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두려운 봄
자허가 두문불출한 지 아흐레 되던 날 밤, 큰아들이 말을 내달려 아버지를 방문했다. 이화방 낙산 자락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지어진 자허의 별장엔 중문이 없었다. 말년에 이르러 부와 명예를 이룰 만큼 이룬 자허는 더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칠순을 넘겨 쇠약해진 아버지를 측은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정 많은 소실이라도 한 명 들이시라 권해 드렸잖습니까? 노년에 적적해지시니 건강만 악화되시는 것 같습니다.”
궤안에 팔꿈치를 기대고 조는 듯 말이 없던 자허가 띄엄띄엄 대답했다.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낙이라면, 그건 아마 책일 게다. 이 별장에 쌓인 책을 뒤적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거든. 게다가 저 친구가 날 잘 보필해 주고 있으니 염려 말아라.”
아들은 아버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가가 빽빽이 들어찬 건너편 방에서 열심히 서책을 정리하고 있던 젊은이가 지추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고개를 약간 까딱 움직여 그에게 인사한 아들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본가는 소자가 잘 관리하고 있으니 염려치 마십시오. 대신 요즘 젊은이는 믿기 어려우니 너무 속내를 들키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자허가 대답했다.
“저 친구 이름은 어숙권이야. 타고난 총기가 아주 훌륭해. 뭐든 물어보면 필요한 책을 재깍 찾아주거든. 게다가 정치 욕심은 전혀 없더구나. 요즘 한양 안을 휘젓고 다니는 사림(士林)과는 종자가 달라.”
아버지 눈을 오래 탐문하던 아들이 천천히 속삭였다.
“아흐레 동안 서재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시고, 소자가 궁금해 보낸 인편에도 아무 답이 없으시니 염려돼 이리 달려온 것입니다. 젊은 사림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아우성이고, 또 소자는 그들로부터 우리 집안만큼은 철저히 지켜야 하겠기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자허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나는 돌아가신 중종 임금님 때부터 사림과 교분이 꽤 두터웠다. 우리 집안까지 건드리진 않을 게야. 너는 잘 모르는 이 아비의 과거가 있음만 알아두고 이제 가보거라. 요즘 들어 이상하게 봄에 염증이 나는구나. 이런 게 늙음 아니겠느냐?”
달밤의 산책
달밤을 틈타 숙권을 앞세워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선 자허는 반교의 성균관 근처에까지 이르렀다. 유생들 옷가지를 수습해 늦은 밤까지 빨래를 하던 동네 아낙들이 두 사람을 흘겨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했다. 숙권이 자허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요즘 반교방 인심이 사나워졌습니다, 어르신! 나라님께서 무례한 상소를 핑계로 젊은 유생들에게 자꾸 견책을 내리시고, 또 유생들과 한통속인 사림도 이에 질세라 조정 권신들에게 마구 대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빨래터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자허가 물었다.
“내 차림새가 권신처럼 보이는가?”
피식 웃음을 삼킨 숙권이 공손히 대답했다.
“소박한 복장이시지만 누가 봐도 원로대신으로 보이실 겁니다. 이 고을 백성은 유생들과 똘똘 뭉쳐 한 몸으로 지내지 않습니까? 흘겨보는 아낙들 눈초리가 심상치는 않았습니다.”
길게 한숨을 몰아쉰 자허가 발걸음을 낙산 방면으로 되돌렸다. 둘은 달빛을 벗 삼아 말없이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숙권이 물었다.
“요즘 들어 책도 멀리하시고, 무언가에 쫓기시는 안색이시온데, 혹 제게도 말 못 하실 근심이 있으신 겁니까?”
언덕 중턱 너럭바위에 걸터앉은 자허가 천천히 대답했다.
“차라리 무슨 근심이라도 있다면 좋겠네. 실은 아무 근심이 없는 이 상태가 내 근심일세.”
“무슨 말씀이시온지?”
“도통 봄날이 즐겁지가 않은 데다, 뭐랄까, 이상하게 꽃과 나무와 풀이 죄 무서워죽겠네.”
“꽃과 나무가 무서우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마음 없는 일개 초목이요?”
“그렇다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됐어. 숙권이 자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댔지. 얼마나 삶에 근심할 게 없으면 풀과 꽃 따위가 두렵겠느냐 이 말일세.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자허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은 마치 성난 사람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따라 걷던 숙권이 급히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습니다. 오늘 밤 저와 그 무서움의 원인을 파헤쳐 보시지요?”
매일 밤 반복되는 꿈
자허에게 미로 꿈은 늦겨울에 시작됐다. 희한하게 같은 꿈이 매번 반복됐는데, 꿀 때마다 장면이 하나씩 추가되는 식이었다. 꿈 안에서 그는 늘 목적지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첫날 꿈에서 그를 인도한 건 나비였다.“나비라고요? 그냥 평범한 나비였습니까?”
