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호

‘서편제’ 촬영지, 수오당은 왜 순천으로 갔을까

[명작의 비밀]

  •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2-05-1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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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인 한창기의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 6400점 유물, 판소리 성전 수오당까지

    • 오정해와 김명곤의 소리를 듣고 싶다

    전남 순천시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한편에 있는 수오당. [이광표]

    전남 순천시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한편에 있는 수오당. [이광표]

    누군가 “20세기 후반 한국의 예인(藝人)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한창기(1936∼1997)를 내세울 것이다.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 언제부턴가 자꾸만 그에게 끌린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 흘렀지만 한창기를 기억하는 이는 적지 않다.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래된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뒤적여보는 일. 그것만으로 아쉽다 싶으면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 마을로 간다. 그곳에 있는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서 한창기 컬렉션을 만나고 야외에 있는 멋진 고택 수오당(羞烏堂)을 거닌다. 그런데 수오당은 원래 구례의 지리산 자락에 있던 단소 명인 김무규(1908∼1994)의 집이었다. 그 집이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아름다움을 제대로 사랑한 한창기

    한창기의 이력을 요약해 보자. 1936년 전남 보성군 벌교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법조계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탁월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8군에서 비행기표와 영어 성경책 등을 판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영업 문화를 개척. 한국브리태니커 대표 지냄. 브리태니커 수익금을 한국의 전통문화 창달에 쓰겠다고 미국 본사에 제안해 동의를 얻음. 1974~1978년 100회에 걸쳐 판소리 감상회 개최. 1976년 월간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해 처음으로 한글 전용 표기와 가로쓰기를 도입.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뿌리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된 뒤 1984년 월간 ‘샘이 깊은 물’ 창간. ‘한국의 발견’ ‘판소리 전집’ ‘민중 자서전’ 등을 출판. 판소리 다섯마당 음반 간행. 옹기·백자 반상기 현대화와 잎차 대중화에 헌신, 문화재 6400여 점을 수집. 1997년 타계.

    어떤 이는 한창기를 한 시대를 풍미한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으로 그래서 한국 출판 역사에 족적을 남긴 출판인으로 기억할 것이고, 어떤 이는 멋쟁이 세일즈맨의 상징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전통문화 보존·복원에 헌신한 사람 혹은 민속 문화재를 수집한 컬렉터로 기억할 것이다. 한창기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뭘까. 누군가는 “한국 문화계의 심미적 천재”라고 불렀는데, 나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창기 10주기였던 2007년 이래 그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유고집 발간, 박물관 개관, 다큐멘터리 방송, 기념 전시, 학술적 연구 등. 그가 발행한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전권을 수집하고 강독하는 젊은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1976년 3월 한창기는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신선한 제호, 과감한 표지 디자인, 한글 가로쓰기, 아트 디렉션 제도 도입, 출판 실명제, 잡지광고 디자인의 혁신, 글꼴의 혁신 등 ‘뿌리깊은 나무’는 파격적 디자인과 품격 있는 콘텐츠로 대중 교양잡지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렸다.



    교양잡지 통념 무너뜨린 ‘뿌리깊은 나무’

    1976년 3월 발간된 월간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 [동아DB]

    1976년 3월 발간된 월간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 [동아DB]

    특히 창간호의 표지가 강렬했다. 표지 위쪽에 훈민정음 서체의 제호를 큼지막하게 배치하고 표지의 나머지 공간은 사진 한 컷으로 꽉 채웠다. 쌀을 한 움큼 퍼 올리는 농부의 거친 두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 이 사진은 ‘농부’와 ‘쌀’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를 통해 민중의 생명력, 전통의 존재 의미를 성찰하도록 했다. 컬러 사진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갈색 톤이다. 전통, 흙, 민중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부각하기 위함이다. 이는 현대와 전통의 조화를 암시했다. 창간호의 표지 디자인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내용과 형식에서 흐트러짐 없이 이어졌다. 1980년 8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말이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정기간행물의 12%(172종)를 폐간시켰다. 이때 ‘뿌리깊은 나무’도 사라졌다.

    한창기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것은 전통문화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해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전통과 민중의 콘텐츠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현대적이고 미학적이었다. 그 세련됨은 잡지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전통과 아름다움에 대한 한창기의 집요함에서 비롯했다.

