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호

눈 깜빡하면 놓치고 마는 귀하디귀한 봄순의 맛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2-04-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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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맛이 쓰지만 여운이 강한 엄나무순. [gettyimage]

    첫맛이 쓰지만 여운이 강한 엄나무순. [gettyimage]

    아버지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서른 살이 넘어 서울로 이주하셨다. 큰 회사에 다니다가 사업을 시작해 호황이라는 천국과 불황이라는 지옥을 모두 겪으며 다시 서른 해를 보내셨다. 그즈음 나와 오빠는 독립했고, 부모님은 경기도의 한적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어쩌다 분양받은 아파트 텃밭은 아버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마치 서울에 올라온 서른 살의 용맹한 가장처럼 텃밭 작물을 애지중지 잘도 키워내셨다. 경기도에서 양평으로 밭이 옮겨지며 아버지의 작물은 더 풍성해졌고, 산을 바다만큼 오래오래 사랑하게 되셨다.

    통통한 줄기를 살캉살캉 익혀야

    두릅은 데쳐서 고추장을 찍어 먹기 좋다. [gettyimage]

    두릅은 데쳐서 고추장을 찍어 먹기 좋다. [gettyimage]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집 냉장고는 보드랍고 향기로운 봄의 순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가장 흔히 먹던 엄나무순 그리고 두릅과 가죽순도 빠질 수 없다. 이어서 뽕순, 다래순, 고추순처럼 보들보들한 이파리들은 어머니가 맛좋게 양념을 해 집으로 속속 보내시곤 했다.

    나무에서 채취한 순은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손질하는 방법이 비슷하다. 이파리 아래쪽의 딱딱한 나무 부분을 잘라낸다. 그러다 보면 마치 꽃받침처럼 순을 감싸고 있는 빳빳한 잎이 떨어지고 벗겨진다. 딱 봐도 먹기에 억세다 싶은 부분은 과감히 떼어내는 게 좋다. 가시가 있을 수 있으니 만질 때는 조심해야 한다. 손질을 마친 순은 끓는 물에 데친다. 통통한 줄기 부분을 살캉살캉하게 익혀야 먹을 수 있다. 간혹 가늘어 보이는 줄기라도 꽤 여물 수 있으니 데치는 게 좋다. 데친 순은 진한 색이 빠지며 밝고 산뜻한 초록을 띤다. 향도 둥글둥글해지고, 쓴맛이 줄어든 자리에 연하게나마 달콤한 맛이 깃든다. 봄에 갓 돋아난 새순인 만큼 물렁해질 정도로 익힐 필요는 없지만 골고루 익힐 필요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접시에 냈을 때 얼룩덜룩한 초록을 띨 수 있다. 물론 색이 못나도 먹는 데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골고루 데친 순을 체에 밭쳐 물기를 쪽 빼고 나면 이제 먹을 준비는 마쳤다.

    순들은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는 경우가 제일 많다. 순이 가진 독특한 강렬함을 살짝 가려주기에는 알맞은 양념이다. 하지만 순 저마다의 맛을 잘 살펴보려면 된장을 조금 얹어 먹어보거나, 참기름 소금장도 어울린다. 살짝 데친 순을 고기와 함께 석쇠에 올려 불맛을 입혀 굽고, 소금에 찍어 먹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다. 두툼한 줄기를 납작하게 2~3등분해 그처럼 납작하게 준비한 고기나 해물을 섞어 반죽을 입혀 기름에 지져 먹는 맛도 일품이다. 꼬치에 열을 맞춰 꿰어 구우면 꽤 정갈하고 근사하다. 이때 해물에는 소금 간, 고기에는 간장으로 간을 하면 저마다 잘 어울린다. 부침보다 맛있는 건 역시 튀김이다. 얇은 반죽 입혀 기름에 부르르 튀겨 내면 바삭하게 씹을 때마다 향긋함이 터진다. 오래전에 딱 한 번 부드럽게 손질한 순을 얹은 초밥을 먹어본 적이 있다. 새콤한 밥, 향긋한 순, 매콤한 고추냉이의 조합이 무척 개운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입맛 깨우는 향미

    가죽순은 독특한 향으로 유명하다. [gettyimage]

    가죽순은 독특한 향으로 유명하다. [gettyimage]

    봄 순 중에 가장 어른스러운 맛을 꼽자면 엄나무순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처음 먹는 누구나 ‘이런!’하고 놀랄 정도로 특유의 쓴맛이 난다. 첫 입에는 움찔, 낯설지만 봄이 가진 한 조각의 귀한 맛이라 여겨지며 두 입, 세 입부터는 천천히 음미하며 맛을 즐기게 된다. 주로 자그마한 순을 따 데쳐서 즐기지만 굵직한 순을 구했다면 장아찌 간장물을 끓여 뜨끈할 때 부어 절여 먹으면 된다. 장물이 들면서 쓴맛이 줄고, 향은 남는다.



    두릅은 어렵지 않게 구해먹을 수 있는 순이다. 우리집 앞 작은 상점에까지 매년 적지 않게 공급되는 것으로 보아 재배를 꽤 많이 하는 것 같다. 한 나무에서 채취할 수 있는 양이 워낙 적기에 싼 값은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값도 많이 내린 편이다. 두릅은 쓴맛이 적고, 향도 순한 편이라서 누구라도 즐길 수 있다. 싫어서 안 먹을 수는 있지만 못 먹는 이는 없을 대표적인 봄 순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가죽순이다. 가죽의 순에서는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향이 난다. 다른 건 조리하면 향이 연해지는 데 비해 가죽순은 무엇을 하든 그 향이 점점 더 진해진다. 다른 순에 비해 줄기며 잎이 부드러운 편이지만 생채로 먹기에는 꽤 쓰다. 역시 데쳐서 조리하는데 나물도 좋지만 장아찌로 만들어야 제 향을 만끽할 수 있다. 살짝 데친 가죽을 물기 없이 꾸덕꾸덕하게 말려 간장에 절이고, 다시 물기를 뺀 다음 고추장, 마늘 등의 갖은 양념을 넣고 주물러 둔다. 향긋하고 짭조름하며 시커먼 가죽 장아찌를 조금씩 꺼내 여름 내내 밥에 얹어 먹는다. 입맛을 깨우는 최고의 반찬이다. 가죽으로 부각을 만들면 정말 맛있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가서 해먹자니 막막하다. 그런데 한입 얻어먹을 곳도 없어 아쉽기만 하다. 가죽순으로 만든 요리는 수소문해 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 기회가 있다면 꼭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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