숙권이 자허의 꿈 얘기를 우두커니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렇다네. 그냥 나비였네. 난 나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지.”
“또 뭐가 나타났습니까?”
“그냥 오솔길이 끝없이 이어졌다네. 꽃길이었어. 하염없이 걷다가 더럭 겁이 났지 뭔가?”
“뭐가 겁나셨습니까?”
“꿈이 끝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네. 영원히 그 길을 따라 걷기만 할까 봐.”
“그래도 꿈에서 깨어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처음엔 웃어넘겼어. 한데 다음 날 같은 꿈을 또 꿨단 말일세! 꽃과 나무 모양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꿈을 말이야.”
“또 나비가 나타나 어르신을 꾀었습니까?”
“그렇긴 했네만, 나비는 곧 사라졌어. 다른 게 나타났지.”
“그게 뭡니까?”
“두 명의 동자였어. 검은색 옷을 입은 동자는 내가 저지른 속세의 악행을 기록한 책을 보여주더군.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네. 다행히 흰옷 입은 동자가 선행을 적은 책도 보여주긴 했네만.”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숙권이 급히 물었다.
“그다음 꿈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그다음 날엔 이상하게 생긴 궁녀가 나타나 날 잘 아는 체하더군. 난 도통 그 얼굴을 모르겠는데 말이지. 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 아무튼 ‘선비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냐’며 다짜고짜 날 대궐로 이끌었어!”
“대궐이라 하시면, 경복궁을 말씀하십니까?”
“그게 말일세. 꽃대궐이었는데, 내 마음에선 현실의 대궐과 다를 바가 없었다네. 그래! 경복궁이라 해도 틀림없을 그런 곳이었네.”
“그곳에서 누굴 만나셨습니까?”
“글쎄. 그게 참으로 이상한데 말이야. 꿈을 꾸는 횟수가 그 후부터 현격히 줄었어. 보름에 한 번, 때론 한 달에 한 번 같은 꿈을 꾸는데, 대궐의 시녀와 내시가 끝도 없이 나타나 날 어디론가 데려가는 거야! 데려가서는 하염없이 기다리게만 한 뒤 또다시 누군가 나타나 어디론가 다른 데로 데려가 또 기다리게 하고. 기다리는 그 고통은 죽을 맛에 가깝다네!”
“도대체 누가 기다리게 하는 겁니까?”
“그걸 도통 모르겠단 말일세. 대궐의 꽃과 나무는 더 화려하게 울창해지고, 정원의 잔디는 무섭게 자라나는데, 난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를 기다려야만 한다네. 어느 날 또 그 꿈이 시작될까 너무 두려울 지경일세!”
착잡한 표정의 숙권이 말없이 자허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일어나 창문을 닫고 호롱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 곁채로 물러나며 그가 속삭였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또 꿈을 꾸시게 되면 꼭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모란의 초대
그날 새벽 자지러지듯 잠에서 깨어난 자허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었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그는 하인을 불러 등불을 밝히게 하고 숙권을 깨워 데려오게 했다. 민첩한 동작으로 침소에 당도한 숙권은 소매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자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다 뭔가? 뭘 적으려고?”
먹을 갈며 숙권이 대답했다.
“어르신 꿈 얘기를 하시려는 게 아니십니까? 기억이란 믿을 게 못 되니 잘 받아 적으려고 합니다. 꿈속 내용에 무언가 비밀이 숨어 있지 싶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지허가 호두알을 움켜쥐고 손안에서 굴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날 그토록 기다리게 한 인물을 드디어 만났네.”
“누구였습니까?”
“모란이었어. 모란여왕!”
종이 위에 ‘모란’이라고 적으며 숙권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왕이 어르신을 부른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말일세. 잔치를 벌이고 있더군. 풍악이 요란스레 울렸고 귀빈도 아주 많았다네.”
“귀빈 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없으셨습니까?”
“매화꽃도 있었고 한데, 다들 화려한 여성이었네. 부귀한 티가 역력했다고나 할까? 기세가 등등하더구먼.”
“좋습니다. 그 외에 다른 사건은 없었습니까?”
“있었네! 불청객들이 들이닥쳤지 뭔가.”
“불청객이라면?”
“다 기억나진 않지만 수양처사는 분명히 왔네. 소나무 형상이었지. 대나무 모습을 한 젊은 선비도 그 안에 있었는데, 이상한 게 말일세, 이번에도 그들은 날 잘 알고 있더란 말이지. 난 도대체 그들 정체를 모르겠는데 말일세!”
“수양처사라면 망해 가던 은나라에 대한 충절로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숙제 형제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참으로 뜬금없지 뭔가?”
