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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걸작이 ‘지천’ ‘예술 강국’의 힘

南佛 니스 주변 미술관 순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걸작이 ‘지천’ ‘예술 강국’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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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부 프랑스 휴양도시 니스에서 일주일쯤 머문다면 근현대 미술의 여러 거장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마티스, 피카소, 세잔, 고흐, 르누아르, 샤갈의 자취가 생생하게 묻어나는 ‘성지’들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 외진 시골에 손꼽히는 현대미술관이 자리한 데서 ‘예술 강국’ 프랑스를 실감한다.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는 세계 최고의 휴양도시 니스(Nice)가 있다. 관광객이 연중 끊임없이 찾아드는 곳이다. 내가 1981년 방문했을 때는 해변의 누드 여인들에게만 눈길이 갔는데, 2008년 다시 갔을 때는 인근의 미술사 속 성지(聖地)들이 발길을 잡아끌었다. 30여 년 연륜이 그렇게 나를 변화시킨 것 같다.

이곳은 화가들의 천국이다. 니스 인근 여기저기에는 마티스, 피카소, 세잔, 고흐, 르누아르, 샤갈, 장 콕토 등 쟁쟁한 화가들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 니스 시내이거나 시내에서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나는 일주일간 니스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니스에서 서북쪽으로 25km쯤 가면 생폴드방스(St. Paul de Vence)라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중세 성곽마을이 나온다. 유럽의 많은 지성인과 예술가가 머문 곳으로 오늘날엔 인기 관광지다. 생폴드방스에서 언덕 아래로 내려와 호젓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맞은편 산 어귀에 요정이 살 듯한 신비스러운 건물이 나타난다. 마그 재단(Foundation Maeght) 미술관이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이 등장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단박에 느끼게 된다.

이 미술관은 마그(Maeght) 부부가 1964년에 세웠다. 남편 에메 마그(Aime′ Maeght· 1906~1981)는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형제자매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자랐다. 아내 마그리트(Marguerite Maeght)와는 1927년 결혼했다. 이 부부는 석판 인쇄사업으로 크게 성공한다. 1930년 니스에서 가까운 칸(Cannes)에 인쇄소를 열고 6년 뒤에는 화랑도 열었다. 에메 마그는 비교적 이른 서른 살에 예술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그는 재벌이라 할 정도의 부자는 아니지만 미술상으로 크게 성공해 재벌들이 설립한 것 못지않게 훌륭한 미술관을 만들었다.

부부는 화가 피에르 보나르와 절친한 인연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를 여럿 알게 된다. 1945년에는 파리에도 화랑을 개설하고 당시에도 유명 화가이던 마티스, 샤갈, 브라크, 미로, 보나르, 자코메티 등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거래했다. 부부는 미술상인 동시에 미술품 컬렉터였고, 오랜 친분을 쌓은 예술가들로부터 많은 작품을 기증받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대량으로 소장하게 된다.





사방에서 숨 쉬는 거장들

이렇게 한데 모인 소장품으로 세워진 마그 재단 미술관은 남프랑스의 외진 마을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현대미술관으로 급부상한다. 마그 부부의 사업가적 수완과 인적 네트워크 덕분이다. 미술관은 정부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받지 않는 완전한 개인 미술관이다.



미술관 입구, 건물의 앞뒤 정원에는 시골 마당에 나뒹구는 장작더미처럼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널려 있다’. 경매시장에서 수백, 수천만 달러를 호가할 작품들이다. 미술관 내부도 마찬가지다. 벽에 걸린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하나같이 걸작들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4만여 점의 소장품은 대부분 20세기 거장들의 것인데, 특히 자코메티와 미로의 작품이 두드러진다. 미술관 건물 주변은 ‘자코메티의 마당’ ‘미로의 정원’이라 할 정도다. 자코메티의 조각 52점과 미로의 작품 150점을 소장했다니 정말 놀랄 일이다. 아무리 작가와 화랑주의 인연이었다고 해도, 이 부부가 작가들에게 어지간히 큰 덕을 베풀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이 기증받을 수 있었을까.

유대인을 사랑한 프랑스

마그 재단 미술관은 바로 옆에 인기 관광지 생폴드방스가 있기 때문인지 연간 2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한다. 그런데 미술관을 둘러보면 생폴드방스가 아니더라도 많은 관람객이 찾아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대가들의 작품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는 3만 권이 넘는 현대 예술 관련 서적을 보유한 도서관도 있다.

