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추구엔 지위 고하가 따로 없다
방산정책 연속성 보장돼야
‘첨단’만큼 ‘기본’ 병기 중요
박정희의 탁월한 안보·방산 비전
에후드 바라크 전 이스라엘 총리는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총리에 이어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사진은 2008년 12월 27일 바라크 전 총리가 텔아비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다. [로이터]
이러한 상황 속에 필자는 2013년에 만난 에후드 바라크(Ehud Barak·80) 전 이스라엘 총리가 생각났다. 바라크 전 총리는 2013년 11월 당시 국방부 차관이던 필자를 조용히 찾아왔다. “북한의 장사정포를 막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제 아이언돔(Iron Dome·이스라엘이 2011년 실전 배치한 미사일 방어체제)이 적합하다”면서 1시간가량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가던 그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2013년 11월 에후드 바라크 전 이스라엘 총리와 백승주 당시 국방부 차관이 만났다. 이날 바라크 전 총리는 백 차관에게 북한 장사정포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언돔을 추천했다. [백승주]
체통보다 국익 우선
바라크는 이스라엘 방위군(IDF) 참모총장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1999년부터 약 2년간 총리를 지냈다. 2007년 이후 2013년 3월까지 국방부 장관을 맡았다. 1972년 서른 살에 특수부대 사령관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납치한 비행기에 정비공으로 위장하고 들어가 진압한 ‘사베나 여객기 작전’은 전설로 회자된다. 1973년엔 여장(女裝)한 채 특공대를 이끌고 레바논 베이루트에 침투했다. 그곳에서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를 학살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검은 9월단’ 간부 3명을 살해했다. 1988년엔 튀니지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오른팔이던 아부 지하드 암살 작전을 이끌었다.이스라엘 정치체제는 의원내각제다. 바라크는 이스라엘 최고지도자인 총리를 지내고 나서도 그 아래인 국방장관을 맡았다. 은퇴 후엔 자국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한국 국방부 차관에게까지 찾아와 로비를 벌였다. 우리 국민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까.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총리로서 체통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라크 총리와의 만남이 지금껏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젊은 날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건 특공작전에 임하고, 총리와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 은퇴 후에도 자국 방위산업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이스라엘 방산정책의 연속성
이스라엘 미사일 요격 시스템 ‘아이언돔’. [AP 뉴시스]
2004년 이스라엘군의 연구개발 부서에서 일하던 다니엘 골드에 의해 구상됐고 2007년 당시 아미르 페레츠 국방부 장관에 의해 채택됐다. 바라크 전 총리가 국방부 장관 시절 개발을 완료해 운용을 시작했다.
필자가 관심을 갖는 건 성능이 아니다. 방위산업 정책의 연속성이다. 아이언돔은 구상부터 운용까지 걸린 시간이 7년 남짓이다. 이 기간 동안 정책을 선택하고 개발한 장관이 다르다. 이는 곧 행정부가 다르다는 뜻인데, 이스라엘은 정책의 연속성을 잃지 않고 개발에 몰두했다.
방위산업은 개발에서 실제 운용까지 일반적으로 10년 넘는 시간이 걸린다. 개발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엄청난 비용이 든다. 수요자가 정부이기 때문에 비용은 국가 예산으로 메워야 한다. 이스라엘 정부의 방산정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바로 정책의 연속성이다.
果實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아
율곡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한국형 전차 ‘K1’. [동아 DB]
1979년을 기점으로 두 산업은 꽃을 피웠다. 소형화기를 비롯한 기본 병기 공급량은 국내 수요를 충족시켰다. 이 시기는 주한미군 철수 이후 안보를 위해 핵무기를 포함한 전략무기 개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방위산업은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갔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가 지난해 12월 발행한 ‘2021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한국은 2016∼2020년 5년간 전 세계에서 9번째로 무기를 많이 수출했다. 전 세계 무기 수출의 2.7% 수준이다. 순위뿐 아니라 대상국도 다양해졌다. 영국(14%), 필리핀(12%), 태국(11%) 등이 주 고객이다. 지역별로는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이 55%를 차지했다. 유럽(23%), 중동(14%) 등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 달성한 방위산업 성과는 문재인 정부 몫이 아니다. 그 이전 10년간 보수 정부가 뿌린 정책이 꽃을 피운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번개사업’ ‘율곡사업’이 그 씨앗이다.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방위산업 성과를 자랑하면서 “투자와 기술개발에 이어 전력화에 장시간이 소요되는 방산의 특성을 감안할 때 문재인 정부만의 성과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만의 성과라고 표현했다면 큰 잘못이다. 정책 도둑이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 정부가 계획하고 추진한 정책의 과실”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천궁 II는 국내 자체 기술로 개발된 대(對)탄도탄 요격체계다. LIG넥스원이 기존 ‘천궁’을 개량해 항공기 교전 능력을 강화했다. 사진은 천궁 II 무기체계 구성. [뉴스1]
2014년 박근혜 정부가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KF-X 산화 개발 사업’을 최종 결정할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국산화 개발계획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하며 부정적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는 2015년 10월 30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KF-X 사업 계획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이 방위산업 정책에 반영돼 수행됐다면 5년, 10년 뒤 방위산업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전투기 독자 개발에 소극적이던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0일 ‘2021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에 참석해 “항공기용 엔진 국산화로 안보와 항공산업 기초 역량을 동시에 강화할 것”이라며 “차세대 전투기 KF-21 보라매 자체 개발 성과를 넘어 독자 엔진 개발에도 과감히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진정성이 있었길 바란다.