“대나무는 정확히 뭐라고 말하던가요?”
“또렷이 기억하네. 날 노려보면서 그대가 여긴 무슨 일이냐며 불쾌한 표정을 짓지 뭔가. 이유도 모르고 난 부끄러워해야만 했네. 그러곤 여왕이 그 불청객들에게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간청했지.”
“거절했겠군요?”
“그래! 완고하게 거부하더니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지더군. 여왕과 귀부인들이 그들을 촌스러운 야인이라 실컷 놀려댔고. 또 어지럽게 풍악이 울리고 춤도 춘 것 같네. 마지막으로 무슨 선물인가를 잔뜩 내주더군. 여왕이 말일세.”
“받으셨습니까?”
“안 받을 이유는 또 뭔가? 그걸 등에 잔뜩 지고 대궐문을 나서려는데, 누가 거기 서서 울고 있는 거였네.”
“누구였습니까?”
“출당화 꽃이었네. 얼마나 굶주렸는지 무척 여위어 있더군. 평생 대궐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견뎌왔다는 거야. 그 순간 나도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이게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더군. 그렇게 펑펑 울다가 잠에서 깨어난 걸세.”
적기를 마치고 고개를 든 숙권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상대를 지긋이 바라보던 자허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이 안자허의 삶이 고작 풀과 꽃에 쫓기게 됐네. 이 얼마나 기막힐 노릇인가?”
갑자기 눈빛이 변한 숙권이 급히 물었다.
“지금 안자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랬네. 내가 안자허라 안자허라 했네만, 무슨 문제가 있나?”
무언가 말하려다 멈춘 숙권이 지필묵을 소매 안에 쓸어 담으며 대답했다.
“어르신께서 꾸신 꿈은 단순한 악몽이 아닙니다. 제가 책 한 권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자허가 졸린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방문 밖으로 나서려던 숙권이 뒤돌아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어르신! 어르신의 성명은 안자허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고령 신씨 집안 종손 광한 어르신이십니다.”
신광한과 안자허
숙권이 책 한 권을 쥐고 서재에 다시 나탔을 때는 벌써 해가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신광한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성명을 거듭 되뇌며 막 들어서는 숙권을 바라보았다. 책을 바닥에 펼치며 숙권이 말했다.“제가 어르신 집안 책이란 책은 죄다 정리했잖습니까? 손금 보듯 훤히 꿰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얼마 전 우연히 발견해 서가 귀퉁이에 보관하고 있었지요. 교서관에서 출간한 것이온데, 보시다시피 저자가 바로 어르신이셨습니다.”
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잠시 눈을 비비던 광한이 물었다.
“요즘 명나라에서 들어온, 그래, 눈에 끼고 보는 애체(靉靆) 없인 이젠 그 어떤 글자도 잘 보이지 않는다네. 대신 읽어주겠나?”
책을 집어 든 숙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책의 제목은 ‘기재기이’입니다. 기재는 어르신 호 아니겠습니까? 이상한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그 뜻 그대로입니다. 소설집입니다.”
“내가 소설을 썼다고?”
“그렇습니다. 어르신 제자들이 교서관에서 몰래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르신께선 출간을 반대하셨다는 내용이 발문에 있긴 합니다. 소설을 지으신 연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젊으셨을 때가 아니었을까요? 전혀 기억이 없으십니까?”
“없네.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군.”
“문제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숙권이 책의 한 부분을 펼치더니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읽기를 이어가던 숙권이 광한 쪽을 힐끗 쳐다보고서 책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광한의 뺨은 두 줄기로 흐르는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상대가 진정되기를 기다린 후 숙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읽어드린 작품 제목이 ‘안빙몽유록’입니다. 어르신께서 꾸셨다는 꿈 내용과 똑같은 내용이지요. 주인공 이름은 안자허고요.”
벗의 마음
[GettyImage]
“왜 더는 아무것도 묻질 않나? 궁금한 게 많을 터인데.”
깔개 위에 음식을 정돈해 배열하고 부채를 펼쳐 광한을 향해 부치며 숙권이 대답했다.
“실은 어르신의 고민을 알 것도 같기 때문입니다.”
깔개 위에 앉은 광한이 허탈한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물었다.
“소설 한 편으로 내 고민을 알겠다고? 자네는 중종 임금 시대를 절대 알 수 없을 거네. 그 몽매한 시절을 어찌 다 아누?”
부채를 접어 바닥에 놓은 숙권이 낙산 아래로 펼쳐진 한양 도성 풍경을 감상하며 속삭였다.
