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런’ ‘트럭 순례’… ‘포켓몬 빵’ 열풍 천태만상
단돈 1500원에 누릴 수 있는 따뜻한 소일거리
‘추억’을 ‘거래’하는 ‘시대’
코로나19로 억눌린 감정 해소 수단
16년 만에 리뉴얼돼 출시된 ‘포켓몬 빵’엔 포켓몬 그림 스티커(띠부띠부씰)가 들어 있다. 띠부띠부씰은 수집, 거래 용도로 쓰인다. ‘포켓몬 빵’ 열풍의 주된 이유다. [뉴스1]
‘빵’ 열풍? ‘스티커’ 열풍!
편의점 밖 풍경도 천태만상이다. 이른바 ‘오픈런’이라고 해 대형 마트가 문을 열자마자 뛰어들어 빵 판매대 앞에서 다툼을 벌인다. 1인당 구매 한도를 정해 놓거나 번호표를 나눠주는 경우마저 생겼다. 포켓몬 빵 하나에 인기 없는 제품 몇 개를 끼워 파는 풍경도 여기저기 목격된다.편의점은 24시간 운영돼 오픈런이 불가능하다. 대신 ‘트럭 순례’가 유행이다. 편의점에 상품을 배송하는 트럭을 발견하면 뒤따라가는 것. 점주가 배송 박스를 열어보기도 전에 내용물을 뒤적여 포켓몬 빵을 찾아낸다. 그러다 점주와 분쟁이 생겨 “앞으로는 포켓몬 빵을 일절 취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써 붙인 편의점도 있을 정도다. 배송 박스가 도착하면 상품 수량 등이 주문 내역과 맞는지 편의점 근무자가 검수 과정을 거치는데, 손님이 박스에 먼저 손을 대면 점주 입장에선 영업 방해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트럭을 따라다니며 포켓몬 빵 20개를 구입했다고 자랑하는 SNS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요즘 편의점마다 평균 하루 2~3개의 포켓몬 빵이 공급된다. 배송 트럭을 따라 편의점을 열 곳 정도 ‘순례’한 셈.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빵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빵이 아무리 맛있다 한들 트럭을 쫓아다니면서까지 먹어보려 애쓰겠는가. 동봉된 스티커 때문이다. 뗐다 붙였다 반복할 수 있다는 뜻에서 ‘띠부띠부씰’(또는 ‘띠부씰’)이라고 불린다. 포켓몬스터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그렇다고 이 그림이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 새로운 유형의 포켓몬이 아니다. ‘포켓몬 백과사전’ 같은 책에 이미 다 등장하는 캐릭터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얼마든 찾아 출력할 수 있다. 포켓몬이 그려진 상품은 문구점이나 완구점에도 흔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띠부씰에 열광한다. 꼭 포켓몬 빵 안에 들어 있는 띠부씰이어야만 한다.
한 가지 더. 빵 속에 들어 있는 스티커가 어떤 종류인지 알려고 포장지를 이리저리 흔들거나 불빛에 비춰보는 손님이 많다. “그래봤자 안 보입니다”라고 안내문을 붙인 편의점까지 있다. 이래저래 손님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여전히 제조사에서 공급받는 물량은 하루 2~3개 정도. 그러니 공급이 안정될 때까지 차라리 안 팔겠다며 ‘판매 거부’를 선언하는 편의점이 늘어나는 것이다.
품절 大亂
‘포켓몬 빵’ 열풍에 품절 대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3월 23일 서울의 한 마트에서 시민들이 ‘포켓몬 빵’을 구하기 위해 ‘오픈런’에 임하고 있는 모습. [뉴스1 ]
첫 번째, ‘추억’이다. 포켓몬 빵은 SPC삼립이 2006년 단종한 제품을 16년 만에 다시 내놓은 것이다. 이 제품이 처음 출시된 해는 1998년. 당시에도 포켓몬 빵은 한 달에 500만 개가 판매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그때 유치원생이거나 초등학생이던 어린이가 지금은 20~30대 성인이 됐다. 예전에는 부모님 용돈 받아 눈치 보며 빵을 구입했을 아이들이 지금은 ‘내돈내산’ 할 수 있는 충분한 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
두 번째, ‘거래’다. 20년 전에도 띠부씰은 아이들 사이에서 거래됐다. 거래는 곧 놀이였다. 당시엔 인기 없는 캐릭터 몇 개를 인기 있는 캐릭터 하나와 물물교환 형태로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돈으로 사고판다. 요즘 띠부씰 거래는 ‘어른이’(어린이 같은 어른을 이르는 말)들의 새로운 놀이다. 과거 거래 장소가 동네 골목이나 놀이터였다면 지금은 전국이다. 최근 인터넷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띠부씰은 캐릭터 종류에 따라 1000원에서 5만 원까지 가격이 다양하다. 특별히 흥정할 필요도 없다. 간단한 검색만으로 캐릭터별 가격대를 파악할 수 있다. 희소성이 떨어지면 가치가 변하기도 한다. 마치 주식시장을 연상케 한다. 포켓몬 빵이 소소한 돈벌이 수단이 됐다.
