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은 유럽의 여느 대도시에 비해 관광 명소가 많지 않다. 170년 역사의 티볼리 놀이공원이나 인어상 정도가 관광 코스다. 하지만 시내 한복판에 커다랗게 자리한 덴마크 국립미술관(SMK, Statens Museum for Kunst)도 놓쳐서는 안 될 곳이다.
어느 나라나 유구한 문화유산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가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을 갖췄다. 한국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덴마크도 우리와 비슷한 체계다. 고대 유적이나 역사적 문화유산은 박물관이, 현대 예술품은 미술관이 관리한다.
나는 미술관에 관심이 더 많다. 궁극적으로는 문화 수준이 선진국의 척도인데, 미술관은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선진국들이 훌륭한 미술관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그래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등이 그런 사례다.
왕과 부자들이 만든 미술관
선진국 덴마크는 독일의 북쪽에서 독일과 국경을 맞댄 작은 나라로, 면적은 한국의 절반에 못 미치고, 인구는 10분의 1을 조금 넘는 600만 명 정도다. 1인당 GDP는 5만3000달러로 한국보다 2만 달러 이상 높다. 동화작가 안데르센, 조립 장난감 레고, 세계 1위 해운회사 머스크로 잘 알려진 나라다. 소득, 복지정책, 문화예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이런 덴마크에 SMK가 있다. SMK는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작품, 서유럽 작품, 현대 작품, 판화와 드로잉 등 26만여 점을 소장한 대형 미술관이다. 작품은 1800년 이전 유럽 작품, 1900년 이전 덴마크 및 노르딕 작품, 1900년 이후 및 동시대 작품, 판화와 드로잉 등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SMK의 원천은 덴마크 왕들의 수집품이다. 19세기 이전 소장품은 대부분 왕의 수집품이고, 이후의 소장품은 민간인 컬렉터들이 기증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SMK는 왕과 부자들이 만든 미술관이다.
유명한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1521년 일기에 ‘나의 판화 중 최고품은 모두 덴마크 왕 크리스천 2세(1481~1559)에게 줬다’고 썼다. 덴마크는 현재 SMK가 소장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이래 수집을 본격화했다.
크리스천 4세(1577~1648)는 궁궐과 성을 짓고 건물과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웠다. 왕은 많은 건물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무더기로 구입했다. 하지만 미술에 조예가 없어 화려하고 교훈적인 그림만 충동적으로 사 모으다 보니 당대 최고의 화가 루벤스의 대작들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 덴마크는 1658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항복하면서 많은 작품을 전리품으로 빼앗겼다. 그럼에도 덴마크 왕궁에는 그때의 작품이 많이 남아 그 가운데 일부가 SMK에 전시돼 있다.
1827년 왕실 수집품 공개
군주의 품격 있는 컬렉션은 프레데릭 5세(1723~1766)가 즉위한 뒤부터 빛을 발했다. 프레데릭 5세는 네덜란드로 미술품 딜러를 보내 플란다스와 네덜란드 작가들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딜러가 그곳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1763년에 이미 모아둔 수집품이 200점에 달했다. 이렇게 사 모은 그림들은 SMK의 최고 소장품이 됐다.왕실 수집품은 1827년 크리스천스보그 궁전에 갤러리를 만들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했다. 이것이 SMK의 첫걸음이다. 1849년엔 왕실 수집품을 국가재산으로 등록했다.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사회가 민주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왕실 소장품은 대부분 네덜란드, 플란다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작품으로 1800점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 수집품을 모아둔 크리스천스보그 궁전에 1884년 화재가 발생해 궁전이 전소됐다. 당시 왕 크리스천 9세는 연로한 몸을 이끌고 미술품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왕의 독려 아래 신하들은 불타는 궁궐의 좁은 복도에 걸린 액자에서 그림만 뜯어내 가까스로 작품들을 구해냈다.
구출된 소장품은 한동안 갈 곳이 없었다. 10여 년이 지난 1896년에야 당대 최고의 덴마크 건축가 달레럽(Vilhelm Dahlerup·1836~1907)의 설계로 미술관을 지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SMK다. 설립 당시 SMK는 모양도 현대적이지 못하고, 전시 공간도 부족하고, 전시하기에도 매우 불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수집품은 모두 이 건물에 들어왔다. 작품은 그림, 판화, 석고상 등으로 구분됐다. 뒤러, 렘브란트에서부터 브루스 나우만, 루이스 부르주아 등 현대 작가의 작품까지 아우르는데, 특히 판화 컬렉션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작품이 포함됐다.
SMK는 1960년대 들어 대대적인 내부 공사를 벌인 끝에 전시 공간이 2배로 커졌다. 1998년에는 기존 건물 뒤에 평행하게 현대식 건물을 지어 두 건물을연결했다. 두 건물 사이는 유리천장을 덮어 커다란 복도를 만들고 이를 실내 조각공원과 각종 행사 공간으로 활용한다. 뒷 건물의 바깥은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이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덴마크 작가가 별로 없어 덴마크의 미술관은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SMK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SMK에 가 보니 동시대 외국인 작가들의 작품이 풍부했다. 이곳엔 특히 마티스의 작품이 많다. 알고 보니 엔지니어 출신 정치가 요하네스 럼프(Johannes Rump·1861~1932)의 각별한 미술 사랑 덕분이었다. 럼프는 인상파 이후의 프랑스 작품을 대량 수집해 215점을 SMK에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 마티스 작품이 25점이나 있었다.
퇴짜 맞자 큐레이터에게 SOS
럼프는 1923년 SMK에 작품 기증을 제안했다. 그런데 당시 SMK 관장은 “럼프가 수집한 작품 수준이 별로…”라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럼프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전문 큐레이터 레오 스웨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웨인은 마티스에 집중하도록 조언했고 럼프는 그에 따랐다. 마침내 새 관장이 들어선 뒤인 1928년에야 SMK는 럼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럼프의 공익정신과 인내심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이후 SMK는 마티스의 소장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럼프가 기증한 마티스의 작품 중 ‘마티스 부인의 초상(녹색선의 초상화)’은 특히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905년 작품으로 마티스의 야수파 작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렸다. SMK는 마티스 자신을 그린 1906년작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자화상’도 소장하고 있다. 두 그림은 야수파의 시작을 알린다.
럼프는 1930년까지 계속해서 작품을 기증했다. 또한 부부가 재단을 만들어 미술관이 국제적인 동시대 작품을 수집하도록 지원했는데, 재단 활동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SMK는 작가의 헌신으로 세워진 미술관이기도 하다.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의 유언에 따라 1959년 놀데 작품이 SMK에 대량으로 들어왔다. 이에 따라 SMK는 놀데 재단 다음으로 많은 놀데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
놀데의 작품은 수백만 달러를 호가한다. 2012년 2월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선 ‘꽃동산(Blumengarten)’이 330만 달러(약 40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전 세계의 주요 미술관이 놀데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놀데는 독일 ‘다리파’ 회원으로 활동했고 나중에는 칸딘스키가 주도한 ‘청기사파’에도 참여한 독일의 아방가르드 화가다. 놀데는 독일 표현주의의 첫 세대이고 20세기 최고 작가로 평가받는 독일 모더니즘의 거장이다. 독일 북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의 지명인 ‘놀데(Nolde)’를 자신의 이름에 붙일 정도로 고향을 아꼈다. 그 땅이 덴마크 영토가 되자 덴마크까지 사랑했다.
화재, 전쟁의 ‘창조적 파괴’

