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낙인찍던 시절 다룬 소설 ‘적인종’ 늦가을에 출간
권력 가진 진보, ‘실패한 진보’라는 이름 얻게 될까 걱정
국민이 행복해지려면 두레와 품앗이 정신 되살려야
투표용지에 ‘기권’란만 만들어도 정치 많이 바뀔 것
최근 에세이집 ‘자박자박 걸어요’ 출간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조차 걸린다
살아 있는 동안 재미나고 즐겁게 두루 어울려 살자
행복, 희망, 건강, 기쁨 향해 자박자박 다가가야
작가 김홍신은 최근 에세이집 ‘자박자박 걸어요’를 출간했다. [지호영 기자]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3050클럽 가입국이 됐지만 우리 국민이 느끼는 행복 체감도는 경제성장 수준에 비해 크게 낮다. 국제연합(UN)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복지와 경제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3월 20일을 세계 행복의 날로 정하고,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올해 유엔이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50위를 기록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잘살게 된 우리 국민이 느끼는 행복감은 크게 뒤처져 있는 것이다. 잘 먹고 잘살게 된 만큼 더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 이유는 뭘까. 소설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은 “기적을 일구었으나 기쁨을 잃어버렸고, 배고픔은 해결했으나 배 아픔을 해결 못 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그는 삶에서 챙겨야 할 소중한 것들을 한데 묶어 최근 에세이집 ‘자박자박 걸어요’를 펴냈다. “세상 비교법에 속지 말고, 행복을 포기하지 말자”는 그에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온전히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들어봤다.
배고픔 해결했으나 배 아픔 해결 못 해
- 코로나19가 야기한 상황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강연과 강의를 못 하게 돼 밥벌이 수단이 1년 넘게 싹 없어졌어요. 책도 많이 안 팔리는 시대라 글만 써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있을지 걱정이에요. 어떤 자료를 봤더니 수입이 적은 직업군 순서가 신부님 다음에 작가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코로나가) 몇 달 못 가려니 생각하고, 이 기회에 책이나 읽자고 맘먹었는데 몇 달이 지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니 글조차 잘 읽히지 않더군요. 안되겠다 싶어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200자 원고지) 1200매 정도 써서 출판사에 넘겼어요.”
- 어떤 소설인가요?
“‘적인종’에 대한 얘기예요.”
- 적인종?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있죠. 쉽게 얘기해서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 불린 사람을 적인종이라고 이름 붙인 거죠.”
김 작가는 젊은 시절에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소재 삼아 ‘적인종’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에 대꾸조차 못했어요. 동네에서 속 썩이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했고, 말을 잘 안 들어도 빨갱이라고 하던 시절이었죠. 군사정권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은 소위 ‘진보’나 ‘좌파’들이 득세하고 있지만 그때는 ‘좌파’ ‘빨갱이’라고 낙인찍히면 생존하기 어렵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얘기를 쓴 겁니다.”
김 작가는 최근 ‘김홍신문학관’에 전시할 자료를 정리하다가 군사정권 시절 당국의 검열에 걸려 빨간 글씨로 ‘불가’ 통보를 받았던 오래전 원고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군사정권 시절)는 책 하나도 맘대로 내지 못했어요. ‘인간시장’ 주인공도 원래 ‘권총찬’으로 지으려 했는데, 계엄 검열단이 주인공 이름 사용 불가 판정을 내려 ‘장총찬’으로 바꿨지요. 글을 쓰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제가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김문수·이재오·이우재·김원웅·이부영 등 이른바 좌파, 진보 진영 출신 인사들에게는 늘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어요.”
‘빨갱이’라는 단어는 남북분단과 6·26전쟁을 겪은 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박정희와 전두환 등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그였다. 특히 좌파와 진보 진영 인사들을 싸잡아 비난하기 위한 부정적인 단어로 주로 쓰였다.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에 압도당했던 한국 사회의 모순을 김 작가가 소설로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했다. 그가 펴낼 신작 소설 ‘적인종’(가제)은 올해 늦가을쯤에나 세상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사랑과 용서, 배려와 베풂의 정치 펴야
[지호영 기자]
“과거에는 권력을 갖지 못했던 진보가 지금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세상이 크게 변한 것만은 분명하지요. 그런데 진보가 권력을 갖게 된 뒤 너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어요. 비판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자칫 역사적으로 ‘실패한 진보’라는 이름을 얻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김홍신 작가는 “산업화를 이룬 보수와 민주화를 이룬 진보 두 집단 덕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두 집단 모두 국민으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진보든 보수든 양쪽 모두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편만 옹호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 사회 갈등의 골이 더 깊어져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상대방이 잘못된 것은 아니거든요. 나와 입장이 다를 뿐이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인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세계 유일의 국가이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됐는데도 우리 국민이 느끼는 행복도는 유독 낮아요. 서로 존중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탓에 사회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니 국민이 느끼는 행복도가 높아지기 어려운 것이죠.”
김 작가는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기적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DNA에 ‘품앗이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며 “짧은 시간에 괜찮은 나라를 만들어낸 우리 국민이 행복해지려면 두레와 품앗이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 행복도를 높이려면 무엇보다 정치가 제구실을 해야 한다”며 “갈등하고 반목하는 정치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 배려와 베풂의 정치를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나뉘어 반목하게 된 근본적 책임이 정치에 있어요. 정치가 극한 대결로 치닫게 된 것은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모든 것을 누리는 현재의 승자독식 구조와 무관치 않아요. 지난해 총선을 보자고요. 전국적으로는 야당이 받은 표와 여당이 받은 표 사이에 차이가 크지 않아요. 그런데도 승자독식 때문에 의석수가 180대 100석으로 큰 차이를 보였죠. 결국 승자독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도를 바꿔줘야 해요. 중선거구제를 연구해서 채택할 필요가 있어요. 또 전임 대통령들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려면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현재의 권력구조도 정돈해 줘야 하고요. 대통령에게 쏠려 있는 부담을 덜어줘야 대통령도 행복해지고 국민도 행복해질 수 있어요.”
