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청년들이 당한 고통은 곧 살아남은 청년들의 고통
WEF가 발표한 ‘한국 여성 경제활동 참여·기회’는 127위
박용진의 여성징병제 ‘여성, 군대 가서 온전한 국민 대접 받으라’는 얘기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에게 무슨 피해를 줬단 말인가
청년 80%, ‘평소 우울감이나 좌절감 겪는다’고 응답
4‧7 보궐선거에서 당선한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 이번 선거에 청년들의 분노와 절규가 터져 나왔다. [동아DB]
재보선 결과에 대한 엉뚱한 논란
정도의 차이일 뿐 죽은 청년들이 당한 고통은 곧 살아남은 청년들의 고통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의 분노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선거로 표출된 이들의 목소리에 놀라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이 엉뚱하게 ‘병역’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민주당 김남국 의원은 국가공무원법 개정으로 “전국 지자체에서 채용 시 군에서의 전문 경력이 인정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채용 후에 복무기간을 호봉에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채용 경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가산점을 주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니 법을 만들어 봐야 위헌이다.
군가산점 헌법소원은 그것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진 남성 장애인이 낸 것으로, 거기에 여성들이 가세한 것뿐이다. 군가산점은 “여성과 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한다 해서 헌재에서 위헌판정을 받았다. 같은 당 전용기 의원은 “개헌을 해서라도 군가산점을 부활”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고쳐야 할 것은 헌법 제11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이를 어떻게 고치겠다는 건가? ‘차별받지 아니한다’를 ‘때로 차별받는다’로 바꾸겠다는 건가?
뜬금없는 여성징병제 카드
같은 당 박용진 의원도 ‘때는 요때다’ 하고 슬쩍 여성징병제 카드를 내민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으로 이번에 발간한 책에서 나오는 내용이란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책의 많은 내용 중 하필 그 부분만을, 하필 이 시점에 맞춰 꺼내든 이유는 뭔가? 여성징병제 역시 이미 헌재에서 위헌판정을 받은 바 있다.툭하면 노르웨이 예를 든다. 그 나라에서 여성징병은 말이 ‘의무’이지 실은 ‘권리’에 가까운 것이다. 즉 사회 대부분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평등이 이루어졌으니, 이를 병영으로 연장해 거기서도 성역할의 관념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어디 성평등을 이루고 여성들도 군대 보내는 팔자 좋은 나라던가?
여자들이 군대에 가기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도 군대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군인이 돼야 국민 대접을 해주니 국민 대접받으려 군대에 가겠다는 것이다. 이 요구는 군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왜? ‘남성이 여성을 지킨다’는 신화가 출전하는 병사들의 동기부여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용진의 안은 사실 일본 군부가 여성계의 요구를 받아들인 경우에 해당한다. 즉, ‘여성들도 군대에 가셔서 온전한 국민 대접을 받으시라’는 얘기다. 출산·육아는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여성들의 개인적 책임으로 맡겨놓고 그들에게 새로이 의무만 지우는 게 집권여당 대권주자가 내놓은 성평등 정책인가? 정신줄을 놨다.
페미니즘 과잉?
재보선에서 취해야 할 교훈은 젊은이들이 절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남(이십대 남성)이 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이대녀(이십대 여성)의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 여성들은 남성이라면 받지 않을 일상의 차별까지 받는다. 차별하는 남성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인지조차 못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시장조차 제 행위가 성추행임을 인지 못하지 않았던가.그런 상황에서 이대녀의 몫을 빼앗아 이대남에게 주는 것을 대책이라고 내놓는가? 그런다고 이대남의 고통이 사라지나? 그저 성난 이대남을 달래려고 편의점 알바 자리 하나 얻는 데에도 “오또케 오또케” 운운하는 점주에게 차별을 당하는 20대 여성들에게 또 하나의 차별, 또 하나의 의무를 더하는 게 정의이고 공정인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에게 무슨 피해를 줬단 말인가. 강간을 했나, 성추행을 했나, 성희롱을 했나, 그들을 성노예 삼고 N번방 만들어 조리돌림을 했나. 아니면 묻지마 살인을 했나, 스토킹 살인을 했나. SNS에 택배 상자 사진 하나 마음 놓고 올리지 못하는 여성들을 대변해 목소리 좀 내는 게 그렇게 못 참을 일인가?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격차 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153개국 중 108위. ‘경제활동 참여·기회’는 127위로 종합 지수보다 낮았고, 그 하위 항목인 ‘여성 고위 임원·관리직 비율’은 142위였다. 임금 평등도 119위에 그쳤다. 이런 나라에서 ‘남성 역차별’을 운운하며 ‘페미니즘의 과잉’을 비난하는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징그러운 남성우월주의
지자체장들의 성추행 사건 때문에 치러진 선거다. 그런 선거에서 여야 정치인들은 고작 ‘이대남들이 페미니즘 과잉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교훈(?)을 끄집어냈다. 진단이 잘못되니 당연히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경쟁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고 의무는 확대하는 정책을 쏟아낸다.이대남들이 민주당을 안 찍은 게 그 당의 페미니즘 정책 때문이란다. 모든 자료와 분석이 그 주장을 반박한다. 그런데도 그게 정치권의 정설이 됐다. 그 자체가 남성주의 편견이다. 같은 20대라도 남성의 표심만 보고 여성의 표심은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이 사회의 징그러운 남성우월주의를 보여준다.
페미니즘 공격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동아일보와 잡코리아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80%가 ‘평소 우울감이나 좌절감을 겪는다’고 답했다. 그 이류로 51.3%는 ‘취업난’을, 34.9%는 ‘주거 등 현재 처지 비관’을 꼽았다. 바로 이것이 여야의 정치인들이 안티페미니즘 선동으로 은폐해버린 20대의 비참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