띠부씰은 빼고 빵만 1000원에 판매한다거나 개봉하지 않은 포켓몬 빵 여러 개를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파는 등 우스운 사례도 여럿 있다. 이를 게시한 사람의 판매 내역과 과거 글을 추적해 편의점 점주 또는 직원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신상털이’를 하거나 시세가 변해 웃돈을 받고 되판 사람과 언쟁을 벌이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거래가 놀이, 유행, 사회적 이야깃거리가 됐다.
세 번째, ‘시대’다. 단순히 추억 때문에, 혹은 사소한 이익을 바라고서 그리 악착같이 오픈런이나 트럭 순례를 한다는 건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포켓몬 빵을 기어이 구입하려는 손님들에게는 각자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편의점주 입장에서 최근 풍경을 지켜보며 느낀 소감을 솔직히 말하자면 ‘도대체 저만큼 열정을 쏟아부을 일인가?’ 싶다. 그래서 시대적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든 수집 행위가 그러하지만 띠부씰 열풍에는 ‘경쟁’이 녹아 있다. ‘남들보다 더 모았다’는 나름의 성취욕을 준다. 과거엔 동네 좁은 골목이나 놀이터에서 자랑하고 경쟁했다면 이젠 SNS라는 광활한 광장이 전 세계로 열려 있다. 같은 세대끼리 추억을 폭넓게 공유한다. 게다가 그렇게 자랑하고, 경쟁하고, 추억에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의 가격이 ‘고작’ 1500원이라니! 이보다 알뜰하고 따뜻한 소일거리가 어디 있나.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 넘게 지속되면서 모두가 삶의 활력을 잃고 있는 시기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성취 효과를 누린다’는 점에서 포켓몬 빵은 마케팅 시기와 대상을 잘 만난 듯싶다. 그것으로라도 여유를 즐기고 만족을 누리려는 심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2030세대가 팬데믹에 가장 큰 경제적 피해를 본 세대라는 점 역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과거 ‘추억 마케팅’과 달라
이제 이 열풍의 전망을 짚어볼 차례. 띠부씰은 과연 인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추억 마케팅’ 사례는 과거에도 많았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영향으로 갑자기 달고나 열풍이 부는가 하면 옛날 형태로 리뉴얼된 소주병과 라벨이 출시됐다. ‘삼양라면’ 포장지를 60년 전 모양 그대로 인쇄한 것이나 캔 커피 ‘레쓰비’ 출시 30주년을 기념한 한정판 레트로 패키지가 판매되기도 했다.
그동안 이러한 추억 마케팅은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홀로 소비하고 일회성으로 끝나는 단점이 있었다. 소주병이나 라면 봉지를 일부러 수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캔 커피도 마찬가지다. 포켓몬 빵은 다르다. 빵이 아니라 스티커가 목적이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 가치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띠부씰의 다양성과 희귀성이 유지되는 한 상당 기간 인기를 누리지 않을까 예상한다. 현재 포켓몬 빵에는 모두 159종의 띠부씰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PC삼립이 포켓몬코리아와 체결한 라이선스(사용권) 계약에 따라 캐릭터 종류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생산 수량과 기간도 조정될 것이다.
포켓몬 빵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더디게 이뤄지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SPC삼립 측에서는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다. 생산라인을 풀가동해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설명하지만 일부 소비자는 제조사가 마케팅을 위해 일부러 품절 현상을 유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과거 품절 대란을 겪었던 상품의 경우 공급이 크게 늘며 인기가 급격히 사그라진 사례를 제조사 측에서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SPC삼립도 그에 맞게 대응하고 있을 것이다.
