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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간쑤성

굶주리고 목 졸린 서북의 늑대들

甘 中華의 끝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굶주리고 목 졸린 서북의 늑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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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쑤성은 중화(中華)의 끝이다. 천하의 경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자 모험이 시작되는 곳.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니 문화가 오가고 무역의 문이 열린다. 그러나 사막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극한의 생존 공간은 ‘서북의 늑대’ 목을 조른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지난 4월 사막지대인 간쑤(甘肅)성의 공기는 탐욕스러웠다. 젖은 수건을 걸어두면 순식간에 바싹 말랐다. 조금의 습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바싹 마르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버린 수건은 흡사 흡혈귀가 피 한 방울 안 남기고 빨아먹은 말라 비틀어진 시체 같았다.

정원에서 노트북을 펴놓으면 금세 노트북 화면에 ‘모래 코팅’이 입혀졌다. 매년 고비사막에서 일어난 황사는 광활한 대륙과 바다를 지나 한국과 일본을 덮친다. 2000km 떨어진 한국의 황사가 성가신 정도라면, 황사 발원지가 코앞인 간쑤성의 황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모래폭풍이 부는 명사산(鳴沙山)은 ‘모래가 우는 산’이란 뜻이다.

피부는 거칠어지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극도로 건조하니 마음도 황량해지고 생활도 피폐해진다. 나오느니 탄식뿐이요, 느는 건 한숨뿐이다. 낭만적인 시를 읊으며 기분을 전환해보려 해도 떠오르는 시는 간쑤성의 황량함을 한탄하는 시뿐이다.

“오랑캐의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봄이 오지 않는 것은 봄바람이 옥문관을 못 넘기 때문이라.”



중국에서 가는 곳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찬사를 늘어놓던 마르코 폴로조차 1년이나 머문 간쑤성의 성도 란저우(蘭州)를 “지저분한 도시”라고 짤막하게 평했다. 그때에도 간쑤성은 척박하고 황량했으리라.



천하의 경계가 끝나는 곳

간쑤성의 약칭은 ‘달 감(甘)’자다. 간쑤는 성 서쪽 끄트머리의 두 지역인 간저우(甘州)와 쑤저우(肅州)를 합친 이름이다. 현재 이 지역은 장예(張掖), 주취안(酒泉)으로 불린다. 이 곳이 ‘다디단(甘) 술 같은 샘물(酒泉)’이라니. 황량한 사막으로 뒤덮인 간쑤성의 자연환경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이름이다. 하지만 죽음의 사막에 둘러싸여 있기에 이 지역 사람들은 물의 고마움을 잘 안다. 수질과 상관없이 물만 있다면 그 자체로 다디단 감로수 같았으리라.

이곳이야말로 중화(中華)의 끝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양관(陽關) 밖에 나서면 아는 이 하나 없다”며 절절하게 막막함을 토로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비관하며 술에 취했다.

“취해서 모래밭에 누운 병사를 비웃지 말게. 예부터 몇 명이나 전쟁에서 돌아왔던가.”

그러나 한 세계의 끝은 다른 세계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곳을 나선 장건은 실크로드를 개척했고, 현장은 천축국에서 불경을 구했으며,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남겼다. 사막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간쑤성은 극도로 위험한 곳인 동시에 천하의 경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 열리며 모험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니 문화가 오가고 무역의 문이 열린다.

간쑤성 지형은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보통 한 영역은 중앙으로부터 고르게 세력이 퍼져 원 또는 사각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그러나 간쑤성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길고 가늘게 삐죽 튀어나왔다. 간쑤성은 왜 이처럼 독특한 영역을 갖게 됐을까. 간쑤성 동북방에는 내몽골 고원이 있고, 서남방에는 티베트 고원이 있다. 이 지역들은 오늘날 다 같은 중국 땅인 네이멍구(內蒙古)와 칭하이(靑海)성이지만, 예전에는 몽골족과 티베트족이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한 곳이다. 양대 고원 사이의 골짜기인 간쑤성은 두툼한 빵 사이에 끼인 치즈 한 장과 같은 땅이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간쑤성을 “호(胡, 몽골족)와 강(羌, 티베트족)이 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호전적인 유목민족 사이에 끼인 가냘픈 길.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지는 길. 폭이 좁고 긴 간쑤성은 생긴 모양대로 ‘길’이다. 동서로는 중국과 서역을 잇고, 남북으로 몽골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이 길은 ‘황하의 서쪽에 있는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 불렸고, 중세 시대 세계 최고의 교역로인 실크로드였다.



