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호

“盧는 사학개혁, 文은 검찰개혁에 지나치게 올인”

민노총 대변인→손학규 보좌관→이재명 공약 설계…손낙구 스토리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2-04-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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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가난한 家長

    • “지금부터 나는 생계형 보좌관이다”

    • ‘작은 조세국가’의 식민지적 기원

    • 부동산 가격 폭등, 민심 이반 불러

    • 민주당 주류의 인식, 민심과 간극

    손낙구 보좌관이 4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손낙구 보좌관이 4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1986년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 위장취업. 1999년 민주노총 대변인. 2004년 민주노총 정책국장. 2004년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보좌관. 2008년 민주노동당 대변인. 2011년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표 보좌관. 2022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정책본부 부실장.

    손낙구 보좌관(김정호 민주당 의원실)은 1962년생이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 사이에는 묘한 이질감이 있다. 특히 2011년을 기점으로 단절선이 또렷하다. 그는 민주노총 시절 문재(文才)를 갖춘 대변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단병호 (당시) 위원장보다 유명하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런 그가 거대 정당인 민주당으로 적을 옮겼으니 그 자체로 뉴스거리였다.

    ‘노동계 ‘입’ 손낙구, 손학규 브레인으로’(한겨레), ‘손학규 정책보좌관에 민주노총 출신 손낙구’(중앙일보), ‘손학규로 간 손낙구’(경향신문), ‘진보 보좌관 임명…손학규 더 좌로?’(매일경제), ‘손학규, 보좌관에 전 민주노총 대변인을 선임’(조선일보), ‘손학규, 노동계 ‘입’ 출신 孫 보좌관 발탁’(한국경제).

    그에게는 유쾌한 회고가 아니다. 4월 6일 국회에서 만난 그는 과거를 담담히 되뇌었다.

    “20대 중반에 노동운동을 시작해 40대 후반을 진보정당 일선에서 맞이했던 가난한 가장(家長)이 막다른 골목에서 온전히 월급 받는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었어요. 지금 다시 돌아봐도 그 이유였죠. 또 심상정 의원과 끝까지 민주노동당 분당을 막으려 애써 봤는데 잘 안됐잖아요.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문 닫게 되면서 운동가로도 지쳤죠. 내 딴에는 그런 사정으로 취직한 건데, 언론에 기사가 많이 나서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어요.”



    2011년 6월 26일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한겨레에 ‘손낙구의 선택’이라는 칼럼을 썼다. 핵심은 “그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고 의지도 굳고 전문성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진보의 세계 안에서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긴 쉽지 않았다”는 거다. 손낙구가 말했다.

    “상훈이도 자기 나름에는 나를 생각해서 쓴 건데, 저는 힘들었어요. 말하자면 힘들고 부상당해서 운동을 더 못하고 후방으로 가는데, 막 관심을 받으니 힘들더라고요.(웃음).”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사실 그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따로 있다. 그 얘기부터 해보자. 그는 2008년 ‘부동산 계급사회’, 2010년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냈다. 최근에는 ‘조세 없는 민주주의의 기원’(이하 ‘기원’)을 출간했다. 각주만 1000개가 넘는 대작이다. 읽다 보면 경제 규모에 비해 조세 부담률이 낮은 ‘작은 조세국가’의 근본 바탕이 일제강점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2015년 건국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일제하 세무관서의 설치와 운영’이 뼈대다.

    노동운동가가 조세 문제를 파고드는 역사학자가 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졌던 문제의식은 민주화가 됐는데 보통 사람들한테 절박한 노동·주거·복지 등 사회경제적 문제가 왜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미국 시민혁명 때 슬로건이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예요. 영국·프랑스의 시민혁명도 유사한 성격을 지녔죠. 즉 조세 문제를 계기로 민주주의가 성립하고, 그 뒤에는 조세의 지출이라 할 수 있는 복지가 민주주의의 중심 의제가 됩니다. 조세로 한국 근대국가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구멍을 들여다볼 수 있고 대안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연구를 시작했어요.”

