굴됐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천마총·황남대총이 쏟아낸 유물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무령왕릉에선 4600여 점의 6세기 백제 유물이,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각각 1만1500여 점과 5만8000여 점의 5~6세기 신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왕 혹은 왕족의 무덤인 데다 출토 유물의 방대함과 화려함으로 발굴 당시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새로 쓰는 백제사” “새로 쓰는 신라사” “한국 미술사의 새로운 차원”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우연히 찾아낸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송산리고분군에 위치한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송산리 5·6호분 주변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그 존재가 확인됐다. 곧바로 발굴에 들어갔고, 무덤을 문을 연 뒤 불과 하룻밤 만에 유물 수습과 내부 조사를 마무리했다. 조사 결과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부부합장묘로 밝혀졌다. 벽돌로 쌓은 전축분(甎築墳)의 내부는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4600여 점. 유려한 곡선에 불꽃 모양으로 장식된 왕과 왕비의 관(冠) 장식물, 금제 뒤꽂이, 각종 금제 목걸이와 귀고리, 목제 무령왕비 두침(頭枕), 금동제 신발, 토지 신(神)으로부터 이곳 땅을 샀다는 내용을 새겨놓은 지석(誌石), 무덤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석수(石獸) 등이 나왔다.

    천마총은 황남대총과 함께 경북 경주시 시내 한복판 대릉원(大陵苑)에 위치한 신라 고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천마총 발굴은 1973년 경주관광종합개발 계획에 따라 진행됐다. 정부는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당시 98호분)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 공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발굴 경험이 없던 고고학계로서는 황남대총 발굴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이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바로 옆의 규모가 다소 작은 천마총(당시 155호분)을 시험 발굴하기로 했다.

    시험 발굴이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해 모두 1만1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무덤 주인공은 금관과 금제 허리띠, 금 드리개, 금 귀고리를 비롯한 화려한 장신구와 금동제 봉황 장식 고리자루 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착용한 상태였다. 무덤 주인의 머리맡에 있었던 부장품 궤(크기 1.8×1.0m)에도 칠기류, 금동 및 유리그릇, 장식 마구(馬具) 등 다양한 보물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의 유일한 그림 유물 ‘천마도 장니(天馬圖 障泥)’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황남대총은 국내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남북으로 무덤 두 기가 붙어 있는 표주박 모양의 쌍분(雙墳)으로, 남북 길이 120m, 동서 길이 80m, 높이는 남분 21.9m, 북분 22.6m이다. 1973~1975년 발굴조사에서 금관과 금제 허리띠, 봉수(鳳首) 모양 유리병 등을 비롯해 반지, 팔찌, 신발, 환두대도, 유리구슬, 물고기 뼈, 조류 뼈, 말안장 꾸미개 등 각종 말 장신구, 각종 쇠붙이, 서역(西域)에서 들어온 수입품, 이국적인 금팔찌 등 5만8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남쪽 봉분은 남자의 무덤, 북쪽 봉분은 여자의 무덤이었다. 부부합장묘였다. 남자 무덤을 먼저 조성하고 후세 여자 무덤을 덧대어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인공을 정확하게 밝혀낼 수는 없지만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 시대(356~500년) 왕릉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부장품 많지만 주인 모르는 塚

    고분에서 나온 유물들은 경이로웠고 유물을 쏟아낸 고분은 신비의 대상이었다. 우리 땅 곳곳의 고분을 파보면 도굴당한 흔적이 허다한데 놀랍게도 세 고분 모두 도굴 흔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엄청난 유물이 쏟아진 것이다. 양과 질 모두에서 아직까지 이 세 고분을 능가하는 곳은 없다. 세 고분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무령왕릉은 백제역사유적지구,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경주역사유적지구)으로 등재됐다.

    무령왕릉은 발굴이 이뤄진 고대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고분이다. 하지만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주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주인 이름 대신 대표적인 출토 유물의 이름을 활용하기로 했다. 금관이 가장 대표적인데 금관총(1921년 발굴)이 이미 ‘금관’이라는 명칭을 써버렸기 때문에 금관 대신 ‘천마도 장니’의 이름을 따 천마총이라 붙였다.