“다 알 수야 없겠지요. 하지만 저도 사림 아니겠습니까? 물론 조정 원로대신 모두를 몰아내자는 축들과는 다릅니다만. 어차피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림이 이길 것이고, 나라가 크게 일신될 게 분명하지요. 그럼 잘못된 역사는 고쳐져야 할 테고, 누군가는 억울함을 벗고 복권되는 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누굴까, 그게?”
침을 꼴깍 삼킨 숙권이 상대를 그윽이 바라보며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림이 줄기차게 신원 회복을 요구해 온 분 아니겠습니까? 바로 정암 조광조 선생 말입니다.”
성균관 명륜당으로 시선이 고정된 채 미동도 않던 광한이 탁주 한 잔을 들이켜고 말했다.
“조광조는 내 둘도 없는 벗이었네.”
자기 잔에도 술을 따르며 숙권이 속삭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기묘사화 때 화를 입지 않으셨습니까?”
“아닐세! 난 절묘하게 화를 모면했네. 내 조부가 누구시던가? 신숙주 선생 아니신가? 광조가 목숨을 잃던 순간, 난 옥에서 풀려나 삼척으로 이동하고 있었네. 특별대우를 받았던 거지. 그것도 유배가 아니라 부사로 임명됐던 거라네. 몇 년 근신하면 벼슬길을 다시 터주겠다는 암시도 받았네.”
“타협하셨던 겁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광한이 신음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랬네. 너무 무서웠거든. 비록 광조와 성리학 공부를 함께하며 행복했지만, 내 체질이 어디 갔겠나? 난 혁명을 하는 그런 극단적인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네. 옥에서 나오기 직전, 광조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표정은, 그 눈빛은, 도저히 잊히지가 않았어.”
“어떤 눈빛이셨습니까?”
“놀랍게도 너무나 평화로웠네. 광조는 늘 나를 귀한 집 도련님이라며 놀렸거든. 넌 나와 출신이 다르지만 그래서 네가 더 귀하다며 좋아해 줬지. 내가 키가 너무 커서 어깨동무를 할 수 없다며 타박할 때만 빼면 우린 죽마고우처럼 허물없이 지냈다네.”
“평화로운 눈빛으로 이별하신 거로군요?”
“그랬네. 너무나 자애롭고 따뜻한 눈빛이었어. 너라도 행복하게 여생을 즐길 수 있게 돼 다행이라는 그런 표정이었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은 숙권이 뭐라고 말하려다 목이 메어 멈췄다. 그 모습을 본 광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죄의식을 가지지 않으려 오히려 더 씩씩하게 남은 생을 살아왔네. 특히나 광조가 날 살리려 그 모진 심문 속에서도 내 이름을 단 한 차례도 거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됐거든. 벗의 생명으로 얻은 이 소중한 기회를 그냥 날릴 순 없지 않겠나?”
“소설은 언제, 왜 쓰신 겁니까?”
“경기 여주 땅에서 은거하던 시절 썼다네. 마음 깊이 감춰둔 비밀을 풀어야 하겠기에. 상자 안에 던져두고 잊은 걸 제자들이 출간했던 거네. 한사코 반대했지만 결국 일을 벌였고, 다행히 부수가 얼마 되지 않기에 묵과하고 말았지.”
길게 한숨을 뱉은 광한이 숙권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덧붙였다.
“권력은 징그러운 걸세. 마치 꽃처럼 화려하고, 풀처럼 생명력이 왕성하지만 끝이 있다네. 봄은 영원하지 않아. 영원한 건 다른 곳에 있지.”
일어서서 걷기 시작한 광한 뒤를 따라 걸으며 숙권이 물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요?”
숙권 쪽으로 몸을 돌리며 광한이 대답했다.
“마음일세.”
“사람의 마음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마음만 남는 걸세. 그 외에 무엇이 남아 있다 할 수 있겠나? 난 그저 광조의 마음 한 자락을 붙잡고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네. 조선 도학의 상징이자 사림의 정신적 지주인 광조는 내가 아는 광조와는 거리가 머네. 그건 만들어진 거거든. 진짜 광조는 늘 장난기 많은 표정으로 날 꺽다리라 놀리던 그 친구일세. 백성에 대한 정이 너무 많아 과분한 자리로 오르기를 망설이지 않았지만, 실은 내심 멈추고 싶어 했던 한 사내가 내가 아는 광조였네.”
두 사람은 낙산을 오래도록 걸었다. 마침내 석양이 비쳐들 무렵 깔개를 걷고 별장으로 이동하던 숙권이 조용히 물었다.
“이제 꽃과 나무가 두렵진 않으십니까?”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광한이 속삭였다.
“그렇긴 하네만, 여전히 무서운 건 남아 있다네.”
“무엇인지요?”
“가장 영원한 것. 그 역시 바로 사람의 마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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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신광한이 지은 ‘기재기이’의 ‘안빙몽유록’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