    노동운동가로서 가졌던 관심이 이어지는데, 다만 렌즈가 달라진 거네요.

    “조세로 민주주의를 들여다보면 실질적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국회에 보좌관으로 들어와서 기획재정위원회에도 있다 보니 고민이 깊어졌죠.”

    노동운동을 했으니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제안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틀로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노동이 중요한 의제로 안 다뤄지는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없이 보수만의 독점적인 정치 체제라는 두 가지 점을 문제 삼잖아요. 그러면 해답은 노동자 계급 기반 정치세력을 만드는 거예요. 일견 너무나 정당한 얘기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너무 먼 길이에요. 제가 민주노동당 활동도 해봤잖아요. 노동계급 기반 정당을 만들면 다 해결된다? 국회 와서 보니까 아닌 것 같은 거예요.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먼 훗날 실현된다 해도 그 이전에 ‘조세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면 훨씬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기원’에는 소득조사위원회라는 식민 통치 기구가 소개된다. 소득조사위원회는 프로이센과 일본에서 납세자의 투표로 선출된 대표들이 독립적으로 과세표준을 결정할 수 있는 제도를 일컫는다. 일제는 이를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면서 성격을 180도 바꿔버린다. 그는 ‘기원’에 “소득조사위원의 사회적 배경을 분석한 결과 이들의 역할은 ‘대표 없는 과세’ 체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외형적 전시행정 장치이자, 지역유력집단을 조세행정의 파트너로 조직하여 제한적 범위에서나마 동의의 기반을 확대하려는 수단이었다”고 썼다.

    소득조사위원회는 저를 포함해 일반 독자들이 처음 접해 봤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일본에서 이 제도를 직접선거로 운영한 게 더 흥미로웠고요.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는데도 근대민주주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세금납부자선거체제를 일찍 시작해요.”

    노동·주거·복지가 정치의 중심에서 빠지다

    조선총독은 입법 명령을 통해 개인소득세를 도입했다. ‘기원’의 설명대로라면 “일본에서는 정부가 제출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제국의회에서 번번이 부결되거나 대폭 수정된 데 비해 조선에서는 납세자의 동의나 수정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제가 남긴 ‘대표와 동의 없는 강압적 과세’라는 유산은 납세자에게 세금을 수탈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역사와 현실을 연결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세금폭탄’ 담론과의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납세자들이 직접선거로 대표를 선출해 그들의 동의 아래 조세를 어떻게 거둘지, 누구에게 더 많이 거둘지, 무엇을 위해 어디에 쓸지를 결정하는 게 민주주의의 태생적 원리죠. 한국 민주주의는 이 과정이 없던 거예요. 거기다 복지 경험도 일천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뺏겼다’거나 ‘내봤자 나한테 돌아오느냐’는 의식이 팽배할 수밖에 없죠. 동의가 안 되는 거죠.”

    ‘대표와 동의 없는 강압적 과세’는 시민의 자율성과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가 한국 현대사에 뿌리내리기 힘들게 한 고리처럼 느껴집니다.

    “정치학에 자유화 단계를 거쳐 민주화로 나아간다는 이론이 있어요. 자유화 단계의 핵심은 정치적 반대의 자유가 사회적으로 정착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유화가 없는 상태에서 일거에 보통선거권이 여성에게까지 주어졌죠. 보통선거권이 민주화의 지표거든요. 반면 유럽에서는 민주화 이전 자유화 단계 때 ‘조세 있는 민주주의’가 성립해요. 즉 사회경제적 문제가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가 돼 있는 상태에서 보편적 선거권의 민주화 단계로 넘어간 거죠.”

    사회경제적 문제는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그는 ‘기원’ 서문에 이렇게 썼다.