생폴드방스는 그림엽서같이 아름다운 곳으로 그레타  가르보, 장 폴 사르트르, 이브 몽탕, 시몬 시노데 등이 자주 머물던 마을이다. 마크 샤갈은 1950년부터 1985년까지 아예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의 한적한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살아서는 만나기조차 어려운 유명 인사였지만, 그의 무덤은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니스 시내에는 샤갈 미술관(Musée National Marc Chagall)이 있다. 그가 생존하던 1973년 프랑스 정부가 세웠다. 당시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강력한 지원 아래 국립 미술관으로 만들어졌다. 과연 문화대국 프랑스다운 일이다. 이 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샤갈 작품이 가장 많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대작도 많이 걸려 있다.

샤갈은 1887년, 그때는 러시아 제국이던 벨라루스(Belarus)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유대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마을 인구의 태반이 유대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아침 6시에 유대교회당에 나가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유대인은 러시아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학교를 가는 데도, 이사를 하는 데도 제약이 따랐다. 샤갈의 어머니는 뇌물까지 써가며 유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교에 아들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런 차별을 겪어왔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직접 지켜본 샤갈이기에, 작품 세계에 유대인으로서의 애환이 진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시절 러시아에서 유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유대인이란 사실을 철저히 숨기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유대인임을 드러내고 유대인 화가로 사는 것이다. 샤갈은 후자를 택했다. 그는 19세 때 당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 미술학교에 입학하는데, 유대인은 국제여권이 없으면 이 도시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의 여권을 빌려 몰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간다. 샤갈은 스물세 살이 된 1910년, 세계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갔다. 그에게 파리는 신세계였고, 파리의 화가들도 러시아인 화가인 그를 새로운 존재로 여겼다. 프랑스와 그의 인연은 한평생 이어졌다. 샤갈은 회화뿐만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 세라믹 등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100세 가까이 장수했다.



마티스 미술관, 르누아르 미술관

니스 시내에는 마티스 미술관(Matisse Museum)도 있다. 마티스는 1917년부터 1954년까지 니스에 살면서 작업했기 때문에 이곳에 그의 미술관이 만들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곳 또한 프랑스 정부가 세운 국립 미술관이다.

미술관 건물은 17세기 말 니스의 한 부호가 지은 저택 빌라인데, 1950년 정부가 인수해 역사 유적지로 보존하다가 1963년 마티스 미술관을 세우면서 이 건물의 1층과 2층을 미술관으로 사용했다. 소장품이 늘어나자 1989년부터 옆 건물을 부속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소장품은 미술관이 구입한 것도 있지만 마티스와 그의 상속자들이 기증한 것도 많다. 회화 68점, 드로잉 236점, 판화 218점, 사진 95점, 조각 57점, 마티스가 그린 책 14권, 유품 등이 있다. 마티스의 대작을 찾긴 어렵지만 수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다.

니스에서 가까운 곳의 르누아르 박물관(The Renoir Museum)도 꼭 가봐야 할 곳이다. 르누아르는 51세가 되는 1892년 무렵부터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1907년에는 관절염을 치료할 겸 기후가 온화한 남프랑스 칸쉬르메르(Cagnes-Sur-Mer)에 있는 한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르누아르는 이곳에 거주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는데, 그때 집이 지금의 르누아르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박물관은 전망이 아주 좋고, 집 앞에는 고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정원이 펼쳐져 있다. 건너편 산기슭의 고성(古城)과 마주해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박물관에는 그가 작업하던 스튜디오가 그때 그대로 보존돼 있다.

르누아르는 관절염 때문에 휠체어를 탈 정도였지만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 나름의 새로운 방식을 계속 개발해나갔다. 1919년 죽기 직전에는 유럽의 거장들이 그린 작품과 함께 걸려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보기 위해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예술혼을 불사른 작가였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유달리 화려하고 풍만해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확연히 구분된다. 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도 일본인들이 르누아르를 유달리 좋아하는 편이다. 1990년 한 일본 재벌이 뉴욕의 경매에서 그의 대표작 ‘물랑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lette)’를 7810만 달러(약 930억 원)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구입해 화제가 됐다.


세잔 키워낸 엑상프로방스

피카소도 니스와 인연이 많다. 칸과 니스 사이에는 앙티브(Antibes)라는 아름다운 해안 마을과 고성이 있다. 1923년에 이곳을 방문한 피카소는 1946년 다시 와서 6개월간 고성에 머물며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피카소는 앙티브를 떠나면서 시에 여러 작품을 기증했고, 시는 이후 고성을 피카소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유화 24점, 드로잉 44점, 판화 32점, 수채화 11점, 세라믹 80점, 조각 2점, 직물 작품 5점 등을 볼 수 있다.