포켓몬 빵=힐링
2년 넘게 지속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사람들의 삶을 지치게 만들었다. ‘포켓몬 빵’ 소비는 이러한 마음에 대한 ‘치유’로 해석될 수 있다. [Gettyimage]
그동안 경제 분야에서는 ‘pent-up demand’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되곤 했다. 해석하자면 ‘억눌리고 연기된 소비’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소비의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갑작스레 소비 욕구를 분출하는 현상을 이르기도 하고, 경제적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데도 소비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는 과시형 소비를 일컫기도 한다. 명품 가방이나 고가의 전자제품을 ‘지르듯’ 구입하는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포켓몬 빵 열풍을 거기에 빗대는 일은 좀 과하다. 고작 1500원짜리 빵 하나를 갖고 무슨 심리적 보복 소비란 말인가. 그저 추억에 젖어 스스로 위안을 찾고 희소한 스티커를 모으며 재미를 찾는 것이다. 여차하면 스티커를 판매해 소소한 이익까지 취할 수 있으니 전혀 경제적 의미가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허망함도 달랠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띠부씰 수집은 일종의 ‘힐링 소비’다. 경제 전문가들은 과거에 이런 현상을 소비 치유(Consumption healing)라고 표현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6개월 정도면 상황이 종료되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희망 사항’에 가까웠다. 팬데믹은 1년을 지나 2년을 넘겼다. 사람은 역시 ‘적응하는 동물’인가 보다. 초기에는 공포에 휩싸였던 사람도 점차 의연해지고, 나아가 태연해지기까지 했다. 최근엔 오미크론 변이가 대유행하면서 마치 봇물 터진 듯 확진자가 쏟아져 나온다. 과거에는 하루 1000~2000명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에도 놀라며 확산세가 엄청나다 생각했건만 이제 20만~30만 명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작금의 상황을 엔데믹(endemic)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고비만 넘기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뻐할 일이긴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터널의 끝이 보인다”는 식의 발언을 그동안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사람들이 그것마저 무감각해졌다. 그저 멍하니 일상을 살아간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새로운 유행어가 됐다.
돌아보면 역사가 쓰인 이래 인류가 이토록 오래 ‘자발적 폐쇄’ 기간을 가진 적이 없다. 동서 냉전으로 인한 폐쇄는 있었지만 진영 내부에서의 교류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념 대립이 끝나고 세계화가 가속화하며 세상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긴밀히 연결됐다. 코로나19는 거기에 종지부(혹은 쉼표)를 찍고 ‘각자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시대의 경험을 안겼다. 코로나19는 세계화의 흐름에 균열을 안긴 커다란 시련이자 역설적으로 세계화가 그동안 인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세계 공급망이 무너져 회복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세계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최근엔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발발해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원부자재 가격 및 물류비용이 폭등하고 취업률·실업률·물가상승률 등 제반 경제 지표가 지극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과거에 이런 불경기가 오고 삶이 고단해지면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가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하면서라도 화를 풀었다. 지금은 여러 여건상 자유로운 집회 활동을 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억눌린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최근 2년간 우리 주위에는 그러한 감정 배출의 통로가 변변치 않았다. 모두가 그저 꾹 참으며 오늘을 살아간다. 포켓몬 빵 열풍은 이 와중에 사람들 나름대로 따뜻함을 찾고 ‘화를 푸는’ 수많은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깟 빵 하나’인지 모를 것에 거창한 해석을 덧붙여 봤다.
팬데믹 첫해 2020년 서점가의 이슈는 단연 ‘돈’이었다. 월간 베스트셀러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부자 되는 법’ ‘주식 성공하는 법’ ‘비트코인 투자’ 등의 책이 휩쓸었다. 사람들이 미래를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땐 ‘어떻게든 벌어야 한다’는 악착같은 의지가 있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단념한 것일까. 지난해 서점가의 흐름은 ‘힐링’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재테크 관련 서적은 뒤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판타지와 따뜻함이 채우고 있다. 지난해 최고 베스트셀러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다. 연말부터 현재까진 ‘불편한 편의점’이 1위를 달리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도 “포켓몬 빵 없어요?”라고 묻고 나가는 손님을 보며 팬데믹 너머 우리 사회가 무엇을 추구하게 될지, 경제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늘 서로의 격려와 위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