15, 16대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 작가는 “우리 정당은 내부 이견을 포용하지 못하고,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일개 정당의 구성원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회의원, 국민대표 아닌 정당 구성원처럼 행동
“국회는 국민 대표자 회의의 준말입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답게 정치하라는 뜻이 국회의원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어요. 여당이 찬성한다고 야당이 반대하는 소위 당론 투표는 얼마나 비민주적인 것인가요. 1표의 이탈 표도 없도록 표 단속하는 것을 민주정치라고 할 수 있나요. 국회의원은 당론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소신껏 투표할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현실은 국민 대표자가 아니라 정당 구성원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요.
“국민 뜻과 상관없이 당론이라면서 100% 투표에 참여해서 100% 똑같이 표결하는 것을 민주정치라고 할 수는 없지요. 내부 이견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정당이라야 민주정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김 작가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 소신껏 표결에 참석했다가 ‘소신파’라는 칭찬과 ‘상습적 당론거부자’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은 정당 지도부 뜻에 따라 움직이는 부속물이 아닙니다. 오로지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소신껏 정치를 한 사람만이 역사에 남습니다.”
- 국회의원은 누구나 소신껏 정치를 하고 싶겠지만, 당론을 거부했다가 다음 총선에 정당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당 지도부 눈치를 보는 게 아닐까요.
“정치를 바꾸려면 선거와 투표제도부터 바꿀 필요가 있어요. 기호란에 ‘기권란’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죠.”
-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지금은 원내 의석수에 따라 정당이 공천한 후보를 기호 1, 2, 3, 4 … 순으로 표시하고 있죠. 그런데 투표용지에 올라 있는 후보들이 모두 맘에 안들 때에도 유권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만약 유권자가 각 당이 추천한 후보자가 맘에 들지 않을 때 ‘기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 만약 기권표가 가장 많이 나오면 유권자가 나머지 후보들을 거부한 것이 되니 재선거를 치르도록 하고요. 그래야 정당들이 유권자를 의식해서 좀 더 신중하게 공천하지 않겠어요.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우리 정치가 많이 바뀔 수 있을 겁니다.”
한국 정치를 개선하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는 ‘기권란’ 신설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칭찬 선거운동’ 캠페인도 제안했다.
“치열한 네거티브 공방을 통해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누구나 영광의 상처를 안고 임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상호 비방의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지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기고 말죠. 꼭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싫은 사람이 되고 마니까요. 그런 미움의 정치, 상호 비방의 선거운동이 계속되는 한 우리 사회의 통합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말아요. 그래서 누군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상대 후보를 칭찬하는 선거운동을 시작하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선거 때 상대 후보를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한 후보가 당선한다면 우리 정치와 선거문화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요.”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 잘 놀지 못하면 불법
한국 정치에 대한 그의 걱정이 다양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로 샘솟고 있는 듯했다. 화제를 ‘한국 정치에 대한 걱정’에서 최근 펴낸 에세이집 ‘자박자박 걸어요’로 돌렸다.- ‘자박자박 걷자’고 말씀하신 이유가 뭔가요.
“우리는 너무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듯 살아왔어요. 그만큼 절박했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시절을 보냈죠. 그래서 제가 지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생은 한 번밖에 못 사는데, 잘 놀지 못하면 불법’이라고요. 이제는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며 소중한 것들을 챙겨보자고 얘기하는 것이죠.”
- 그럼 작가님은 잘 놀고 계신가요?
“남들이 물어보면 ‘잘 논다’고 말은 잘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책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잘 놀지 못해요. 그래도 ‘잘 놀자’고 글도 쓰고, 남들에게 얘기도 많이 했으니 그렇게 살려고 애는 더 쓰면서 살아요.”
김 작가는 “행복이란 큰 걸 이루겠다는 욕심 대신 가끔 한눈도 팔며 현재의 삶에 여유를 가진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라며 “한 번뿐인 인생을 잘 놀다 가려면 세상의 비교법에 속지 말고 ‘나다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나다움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야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잖아요. 그런 기적을 이룬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요.”
김 작가는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이렇게 기도한다고 했다.
“살아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웃고 즐겁게 신나게 살겠습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살겠습니다.”
- 보통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 마련인데….
“스스로를 위한 기도는 오래 하지 못해요. 또 기도하다 보면 내가 욕심쟁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런데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하는 기도는 남이 알든 모르든 세상이 알든 모르든 스스로에게 큰 기쁨을 줘요.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마음에 남아 있으면 나는 분노한 자, 기분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아요. 그렇지만 내가 진정으로 용서하면 그것 또한 기쁨이 돼요. 고통이나 아픔, 분노와 좌절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게 고통을 주고 분노케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에요. 용서하면 추억이 되고 기쁨이 되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으면 내게 고통을 준 사람의 노예가 되고 말아요.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조차 걸린다고 하잖아요. 제 집 책상 앞에 그 글을 써놓고 소설을 씁니다.”
김 작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도 자기처럼 소중한 존재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가라앉아도 세계가 한 울타리 안에 있기에 또 다른 역병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가까운 존재, 소소한 것,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우리 삶에 교훈을 남겼는지 모릅니다. 죽기 전에, 살아 있는 동안 재미나고 즐겁고 건강하게 두루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것 같습니다. 이제 나와 남에게 웃어주고 위로하고 박수 보내고 기도하며 품앗이해 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열어놓고 행복, 희망, 건강, 기쁨을 향해 자박자박 다가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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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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