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한미동맹 손상하는 발언
트럼프-김정은 ‘톱다운’ 방식, 애초 비정상
무력 위협하에서는 햇볕정책 불가능
폭탄 떨어졌는데 평화 외치면 안 돼
대북전단금지법, 햇볕정책 원칙 어긋나
北 요구에 쉽게 평화 얻으려는 태도 나빠
중국 눈치 탓에 쿼드 참여 못 해? 옳지 않아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오히려 중국을 설득해 쿼드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중식 기자]
4월 6일 경기 성남시 가천대에서 만난 라종일(81) 가천대 석좌교수는 단호했다. 지난 3월 말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차관급)은 신간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에 “한국은 한미동맹에 중독돼 왔다. 압도적인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 현상과 닮아 있다”고 썼다. 가스라이팅은 연인 사이에서 상대방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도록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압박하는 행위를 뜻한다. 라 교수에게 이 대목을 들려주니 되돌아온 말이었다.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은 진보의 시각에서 한반도 문제를 진단해보고 싶어서였다. 라 교수는 김대중(DJ)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과 주영 대사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장관급)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지난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의 외교안보 자문그룹인 ‘국민 아그레망’에 참여했다. 얘기는 다시 ‘가스라이팅’으로 돌아간다.
이벤트 갖고 정치문제 해결 못 해
- 김 원장은 “한국은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습니다.“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합니까? 우리도 역할을 하죠. 안보를 전적으로 우리 책임으로 했다면 경제개발도, 민주화도 어려웠을 겁니다. 군비에 엄청난 부담이 실리기 때문이에요. 군사화한 나라에서는 청년들이 군에서 오래 복무해야 하고, 군사문화가 형성됩니다. 좋아서 미군에 의지하는 게 아닙니다. 서구 모든 나라와 일본, 대만까지 미국에 안보를 의지해요. 손익을 따지면 자주국방을 하는 것보다 그게 낫기 때문이에요. 미군이 없었다면 한반도에 또 전쟁이 터졌을 겁니다. 북한은 도발을 했을 테고 우리 군도 보복했겠죠. 혹은 반대일 수도 있어요. 그때마다 보복을 자제하도록 말린 게 미군이에요. 그런 여러 상황을 고려 않고 고위공직자가 가스라이팅 같은 표현을 쓰는 건 유감이에요. 지식인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죠.”
야권의 한 대북통은 “라종일 교수는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와는 결이 다른 전문가”라고 평한 바 있다. 진보 진영에 속하지만 균형 잡힌 시각에서 외교 사안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낭만적 민족 담론과 냉혹한 호전(好戰) 담론이 경합하는 한반도에서 라 교수의 가치는 도드라진다. 그와 남북관계에 대해 얘기해 볼 시점이다.
- 북한은 3월 21일 단거리 순항미사일 2발, 3월 2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습니다. 북한이 미국 새 정부를 도발했다고 봐야 할까요.
“앞으로 일어날 협상 준비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북한의 힘은 상대방을 해칠 수 있는 무기가 있다는 것밖에 없잖아요. 유일한 수단을 갖고 ‘우리를 무시하지 말라’ 하면서 앞으로의 협상에서 위상과 능력을 보여주려는 것 아니겠어요? 구태여 도발이라고 할 게 있나.”
- 북한 김여정 부부장은 3월 30일 발표한 담화에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그 철면피함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같은 뜻이라도 문명인답게 예의를 갖춘 말을 쓸 수 있는데, 험한 말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의 험한 정서를 보여줍니다. 북한은 군사문화가 지배적인 나라예요. 밥 먹는 것까지 ‘속도전’이라 하면서 군사용어를 써요. 그래도 우리 정부가 대꾸하지 않고 많이 자제해요. 똑같이 나쁜 표현을 쓰지는 않더라고요. 좋은 일입니다. 북한도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그런 말을 하면 순간적으로 자기 국민에게 좋게 보일 수 있겠지만, 결국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 북한은 2018년 6월 하노이 회담 이후 30번 넘게 미사일을 쐈지만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별 제재 없이 넘어갔습니다. 현직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대응은 다르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해석인데요.
“북한이 유엔 안보리 제재 규정을 어겼다는 건데, 안보리가 알아서 처리해야죠. 그러나 현상황에서는 특별히 더 제재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 문제를 푸는 ‘톱다운’ 방식은 어려워진 셈 아닙니까.