    “10년 민주정부도 거쳤는데 왜 보통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팍팍한가? 민주화운동 세력 중 상당수가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 지위에도 올랐는데, 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해결 능력이 취약하고 심지어 무심하기까지 한 것일까.”

    소확행과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손낙구 보좌관은 최근 ‘조세 없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읽다 보면 경제 규모에 비해 조세 부담률이 낮은 ‘작은 조세국가’의 근본 바탕이 일제강점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후마니타스 제공]

    손낙구 보좌관은 최근 ‘조세 없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읽다 보면 경제 규모에 비해 조세 부담률이 낮은 ‘작은 조세국가’의 근본 바탕이 일제강점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후마니타스 제공]

    한국 정치는 사회경제적 문제와 관련 없는 이슈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주정부 시기에도 DJ(김대중 전 대통령) 때는 남북관계, 노무현 정부 때 사학개혁과 지역감정 문제, 문재인 정부 때 검찰개혁 등에 지나치게 올인(all in)한 면이 있죠. 물론 김대중 정부의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극복이나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방역, 또 노무현·문재인 정부 때 부동산 투기에 대한 대책 등 사회경제적 이슈가 중요한 담론이 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의도했다기보다는 상황이 닥치니까 달라붙었던 거죠. 민주 정부가 노력해서 노동·주거·복지 등의 문제를 정치의 중심 의제로 삼아보지는 못했어요. 냉정히 보면 그렇죠.”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검찰개혁이 먹고사는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질문하면 ‘궁극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된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민주화 세력을 외형적으로 주도하고 혜택도 더 많이 본 민주당의 주류, 즉 민주당 일군의 세력이 가진 인식이 그런 쪽(사회경제적 문제가 아닌 이슈)으로 조금 더 경도돼 있다고 생각해요. 민주화 이후에도 그쪽으로 자꾸 몰입하고 지나치게 힘을 집중하다보니 이쪽 영역(사회경제적 문제)이 휑해지죠. 그러다 보니 민심과 간극이 생기고 뒤에 가서는 자꾸 주저앉게 되고요. 민주화 세력에 ‘조세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조금 부족했지 않나 싶어요. 그런 생각을 전부터도 했는데, 책을 쓰면서 계속 했죠.”

    그는 ‘기원’에 “한국은 근대국가 형성 이래로 조세를 둘러싸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설득하거나 타협하는 정치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며 “복지제도 확충을 위한 증세를 설득하거나 타협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썼다.

    증세 공론화에 관한 한 거대 양당과 정의당 등 어떤 정치세력도 자유롭지 못한 셈 아닙니까.

    “민주노동당이나 정의당은 양당만큼 권한을 갖지 못했으니 책임을 묻기 어렵죠. 정권을 번갈아가며 담당했던 거대 양당은 증세에 대한 의욕을 거의 내지 못했고, 심지어 감세 기조까지 내건 책임이 있죠. 정의당은 일단 명분상으로는 민주노동당 때보다 증세 담론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려 했죠. 그러나 의석수도 없고 권한을 갖지 못해 그 이상의 힘을 보탤 수가 없었죠.”

    복지는 주장하면서 증세에 대한 공론화를 하지 않는 것은 한국 진보의 한계 아닙니까.

    “정치가 적극적으로 복지 담론을 형성하다 보면 이를 위해 재원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올 겁니다. 복지를 위한 증세 협상이 의회에서 이뤄지고, 여기서 협약이 체결될 때 돌파구가 생기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복지 선거가 계속 안 이뤄지잖아요. 지난 대선도 부동산정책 실패에 대한 선거이자 문재인 정부 심판 선거가 되면서 복지 선거가 되지 못했죠.”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시리즈를 통해 생활밀착형 공약을 대거 내놨다. 이 중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공약이 대표적인 히트 아이템으로 꼽혔다. 손낙구는 소확행 시리즈의 실무 책임자였다.