    발굴 이듬해인 1974년 천마총 명명(命名)이 결정되자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경주 지역의 김씨 문중에서 “155호분은 분명 신라 왕실의 무덤일 텐데, 왜 하필 말의 무덤이라 이름을 붙이느냐”고 1981년 국회에 청원을 제출했다. 천마총이라고 하면 천마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기에 후손들의 반발도 이해는 간다. 이를 두고 문화재위원회가 재심까지 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좋은 이름을 이미 다른 고분이 다 써버렸기에 98호분은 그냥 황남대총이라 이름 붙였다. 황남동의 대형 무덤이라는 뜻이다.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인다. 총(塚)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왕이나 왕비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어서 아쉽게도 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육안으로 찾기 힘든 무령왕릉

    발굴이 끝나면 출토 유물은 박물관으로 옮기고 현장은 상황에 따라 보존 또는 활용을 하게 된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은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에 있고, 천마총과 황남대총 유물은 거의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무령왕릉의 경우, 내부 보존을 위해 1997년 고분을 영구 폐쇄하고 바로 옆에 모형관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모형관 내부엔 무령왕릉과 인근 송산리 5, 6호분의 내부를 실제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재현해 놓았다. 무령왕릉을 재현한 전시관인 셈이다. 무령왕릉을 절개한 모형을 유리 진열장 속에 배치해 고분 구조와 발굴 상황을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했고 각종 출토유물 복제품, 관련 영상 시각자료를 제공한다. 모형관에 가면 무령왕릉에 관한 정보는 풍부하지만 아무래도 감동을 받기 어렵다. 출토 유물이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이기 때문.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의 실체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무덤의 봉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관만 보고 이곳이 고분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렵다. 물론 그 덕분에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도굴을 피해 갈 수는 있었지만 지금 보면 입구가 좀 옹색해 보인다. 입구에 무령왕릉 내부 사진을 붙여놓아 이곳이 그 유명한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지점은 무령왕릉의 입구도 아니다. 발굴 당시 진입로이던 무령왕릉 배수로의 끝부분이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무령왕릉의 역사적 위상에 비하면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다.

    천마총은 무덤 내부를 복원해 관람할 수 있게 했다. 1971년 수립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르면, 경주시내의 대형 고분을 2기 정도 발굴하고 내부를 그대로 보존 공개하고 유물 출토 상황을 볼 수 있도록 꾸밀 계획이었다. 황남대총도 내부를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천마총만 내부를 공개했다. 천마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됐다. 봉분은 지름 47m, 높이 12.7m이다.

    천마총 내부엔 내부 구조와 함께 출토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무덤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절개한 단면을 보여준다. 내부 공간의 절반은 진열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돌무지(積石)와 덧널(목곽·木槨), 널(목관·木棺)의 규모나 구조, 전체 크기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제 무덤 내부를 공개 전시장으로 꾸민 것이다. 그러나 발굴 당시의 실제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따라 내부 전시 공간을 발굴 당시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개선해 2018년 다시 문을 열었다.

    유일하게 내부 공개한 천마총

    고분 내부를 공개해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을 두고 부적절하다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분 내부, 즉 죽은 자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흥미롭고 신비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천마총은 무덤 내부라기보다는 전시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1500년 전 죽은 자가 누워 있던 공간이라는 분위기를 더 살릴 수는 없을까.

    황남대총은 발굴 이후 봉분을 덮어 원래 모습을 되살렸다. 동서 길이 20m, 남북 길이 100m, 높이 22~23m.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붙어 있는 표주박 모양이다. 모양도 특이한 데다 전체적으로 육중하고 당당하다. 바로 옆의 고분들과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 아름다우면서도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황남대총 주변에는 늘 사진작가가 몰린다.

    무령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하면 무슨 유물이 떠오를까. 금관, 금관 장식, 허리띠, 천마도, 환두대도 등 보통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런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모두 일종의 명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 가면 한쪽에 독립된 공간을 구획해 황남대총 금관을 전시하고 있다. 신라 고분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금관을 특별대우하고 있는 것이다. 고분 출토 유물 전시는 상설전이든 특별전이든 금관을 포함해 고가에 유명한 출토품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부장품 대량 공개한 황남대총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두 무덤이 붙어 있는 형태다. [동아DB]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두 무덤이 붙어 있는 형태다. [동아DB]