러시아 침략에 맞선 우크라이나는 군수물자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부족한 물자의 종류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발표한 장비 목록을 토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월 16일 우크라이나에 지대공·대전차 미사일, 대공 미사일 시스템 800기, 대전차 미사일 9000기, 자동소총과 권총 등 총기류 7000점, 포탄과 박격포탄 2000만 발 등 8억 달러(약 9740억 원)규모의 추가 군사장비 지원을 발표했다. ‘스위치블레이드’로 불리는 공격형 드론 100대도 포함돼 있다.
박정희의 비전
이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미사일, 드론 등 첨단 장비가 아니다. 자동소총과 권총 등 총기류, 각종 포탄이다. 군사적 침략을 받았을 때 개인화기, 기본적 공용화기, 포탄 종류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사정을 직시해야 한다. 심지어 군복까지 부족하다고 한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개인화기를 외부 지원에 의존한다면 전사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긴 어렵다. 맨주먹으로 총과 싸울 수 있겠는가.1970년 ‘번개사업’으로 6개 기본 병기를 먼저 국산화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탁월한 안보방산 비전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본 병기를 생산하는 사업은 경제 차원이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육성돼야 한다.
아울러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시민을 보자. 민방위 훈련, 예비군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는 안보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첨단무기 개발·획득도 중요하지만 기본 병기 생산과 비축, 현역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갖춘 예비군 건설·유지정책도 꼭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바라크 전 총리를 생각하니 이스라엘 정부 방침이 궁금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재에 나선 처지라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원 요청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전쟁 종식을 위한 중재 활동을 하면서 서유럽 방산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3월 5일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는 국가안보보좌관 및 기타 관리들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직접 중재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을 만나기 전엔 바이든 대통령과 긴밀하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독일 등 유럽 국가는 국방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있다. 독일 내각에 제안된 예산엔 미화 1100억 달러(약 133조9250억 원) 상당의 특별 방위 기금이 포함됐다. 폴란드는 국방 지출 규모를 전체 예산의 2%에서 3%로 늘렸다. 프랑스, 이탈리아도 국방 예산을 대폭 늘릴 방침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이스라엘은 미국과 함께 개발한 미사일 방어시스템 ‘애로3’를 독일에 판매하기로 했다. 독일은 애로3뿐 아니라 아이언돔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 및 무기 판매로 국가 위상을 높이고 있다. [gettyimage]
서유럽 방산시장 노리는 이스라엘
바라크 전 총리도 우크라이나 상황을 보고 있을 것이다. 총리, 국방장관을 지낸 경륜을 담아 이스라엘 정부에 조언을 아끼지 않을 듯하다. 조언은 크게 세 가지 방향이리라고 본다.첫 번째, 우크라이나 거주 유대인의 안전을 고려해 전쟁 종식을 위한 중재에 적극 나서라고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나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지원할 경우 우크라이나 거주 유대인의 안전에 어려움이 생기리라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중재협상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외교 위상을 높이라고 당부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제3차 세계대전으로 전화될 수 있는 길목에서 힘 있는 중재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세 번째, 새로 형성된 유럽 방산 시장에 이스라엘이 개발한 방공체제를 수출할 기회로 만들라고 할 것이다.
바라크 전 총리를 보며 부러운 점은 아이언 돔이나 무기체계가 아니다. 그들이 지도자의 경륜을 소중히 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바라크 총리가 한국에서 관광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언돔을 설명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전·현직 한국 지도자들도 이런 모습을 배울 필요가 있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