니스에서 동쪽으로 가면 카지노로 유명한 모나코가 나온다. 거기서 해안을 따라 좀 더 가면 망통(Menton)이라는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예술가 장 콕토를 기념하는 장 콕토 박물관(The Jean Cocteau Museum)이 있다. 2003년 망통 시가 박물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2007년 건물 설계를 공모해 2011년 완공했다. 박물관은 장 콕토의 작품과 그와 관련 있는 작품 1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장 콕토는 1955년 처음 망통을 방문한 후 이 도시에 흠뻑 매료돼 ‘프랑스의 진주’라 칭송했다.

니스에서는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와 고흐가 머문 아를(Arles)에도 다녀와야 한다. 두 곳 모두 니스에서 멀지 않고, 하루에 여유 있게 다녀올 수 있다.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의 친구 에밀 졸라(Émile Zola)의 고향이기도 하다. 둘은 초등학교 동급생이었다. 아를은 고흐가 예술가 마을을 꿈꾸며 고갱과 함께 머문 곳이다.

세잔은 파리보다 남프랑스를 더 좋아했고 여기서 주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고향 엑상프로방스는 작품 활동의 근거지였고, 인근에 있는 생빅투아르 산은 세잔이 수없이 그린 작품 소재다.

세잔은 62세이던 1901년 엑상프로방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지었고, 1903년에는 아예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지금 이 아틀리에는 세잔 기념관이 돼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관광객이 꽤 많았다. 아틀리에에는 세잔이 정물화를 그릴 때 사용한 소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세잔은 그림에 과도한 열정을 지녔는데 그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폭풍우를 만나 비바람을 헤치며 귀가하는 길에 쓰러졌다. 집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지만, 다음 날도 작업을 계속하는 바람에 결국 침대에 드러눕고는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1906년, 67세의 나이였다.

지중해 근방의 소도시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을 키운 도시다. 그는 은행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고 유산도 많이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예술가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세잔을 자신들 예술의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술사는 세잔을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엑상프로방스 시는 그의 업적을 기려 세잔 메달(Cezanne Medal)이라는 상을 제정했다.

아를은 기차로 다녀오는 것이 편하다. 고흐가 1888년에서 1889년까지 머물면서 300여 점의 작품을 생산해낸 곳이다. 아를 역에 내리면 가까운 곳에 고흐와 고갱이 살던 노란 집이 나온다. 시내로 들어서면 고흐가 자주 들렀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유명한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Café Terrace at Night)’로 잘 알려진 카페에서 차 한잔을 할 수 있다.



미로 정원, 자코메티 마당

마그 재단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작품은 미로의 ‘여성(Femme)’이다. 마치 예쁜 오뚝이를 세워둔 것 같다. 미술관은 북쪽 정원 전부를 미로에게 할애할 만큼 미로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다른 작가들의 조각품도 많지만 미로의 것이 가장 많다고 한다.

후안 미로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장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파리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면서 화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미로는 스페인의 대표적 현대 작가로 인정받으며 일흔이 훌쩍 넘은 1975년에 고향 바르셀로나에 개인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그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크게 영향을 미친 화가로 평가받는다.

미술관 건물의 다른 한쪽 정원은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으로 가득하다. 자코메티는 마그 재단 미술관의 설계와 건설에도 참여했다. 그런 만큼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은 처음부터 미술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관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자코메티의 ‘남성(Man)’은 걸어가는 남자의 조각상이다. 자코메티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매우 역동적이다. 널빤지처럼 바짝 마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간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했다. 그의 조상은 본래 이탈리아인인데 종교적인 이유로 스위스로 피난 왔다고 한다. 아버지도 유명한 화가였다. 자코메티는 제네바에 있는 미술학교에 다녔고, 1922년 파리로 가서 조각을 공부했다. 그가 초현실주의 조각가가 된 것은 이때의 교육 덕분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크기가 조그마했는데 아름(Annette Arm)이라는 여자와 결혼한 이후부터 작품이 점점 커지면서 뾰족한 모양이 됐다고 한다. 그의 한 친구는 자코메티가 사람 머리를 면도날처럼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사람 조각은 모두가 길고 뾰족한데,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자코메티를 기념하기 위해 2003년 만들어진 자코메티 재단(Foundation Alberto et Annette Giacometti)은 현재 5000여 점의 자코메티 작품을 소장했다. 오늘날 이 작품들은 대여를 통해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전시되는데, 그만큼 재단은 열심히 활동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0년 2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은 1억430만 달러(약 1200억 원)에 거래됐다. 조각 작품으로는 최고가 기록이다. 

최 정 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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