    증세를 위한 설득에 자신이 없으니 획기적 복지국가 담론 대신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잘한 복지정책을 통해 표를 얻으려는 것 아닙니까.

    “소확행은 복지국가 담론과 짝을 이루는 거예요. 복지국가라는 큰 담론을 피부에 와닿는 세부적인 내용으로 구체화한 거죠. 그러니 복지국가 담론과 소확행을 대비시키는 건 적절치 않다고 봐요. 거대 공약도 많이 냈어요. 20개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거기에 옛날만큼 관심을 안 가져요. 기자들도 소확행에 대해서만 취재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특히 공약 선거가 아니었죠.

    “이재명 후보는 증세를 설득할 복지국가 구상 대신 기본소득과 국토보유세를 내놨는데 말하자면 잘 안 먹혔죠. 다음 선거에서는 복지국가 해법으로 큰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세부적으로 구체화하는 소확행 공약을 짝지어 내놓으면 의미가 있겠죠.”

    부동산 6계급의 이해관계

    전작은 부동산 불평등을 다뤘고 이번 책은 조세를 다뤘습니다. 마침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 실패를 부동산 조세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데요.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부동산 6계급을 제안했어요. 1계급은 부동산 부자예요. 주택 수로는 여러 채를 가진 계급이죠. 6계급은 지하방이나 고시원 같은 데 사는 사람들이에요. 폭등하면 1계급은 자산이 늘어나니 무조건 좋죠. 2계급은 집을 한 채 가진 사람인데, (희비가) 갈리죠. 강남에 한 채 갖고 있는 사람은 좋고, 강북이나 시골에 한 채 갖고 있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손해죠. 6계급은 가격이 폭등하면 ‘폭망’하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 6계급부터 2계급 다수까지 고통스러워진 게 민심 이반을 불러왔죠. (다만)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조세 저항은 부분적인 현상입니다. 거기에 해당하는 유권자는 소수죠. 그러나 부동산정책 실패, 나아가 대다수 보통 사람이 가진 절박한 삶의 문제를 정치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못한 점에 대한 민심 이반이 대선의 실패로 이어진 건 사실이죠.”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이 참패했습니다. 심상정 의원과 함께 일하기도 했는데, 어떤 소회가 듭니까.

    “아쉽죠. 2010년에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쓰면서 분석했을 때도 (당시) 민주노동당이 지지 기반을 정확히 찾지 못한 상태였어요. 정의당도 그 상태를 못 벗어나니 선거 구도에 따라 지지율의 부침이 심해요. 민주당이 확실히 이기거나 확실히 질 것 같은 선거에서는 (성적이) 잘 나오죠. 유권자들이 미래 투자 개념으로 표를 주니까요. 박빙 구도로 가면 유권자들이 진보정당의 미래에 투자할 여력이 없으니 지지율이 낮아져요. 어려운 조건에서 심 의원이 진보정당의 짐을 외롭게 여태까지 짊어져 왔고, 이번에도 고생이 많았죠.”

    진보논객 홍세화 씨는 ‘신동아’ 2021년 1월호 인터뷰에서 민주화운동 세대(86세대)를 두고 “제대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민주건달”이라고 지칭했다.

    86세대의 지적 불성실함을 지적하는 홍세화 씨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해 보니 1920년대와 1980년대에 지식인 집단이 대거 농민과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인데, 이후 30~40년의 시대정신을 만드는 값진 자양분이 됩니다. 이것이 한국 근대 100년의 값진 지성사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민중 속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런 마음으로 한국 사회에 대해 공부한 사람들도 있죠. 홍 선생님이 지목한 일군의 대상이 있겠죠. 그러나 그들이 이 값진 지성사를 대변할 수는 없다고 봐요.”