    한창기는 1970년대 초부터 문화재를 수집했다.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자 문화재위원이던 예용해(1929~1995)와 교유하면서 수집에 깊이 빠져들었다. 예용해가 누구인가. 당대를 대표한 문화재 전문가로 ‘인간 문화재’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한창기는 예용해와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인사동을 드나들면서 토기, 백자, 민화를 통해 한국 전통의 미를 열정적으로 섭렵해 나갔다.”(한창기의 지인이던 곽소진의 증언, ‘특집! 한창기’, 창비, 2008)

    한창기는 청자, 백자, 회화, 금동불상 같은 고미술 문화재보다는 토기, 석물, 민화, 목가구, 의식주 관련 유물 등 민속문화재를 주로 수집했다. 토기, 와당(瓦當), 석물(石物), 목가구, 소반, 나전함, 망건과 망건통, 빗과 비녀, 전통 악기(북, 단소, 퉁소, 대금, 가야금, 꽹과리 등), 주판, 됫박, 갓집과 사모함, 담배합과 담뱃대, 등잔걸이와 촛대, 전통 한복(저고리, 치마, 두루마기 등), 이불, 베개, 방석, 신발(태사혜, 당혜, 운혜, 짚신), 안경과 안경집, 부채, 필통과 연적, 목안(木雁), 민화, 전적류, 지도 등 민중의 생활상이 담겨 있는 유물이다. 1997년 타계할 때까지 모은 문화재가 6400여 점에 달한다.

    6400점 문화재 모인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2011년 문을 연 전남 순천시의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한창기가 살아생전 모은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광표]

    2011년 문을 연 전남 순천시의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한창기가 살아생전 모은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광표]

    한창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컬렉션은 유족이 보관했다. 박물관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이런저런 어려움에 봉착했다. 유족들은 재단법인 ‘뿌리깊은나무’를 설립해 컬렉션을 보관하다 순천시에 기탁했고, 전남 순천시가 박물관 부지를 제공함으로써 2011년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됐다.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은 담백하다. 특별히 화려하지도 않다. 박물관에는 그가 수집한 유물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유물도 좋지만 그가 발행하던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은 물론 그의 유고와 유품, 생전에 기고한 글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그가 착용하던 옷과 안경, 시계도 있다. 한창기는 한복이면 한복, 양복이면 양복 모두 정통으로 제대로 입는 멋쟁이였다. 그와 관련된 다큐 영상물도 감동적이다.

    야외 전시장의 석물도 좋은 구경거리다. 화사하지 않지만 여운이 오래 가는 석물들. 어찌 보면 한창기 컬렉션의 정수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석불, 문인석, 무인석, 동자석, 장명등, 망주석, 석조(石槽), 돌구유, 돌확, 돌절구…. 화강암의 질감이 참 좋다. 온전한 것도 있지만 부서지고 깨진 것도 많다. 목이 부러진 석불, 탑신은 사라지고 옥개석들만 올려놓은 석탑을 보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머리 없는 석불들이 떠오른다. 김무규 고택 수오당이 그 석물 전시장 바로 옆에 있다.

    ‘서편제’ 낳은 수오당

    수오당은 김무규 명인의 생가이며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동아DB]

    수오당은 김무규 명인의 생가이며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동아DB]

    수오당은 전남 구례군 원래 구례읍 산성리 지리산 자락에 있었다. 이곳이 대중에게 알려진 때는 영화 ‘서편제’에 등장한 뒤부터다. 잠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떠돌이 소리꾼 부녀, 유봉(김명곤)과 송화(오정해)는 어느 날 남도 땅 한옥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 그곳 사랑채에서 유봉은 눈먼 송화의 머리를 정성스레 빗겨준다. 그런데 바로 옆 누마루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맞춰 유봉이 구음(口音)으로 노래한다. 처연하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다.

    영화에서 거문고를 연주한 사람은 인간문화재이자 단소·거문고 명인이던 김무규, 촬영 장소는 구례 김무규 가옥의 사랑채 누마루였다. 임권택 감옥이 김무규의 집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은 것이다.

    김무규는 단소와 거문고의 당대 최고 명인이다. 특이하게도 단소·거문고 명인 이전에 역사학자이고 국어학자였다. 오랫동안 구례중·고등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낸 이력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기예에 앞서 세상을 보는 철학을 더 중시했다고 할까. 김무규의 손자인 대금 연주자 김정승(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한학에 정통하고 늘 원서를 가까이하며 학문을 닦으셨다. 억지로 국악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으셨다. 음악은 풍류로 즐겨야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삼아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김무규 음악의 넉넉함 혹은 대범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무규 고택은 1922년 지어졌다. 이곳에서 김무규는 열심히 책을 읽고 단소와 거문고를 공부했으며 후학도 길렀다. 김소희 명창 등 많은 국악인이 이곳을 드나들었다고 하니 국악과 풍류를 즐기는 이들의 사랑방이었던 셈이다. 그 핵심 공간은 사랑채 누마루였을 것이다. 영화 ‘서편제’의 주연배우 김명곤도 대학 시절 병 치료를 위해 지리산 암자에 머물다 이곳을 찾아 단소를 배웠다고 한다. 서편제를 촬영한 것도 이 인연 덕분이라고 한다.