“그건 애초에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트럼프 본인이 독특한 사람이잖아요. 본인의 정치적 필요도 있었고요. 그렇게 해서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나쁜 방법은 아닙니다만,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잖아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쉽게 한마디로 해결한다? 너무 낙관이 지나쳤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결국은 실패했죠.”
-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만나는 이벤트 등에 우리 정부는 기대를 걸었던 것 같은데요.
“이벤트를 갖고 정치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시적으로 지도자들이 인기를 올린다든지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든지 할 수는 있겠죠. 평창올림픽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벤트를 갖고 낙관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베토벤으로 독일군 막을 수 있나
3월 26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전날 발사한 단거리 탄도미사일 추정 발사체에 대해 ‘신형전술유도탄’이라 밝히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햇볕정책도 과거의 오래된 유산인데요.
“햇볕정책의 근간은 옳다고 생각해요. DJ가 햇볕정책을 시작할 때 첫 번째 내건 조건이 무력 도발은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죠. 이해관계가 다른 게 있으면 의논해서 해결해야죠. 이럴 때 폭력이 개입되면 정상 관계가 아닙니다. 무력 위협하에서 평화를 추구하면 안돼요. 햇볕정책은 유지하되 무력에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햇볕정책이고 뭐고 불가능해요. 그런 문제가 이제까지는 소홀히 돼왔어요.”
- 햇볕정책이 나온 시점과 비교하면 지금은 북한이 핵을 완성했습니다.
“핵을 완성한다 해서 북한식 표현으로 ‘만능의 보검’을 갖는 건 아닙니다. 소련이 우리와 수교할 때 소련 외무장관이 셰바르드나제(이후 조지아 대통령 역임)였습니다. 셰바르드나제가 김일성을 만나 ‘남한과 수교해야 한다’고 하니 김일성이 굉장히 화를 내면서 ‘그럼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했어요. 셰바르드나제가 ‘개발해라. 우리는 수천 발 핵무기를 갖고도 망했다’고 말했어요. 소련이 수천 발 핵무기를 갖고도 미국과 유럽을 위협하지 못한 이유가 뭡니까. 쓰면 본인들에게 해가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쓰면 미국도 피해를 보겠지만 소련도 틀림없이 망한다는 걸 알게 했어요.”
라 교수의 설명에는 역사에 대한 통찰과 외교 현장을 통해 얻은 현실 감각이 버무려져 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안슐루스)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군사 위협을 못 막았어요. 히틀러와 슈슈니크 오스트리아 총리가 담판을 했죠. 물론 협박식이었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너흰 같은 독일 민족인데 뭘 했느냐. 우리는 군사력을 갖고 프랑스와 싸웠다’고 압박했어요. 오스트리아 총리는 ‘우리는 문화를 일으켰다. 베토벤도 오스트리아 시민이었다’고 답했죠. 베토벤도 훌륭하지만 베토벤으로 독일 군대를 막을 수 있어요? 폭탄이 떨어졌는데 평화를 외치겠다고 하면 안 돼요.(*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2020년 7월 30일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외치는 사람만이 더 정의롭고 정당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훌륭한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평화를 사랑만 한다고 평화가 이뤄집니까. DJ는 ‘무력 도발은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는데, 그건 잊어버렸어요.”
- 문재인 정부가 햇볕정책의 계승자를 자처하나 국방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봅니까.
“현재로는 한미합동훈련도 안 하고, 국방력 강화에도 적극적이지 않으니 그런 셈이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유럽이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안보를 유지했겠습니까? 일본도 마찬가지죠. 미국의 군사력을 우산으로 활용하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남한테 폭력으로 위협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 역사적으로 미국 민주당 정부는 투명성을 중시해 왔습니다. 북한이 핵을 신고하고 사찰단을 통해 이를 검증하는 과정을 요구하지 않을까요. 북한은 이 투명성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없앴다고 하는 말만 믿을 수는 없죠. 협상 과정에서 해결돼야 할 일이지만 원칙적으로 검증 없이 신뢰를 구축할 수는 없어요.”
- 바이든 정부가 중국 인권 문제를 거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트럼프 정부는 인권 문제를 경시했는데, 사실 인권은 미국의 정체성과 같은 문제입니다. 중국 인권은 미국뿐 아니라 서구 여러 나라가 모두 다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문제 아닌가 싶어요. 특히 위구르, 홍콩, 티베트 문제가 그렇죠.”