    밥벌이의 지겨움

    1월 19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강남구 업비트라운지에서 열린 가상자산 거래소 현장 간담회에 앞서 ‘이재명 소확행 공약 1호’를 NFT로 발행하는 시연을 하고 있다. [뉴스1]

    1월 19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강남구 업비트라운지에서 열린 가상자산 거래소 현장 간담회에 앞서 ‘이재명 소확행 공약 1호’를 NFT로 발행하는 시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는 학자형 달변가다. 말을 듣다 보면 독서의 넓이와 깊이가 느껴진다. 홍세화식 분류법을 빌리자면 ‘민주건달’에서 가장 거리가 먼 민주화운동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적을 옮긴 뒤 대중적으로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발산한 때는 2012년이다. 그해 민주통합당(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선 손학규 후보의 슬로건이 ‘저녁이 있는 삶’이었는데, 그 기획자가 손낙구다. 이때를 계기로 그는 민주당에 더 깊이 착근해 갔다.

    지금은 ‘민주노총 손낙구’보다 ‘민주당 손낙구’가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노동운동을 마무리한 지가 올해로 18년이 됐으니 ‘민주노총 손낙구’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않은 게 당연하죠. 손학규 대표 보좌관을 시작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지금부터 나는 생계형 보좌관이다. 온전한 월급을 계속 받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두 번째는 젊은 날 노동운동을 선택해 40대까지 보람 있게 했는데,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노동운동한 걸 후회하면 내 인생 전체가 불행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으려면 경제적으로 더 상황이 악화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면 후회해 버릴 거 아니에요? ‘뭐 한다고 노동운동해서 말년이 이렇게 비참해지는 건가’ 생각할 수 있으니…. 민주당에 와서 그 두 가지는 나름 지켜왔고 현재까지는 그 앞의 삶을 후회하지 않아요.”

    가장(家長)의 밥벌이는 신성하면서도 고단한 일이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중) 손낙구는 낯선 정당에서 고단한 밥벌이를 하는 속에서도 어떻게든 의미를 찾는다. 그가 가진 미덕 같기도 하다.

    “생계로 왔지만 전에는 못 하던 걸 할 수 있게 되더군요. 민주노총에서는 조합원 역량을 갖고 대중조직의 역할까지만 할 수 있었고, 민주노동당 때는 의원 10명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했는데, 민주당에 오니 의석도 많고 또 그때는 당대표실에 있었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았죠. 당시 ‘협동조합 기본법’을 발의해 통과까지 됐는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있었으면 못 할 일이었죠.”

    11년 전에는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당원이 아닙니까.

    “생계를 위해 보좌관이 되는데 입당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손 대표께도 설명했죠. ‘신념을 위해 민주당에 왔거나, 나중에 민주당에서 국회의원 출마할 계획으로 온 게 아니라 취직을 위해 왔는데 입당하는 것은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했죠. 손 대표가 ‘그럴 수 있겠구먼. 그렇게 해’라고 말씀하셔서 (입당하지 않고) 그냥 있었어요. 그러다 분위기가 변했어요. 국민의힘 계열 정당과 격돌이 심해지면서 입당에 대해 이전보다 (기준이) 타이트해졌죠.”

    조선노동당 당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는 “그런 건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과거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그가 입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현재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이 주된 이유다.

    “보좌관이 당연직 대의원이 되는 거예요. ‘보좌관님 당연직 대의원 올립니다’ 하면 내가 ‘당원이 아니야’ 설명해야 하고, 다른 친구한테 하라고 부탁해야 하고…. 그 뒤에는 보좌관 직책 당비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니 (입당하지 않은 상태로) 그렇게 있는 게 불편해지고 다른 보좌진들한테 미안해졌죠. 계속 보좌관으로 일하려면, 즉 생계를 위해 당원이 돼야 하는 상황이 됐죠.”

    생계를 위해 보좌관이 됐고 생계를 위해 당원도 된 셈이네요.

    “원래도 (입당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무슨 조선노동당 당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웃음).”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다시 밥벌이의 현장인 보좌관 책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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