    김명곤은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의 기자였다. 그가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하던 1977~1978년 기자로 일했다. 김명곤의 회고. “뿌리깊은 나무와의 인연은 일 년밖에 맺어지지 않았지만 한창기 사장과의 인연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아마도 한창기 사장이 추구했던 우리말과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에 나도 심취했고. (…)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놀라운 식견으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으셨을 텐데, 이승에 안 계시니 아쉽고 그립다.”(‘특집! 한창기’, 창비, 2008)

    수오당, 순천 온 까닭

    구례에 있어야 할 이 한옥이 어떻게 순천까지 옮겨온 것일까. 이 얘기를 하려면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창기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100회에 걸쳐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했다. 처음엔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76년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0년대는 밀려드는 서구문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던 시절이다. 판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창기의 판소리 감상회는 전통음악의 존재감을 알리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한창기는 100회 공연을 마치고 이렇게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적어도 판소리를 절명의 위기에서는 구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로써 이 감상회의 소임은 끝났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전통 공연이 인기를 끈 데는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라는 밑거름이 있었다. 한창기는 판소리 감상회 때 부른 소리 가운데 조상현의 ‘춘향가’, 한애순의 ‘심청가’, 박봉술의 ‘흥보가’와 ‘수궁가’, 정권진의 ‘적벽가’ 등을 다시 녹음해 1982년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란 이름으로 음반 23장을 내놓았다. 동시에 이에 대한 사설집을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다섯마당’(전 6권)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전면적 각주가 붙은 최초의 판소리 사설집이다.

    그런 한창기가 김무규를 모를 리 없다. 뿌리깊은 나무 사무실에서 기자였던 김명곤과 판소리를 주고받을 정도였는데, 구례의 수오당을 모를 리 없다. 판소리와 우리 가락을 사랑했던 한창기에게 김무규 고택 수오당은 매력 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그곳에 담겨 있는 내력과 스토리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창기는 1980년대 들어 수오당을 눈여겨봤다. 매입하고 싶을 만큼 탐냈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무규가 살고 있는 집을 팔라고 할 수는 없는 법. 기다려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 세월이 흘러 1993년 ‘서편제’가 개봉했다.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서편제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관람객이 110만 명을 넘었으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4년 김무규는 세상을 떠났다. 1996년경 한창기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했고,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수오당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한창기가 더 오래 살아 수오당을 매입했다면, 그곳에서 매력적 프로그램이 여럿 만들어졌을 텐데.

    수오당에 다시 판소리가 들렸으면…

    한창기 사후, 그의 컬렉션을 보관·연구·전시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이 추진됐다. 그 과정에서 유족들은 구례의 김무규 고택을 떠올렸다. 한창기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김무규 고택. 상황을 알아보니 그 집이 비어 있었고 유족들은 이를 매입해 2006년 낙안읍성 옆 박물관 야외 부지로 옮겼다.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공식 개관하기 5년 전의 일이다.

    2006년 고택을 해체해 순천으로 옮길 때, 구례 사람들은 “김무규 선생 고택을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구례 사람들의 마음은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창기의 유족이 수오당을 매입해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야외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누마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화 ‘서편제’에 등장했던 그 공간. 전형적 양반 가옥인 수오당은 반듯하고 깔끔하다. 안채 뒤쪽으로 가면 정갈한 장독대가 찾는 이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고택 담장 너머로는 낙안읍성 풍광이 쫙 펼쳐진다.

    그런데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이 공간의 본질과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김무규는 누구인지, 한창기라는 사람이 이 건물에 왜 눈독을 들였는지, 김명곤은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와 한창기는 우리 가락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등등을 이곳에서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창기, 김무규, 김명곤, 수오당, ‘서편제’, ‘뿌리깊은 나무’의 스토리는 감동적이고 한편으론 역동적이다. 그 인연은 오묘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막상 수오당 현장에선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다. 구례에서 옮겨 온 한옥 건물만으로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건물을 시각적으로 만나는 것만으론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다. 김무규 고택의 본질은 시각적인 건물이 아니다. 이 건물에서 이뤄졌던 다양한 음악 활동이 수오당의 본질이다. 그것은 한창기를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인연이기도 하다. 그 인연을 다시 만나기 위해선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의 수오당이 좀 더 분주해져야 한다. 이곳에서 김무규의 단소와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한창기가 사랑했던 판소리 다섯마당도 들어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정해와 김명곤의 소리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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