그러니까 북한이 깔보는 것
3월 30일(현지 시간) 리사 피터슨 미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 차관보 대행은 ‘2020 국가별 인권보고서’를 발표하며 “북한의 지독한 인권침해에 계속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인권이 어젠다가 되면 북·미 간 대화에 변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안보 문제가 더 급하다면 인권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조금 뒤로 처지지 않겠습니까? 인권에 대한 우리 입장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북한에 가면 김일성 동상 앞에 가장 먼저 데려간다”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동상을 구경할 수 있지만 우상한테 절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규모 아리랑 축전도 관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게 아니다’라는 이유로 거부했어요. 또 우리나라는 사형을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북한 관료가 ‘법을 어기는 나쁜 놈들은 죽여야 한다’ 해요. 나는 ‘역사를 보면 사회가 나쁘고 법을 어기는 사람은 안 나쁜 경우가 많다. 법을 어긴다고 죽이면 좋은 사람을 죽이고 나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죠. 그런 얘기는 북한 사람에게 강조해야 해요. 인권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확실히 하되 원칙만 원론적으로 고수할 수 없으니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신해야죠.”
- 3월 23일(현지 시간)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는 공동 제안국에서 빠졌습니다. 2019년부터 3년 연속으로 빠진 겁니다.
“옳지 않아요. 바로 그 얘기예요. 북한에 ‘너희가 위대한 지도자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람의 인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제회의에서 이런 제안을 하는 데 빠질 수가 없다’ 이렇게 설명해야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가 돼요. 북한 눈치 보면서 이랬다저랬다 참여했다 안 했다 하면 나쁘죠. 그러니까 북한이 깔보게 되죠.”
- 여당이 밀어붙인 대북전단살포 금지법도 우려할 만하지 않습니까.
“대북 전단 살포는 나도 반대해요. 그렇지만 법을 갖고 금지한 건 도저히 명분이 없어요.”
‘죽창가’ 운운하며 분열 만들어놓고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사진 앞줄 오른쪽부터)이 4월 2일(현지 시간) 미국 메릴랜드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안보실장 회의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북한이야말로 우리한테 전단을 많이 보냈습니다. DJ 정부 때 ‘대통령이 비서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청와대에서 부부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는 내용의 전단을 삽화까지 그려 살포한 것을 본 기억도 있습니다. 또 사이버전도 계속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못 하게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북한이 요구했기 때문에 법으로 금지한다?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정부는 인접 주민의 피해 때문이라고 하는데, 인접 주민 안보는 정부가 지켜야죠. 북한이 무력으로 위협하니 금지한다는 논리인데 햇볕정책의 제1원칙에 어긋나요.
과거 휴전선에 뉴스·드라마·스포츠 등을 틀어주는 전광판이 있었어요. 내가 청와대 있을 때 북한에서 그 전광판을 없애달라 했어요. 끝까지 반대했는데 내가 주일 대사로 간 뒤 없앴어요. 2007년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의 조건 중 하나로 북한이 요구했다고 해요. 세계인이 접근 가능한 드라마도 못 보게 하고, 보면 중죄로 처벌한다? 심각한 인권 박탈이죠. 사람들을 우민화해 가둬놓은 정권에 그런 협조는 못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북한 요구를) 따라가서 쉽게 평화를 얻으려는 태도는 나빠요.”
- 최근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친서를 교환했습니다.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직후라 더 눈길을 끌었는데요.
“중국도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걸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유엔 제재에도 다 중국이 찬동했잖아요. 친서를 교환해도 북·중 관계가 늘 우호적이지만은 않아요. 경우에 따라 중국에 북한이 전략적 자산이기도 하지만 전략적 부담이 될 수도 있어요. 북·중 관계는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지금은 아마 자산으로 볼 거예요.”
- 김 위원장은 핵무기를 정권교체를 막는 유일한 보장책으로 간주하지 않겠습니까.
“핵무기 없이도 권력은 안전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 오거나, 김 위원장 본인이 핵무기 없이 정권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든지 해야죠. 맹자 말씀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신(民信), 국민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음으로 족식(足食), 먹는 게 넉넉해야 한다. 끝으로 족병(足兵) 즉 군대가 튼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맹자도 군대가 필요하다고 봤지만 그보다 앞서는 안보를 국민 신뢰로 꼽았어요. 김 위원장이 이 점을 깨달으면 좋겠어요.”