놀데가 SMK에 기증한 1912년작 ‘아이와 큰새(Child and Large Bird)’는 그림자가 매우 어둡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에 전쟁의 그림자가 엄습하던 시기를 그렸다. 큰 괴물처럼 그려진 독수리는 독일을 상징하며 암흑, 죽음, 전쟁을 암시하고 아이는 이를 몰아내야 한다는 얘기가 담겼다. 아이는 희망이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미래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가 알 만한 덴마크 화가는 드물다. 덴마크는 유럽의 변방이고 예술 수준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덴마크의 바로 아래쪽에 있는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에서는 세계 미술사를 장식하는 쟁쟁한 화가를 수없이 배출했지만, 덴마크는 지리적 위치만큼 미술에서도 변방이었다.
그러나 이런 덴마크에도 문화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덴마크 예술의 황금기로 평가되는 1800~1850년에 걸출한 예술가들이 출현했다. 1794년 크리스천스보그 궁전 화재에 이어 크고 작은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됐는데, 이후 건설 붐이 일면서 예술 수요가 늘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파괴가 예술문화의 황금기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해야 하나.
이 시기를 거치며 SMK는 덴마크 화가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839년 SMK에 큐레이터로 온 유명 미술사학자 호옌은 “미술이야말로 국가의 자존심이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작품을 활발히 수집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덴마크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케르스베르크(C. W. Eckersberg·1783~1853)와 제자들의 작품을 다수 보유하게 됐다.
덴마크 회화의 아버지

에케르스베르크의 작품은 꼭 챙겨 봐야 할 SMK의 대표 소장품이다. SMK에 걸린 ‘로마 콜로세움 3층에서 아치 3개를 통해 내려다본 로마 시내 풍경(A View through Three of the Arches of the Third Storey of the Colosseum in Rome)’은 에케르스베르크의 화풍과 스타일을 짐작하게 한다. 로마에 체류 하던 1815~1816년, 크지 않은 화폭에 많은 대상을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매우 세밀하게 담아냈다. 특히 로마 시내의 유적을 많이 그렸다.
3개의 아치로 구분된 그림은 마치 별개의 그림 같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잘 연결된 하나의 그림이다. 콜로세움 아치의 벽돌들이 매우 세밀하고 가깝게 부각돼 아치가 그림의 주 대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시내 풍경은 아치의 배경 정도로 치부되지만, 그러기에는 풍경이 너무나 정성스럽게 그려졌다. 풍경은 망원경으로 살펴보며 그렸다고 한다.
인생의 수레바퀴

요른은 15세 때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 한평생 폐결핵으로 고생했다. 1951년에는 실크보그에서 요양생활을 했는데, 퇴원하면서 구상한 첫 주제가 바로 ‘The Wheel of Life’이다. 요양생활 중에 인생에 대해 깊이 고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크보그에 있는 요른 박물관은 대표작을 비롯해 요른의 작품이 가장 많이 소장된 곳이다.
우리는 생로병사라는 인생주기론(life cycle)이 불교사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중세 덴마크의 기독교에도 이런 사상이 있었고, 그것이 이 그림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림의 제목이 바로 생로병사를 의미한다. 출생해서 성인이 되어 태양이나 달과 같은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늙어가면서 시들고 끝내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죽음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라는 생각도 드러난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인생을 보는 관점은 비슷해 놀라웠다.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