    유명 출토품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관람하던 분위기가 2010년대 들어 바뀌기 시작했다. 2011년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맞아 국립공주박물관은 기념특별전 ‘무령왕릉을 격물(格物)하다’를 개최했다. 발굴 당시 보고하지 못했거나 그동안 공개하지 못했던 자료를 중심으로 750여 점의 유물과 자료를 선보였다. 유물 자체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왕비의 시상(屍牀·주검받침), 은어뼈 등 희귀 자료를 공개해 많은 관심을 끌었다. 특이하게 무령왕릉에는 은어 140여 마리가 함께 부장돼 있었다.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황남대총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이 열렸다. 금관, 새날개 모양 금관 장식, 금제허리띠, 금동관, 둥근 고리 칼(환두대도), 옥충(玉蟲) 장식 말 안장, 서역에서 들어온 봉수(鳳首) 모양 유리병과 유리잔 등 120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의 특징은 전시장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설치한 것이었다. 황남대총 남분의 내부 덧널 구조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장치였다. 당시 고분 내부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런 시도는 더욱 과감해졌다. 2011년 국립경주박물관은 ‘황남대총-신라 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를 개최했다. 박물관은 이 전시에 황남대총 출토 유물 5만8000여 점 가운데 5만2000여 점을 선보였다. 기존 관행을 뒤집은 것이다. 쇠 화살촉, 쇠도끼, 쇠 투겁창과 같은 철기, 토기, 유리구슬, 조개껍데기 등등의 다양한 유물이 무더기로 관람객을 만났다. 1500년 만의 만남이었다. 수많은 유리구슬을 낱개로 또는 줄에 꿰어 더미로 쌓아놓았다. 덩이쇠, 쇠 투겁창, 쇠도끼, 쇠 화살촉 등 각종 철기는 촘촘히 포개놓았거나 아예 수십 개씩 끈으로 묶어놓았다. 전시실 곳곳에 토기 수납장도 배치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문화재청]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문화재청]

    무덤 내부와 비슷하게 부장품 전시

    쓰러진 채 전시된 유물도 많았다. 국보로 지정된 금관은 발굴 상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다. 왕의 시신 옆에서 나온 진귀한 유물도 여러 겹으로 포개어져 나뒹구는 모습으로 전시했다. 국보로 지정된 봉수 모양 유리병도 청동그릇 유물들 틈에 끼어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11년 ‘금관 최초 발견 90년-금관총’ 특별전을 열 때도 출토 당시의 모습에 맞추어 진열장을 꾸몄다. 금관을 쓰러뜨리고 금제허리띠를 풀어놓아 출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 같은 전시 방식은 2014년 ‘천마(天馬), 다시 날다’ 특별전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분위기는 황남대총 특별전과 흡사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전시된 유물의 방대함에 압도당했다. 출토 당시의 모습에 가깝게 전시함으로써 관객들은 발굴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 천마총 황남대총은 죽은 자의 무덤이다. 무덤의 발굴은 어찌 보면 죽은 자를 만나는 것이다. 화려한 유물 일부만 만나는 과정이 아니다. 무덤 주인과 함께했던 소소한 유물들까지,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순장자의 흔적까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녹슨 철기, 토기 조각, 화살촉, 조개껍데기 등 사소한 유물 하나하나가 전부 무덤의 일부다.

    10여 년 전 방문했던 일본의 한 고고학 박물관이 생각난다. 규슈(九州) 동남쪽 미야자키(宮崎)현에 사이토(西都)라는 작은 도시엔 4~7세기에 조성된 고분 300여 기가 산재한다. 사람들은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군이라 부른다. 고분군의 한편엔 사이토바루 박물관이 있다. 10여 년 전 이 박물관을 찾았을 때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의 입구도 그랬지만 관람 동선(動線) 마지막에 위치한 수장고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보이는 수장고)였다. 밖에서 볼 수 있는 대표 유물은 수많은 인골(人骨)이었다. 각각의 나무 상자 속에서 유리창 쪽을 향하고 있는 수많은 두개골. 1500여 년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두개골을 한눈에 볼 수 있다니, 그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더 많은 고분 만나게 될지도

    경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발굴한 금관총,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冢)을 최근에 다시 발굴했다. 누락된 정보를 추가로 확인하고 이를 통해 이 고분들의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경주 도심의 고분 발굴 및 재정비도 이어지고 있다. 천마총 내부는 다시 정비했고 금관총 전시관도 조성하고 있다. 고분의 의미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공주에서는 3월부터 무령왕릉 주변의 송산리고분군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고분들이 이미 도굴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대박의 꿈을 가져볼 만하다.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다. 곧이어 천마총, 황남대총도 발굴 5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가 그동안 만났던 세 고분의 상황은 비슷한 듯 달랐다. 한 곳은 모형관을 만들었고, 다른 한 곳은 내부를 개방했으며 나머지 한 곳은 봉분을 덮어 원래 모습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 방식을 두고 저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모두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무엇이 정답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 차이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앞으로 옛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

    #무령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신동아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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