- 김 위원장이 주택 건설 현장을 자주 방문한다고 합니다. 민생에 신경 쓴다는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잖아요. 바로 족식에 해당하는 겁니다. 국민이 변했다는 뜻도 돼요. 애쓰지 않으면 자기 권력에도 문제가 있다는 자각이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김정은 정권에는 좋은 신호인가 생각해 봐야 해요. 또 지방 사람들도 ‘왜 평양만 잘사느냐’는 인식을 품을 수도 있죠. 그러면 북한 정권은 꼼짝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리겠지만 앞날은 모를 일이죠.”
- 권력에 균열이 오고 있다는 징후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있겠죠. 권력이 그간 ‘참아라, 혁명만 해라’고 했다면 이제는 국민이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 바이든 정부는 한·미·일 공조를 중시합니다. 그러려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주일대사가 총리와 외무상을 못 만났다고 합니다.
“대일외교에서는 국민의 의사와 정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번 정부가 그걸 상당히 훼손했어요. 전에는 일본의 친한(親韓)적인 사람들, 양심적 시민운동가들이 열심히 우리 편을 들었어요. 2000년대 초에는 일본 대중의 정서가 엄청나게 친한(親韓)적이었어요. 일본에도 한국과 좋은 관계를 만들려는 모임이 많아요. 그들과 같이 간다는 생각을 해야 했는데, 이번 정부가 별 소득 없이 한일관계를 굉장히 훼손했어요. 국내에서는 ‘죽창가’나 ‘토착왜구’ 운운하면서 분열을 만들어놓고요. 지금은 또 말을 바꾸고 있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은 1월 18일 “2015년 양국 정부 간 위안부 문제 합의가 공식합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반면 2017년 12월 28일에는 “2015년 한·일 양국 정부 간 위안부 협상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고 했다. 라 교수가 말했다.
“일본 정부도 2015년에 나름대로 무리를 해가며 위안부 합의에 나섰다고 알고 있어요. 미국의 회유도 있었겠죠. 일본 국민 처지에서 보면 합의해도 번복하니 한국과 어떻게 협상할 수 있느냐 생각할 수 있어요. 일본 국민도 우리 정부를 신뢰하고 바라보기가 참 힘들게 됐어요.”
中 눈치 보며 참여 못 한다?
-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첫 정상회담 상대가 스가 총리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거리를 둔 채 미국과는 밀월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미·일 공조에 균열이 오는 것 아닙니까.“이미 균열이 있지 않나요? 지소미아를 놓고도 불협화음을 냈잖아요. 정보 교류가 가장 중요한 국가는 안보 위협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우리나라인데도 말입니다.”
- 대북 정보는 한국보다 일본이 더 뛰어나지 않습니까.
“상당히 뛰어나죠. 나는 일본이 대북 정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최근 외교가의 최대 이슈는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다. 쿼드는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빗대 ‘아시아판 나토’라고도 불린다. 미국은 ‘반(反)중국 군사동맹’이라는 해석에 선을 긋는 상황이다.
4월 2일(현지 시간) 미 워싱턴에서 열린 안보실장 회의에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서훈 국가안보실장에게 한국이 쿼드에 참여해 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4월 11일 보도했다. 청와대 측은 보도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안보 멘토인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같은 날 공개된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이 미국 편에 서면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기 어렵게 된다”고 했다. 여권 안팎의 발언을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는 쿼드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쿼드 참여 여부를 놓고 문재인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모양새입니다.
“쿼드가 미국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외려 미국이 한국에 불리한 행동을 하는 경우 쿼드를 활용해 억지할 수 있어요. 6·25전쟁 때 영국이 가장 먼저 참전했습니다. 당시 영국 외무성은 한국이 공산권에 넘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홍콩 수비대로 있던 부대를 빼서 한반도로 보냈어요. 그렇게 참여해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 중 미국이 무리하게 나가려 하면 영국이 이를 억지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쿼드 내에서 한국에 유리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참여해야 합니다. 참여해서 큰 손해가 날 게 별로 없어요. 참여한 뒤 그 안에서 국익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생각해요.”
- 중국 때문에 주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건 나빠요. 중국이 외부에 발표 안 되는 메시지를 한국 정부에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가 있다 해서 중국 눈치 때문에 쿼드에 참여를 못 하겠다는 건 옳지 않죠. 오히려 중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가 쿼드에 참여하는 게 지역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 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게 옳은 접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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