묵특선우와 유방

중원의 황토 고원은 간쑤성에 이르러 사막이 된다. 그러나 평균해발 4000m, 길이 2000km인 기련(祁連)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린 물은 간쑤성 군데군데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우웨이(武威), 장예, 주취안, 안시(安西), 둔황(敦煌) 등 간쑤성의 대표적인 5개 도시는 모두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이 도시들은 걸어서 닷새 거리마다 놓여 있어, 기나긴 간쑤성을 지날 수 있게 해줬다. 길고 긴 사막길에 점점이 놓인 5개의 오아시스 도시는 고달픈 나그네의 생명을 구원해주는 진주 목걸이였다.

간쑤성은 서역, 중국, 티베트, 몽골 등 다양한 세력과 접하지만, 동시에 어느 나라에서 봐도 중앙으로부터 먼 변방이었다. 광활한 사막으로 둘러싸였고 독자적 생활이 가능한 오아시스가 있어 폐쇄적인가 하면, 활발하게 무역할 수 있는 개방성이 공존한다. 따라서 간쑤는 어느 한 나라가 강해지면 그 나라에 예속됐고, 사방이 혼란해지면 독립적인 소국이 됐다. 간쑤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패권국이 어디인지 가르쳐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중앙아시아를 정탐하는 안테나였다.

중국 북방에는 여러 유목민이 살았고, 간쑤성 일대는 흉노와 월지 사이 지역이었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뒤 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몽염 장군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군을 격파한 뒤 만리장성을 세웠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으며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져들 때 흉노에선 묵특선우(冒頓單于)라는 영걸(英傑)이 등장했다. 묵특은 동으로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서쪽의 월지(月氏)를 제압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마침내 천하를 재통일했지만, 당시 중국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흉노는 쇠약한 한나라 변경을 마음껏 휘저었다. 흉노의 기세를 꺾기 위해 황제 유방이 친정(親征)했으나, 천하를 통일한 유방조차 흉노의 40만 대군에 7일이나 포위돼 북방 동토(凍土)에서 얼어 죽을 뻔했다. 기고만장한 묵특은 훗날 유방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음담패설을 버젓이 국서로 보냈다. 이런 치욕을 겪고도 한나라는 자그마치 90여 년이나 힘을 기르고 나서야 흉노를 상대할 수 있게 됐다.

한무제는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장건을 대월지에 사신으로 파견해 흉노를 양면에서 협공하고자 했으며, 위청, 곽거병, 이광 등 많은 명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마침내 기원전 121년 곽거병이 간쑤 일대 하서주랑을 장악하고 오늘날 몽골공화국 지역까지 흉노를 추격해 토벌했다.


‘대탐험가’ 장건

곽거병의 하서주랑 장악은 한과 흉노의 성쇠를 갈랐다. 하서주랑은 유목민인 흉노가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던 지역이었고, 동서남북 여러 민족과 장사할 수 있는 무역로였다. 또한 연지산(燕支山)은 특산물인 연지(홍화꽃을 원료로 한 화장품)를 생산하고, 기련산은 목축을 할 수 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서주랑을 빼앗긴 흉노는 비탄에 젖어 노래했다. “연지산을 빼앗겼으니 우리네 여자들의 고운 빛이 사라지겠구나. 기련산을 빼앗겼으니 육축(六畜, 말·소·양·닭·개·돼지)을 기를 수 없게 됐구나.”

한무제의 흉노 토벌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대탐험가 장건이다. 대월지 사신으로 파견된 장건은 흉노에 10년이나 붙잡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대월지에 도착했다. 원래 목적인 대월지와 흉노의 협공은 끌어내지 못했지만, 장건의 서역 탐험은 의외의 성과를 가져다 줬다.

장건은 중앙아시아 일대의 여러 나라를 방문해 각국의 외교·교역관계와 특산물 정보를 수집했고,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잇는 초원 실크로드, 간쑤성과 서역을 잇는 사막 실크로드 외에도 쓰촨-윈난-버마-인도로 가는 서남 실크로드를 탐색했다. 장건의 정보 덕분에 중국은 외교관계가 다양해지고 무역로를 확충했으며, 변방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군대 보급은 흉노 정벌에서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장건은 실크로드 주변의 물과 풀이 있는 지역과 보급을 얻을 수 있는 국가를 잘 파악해 대군의 원정을 수월하게 해줬다. 덕분에 일개 궁중 경호대장이던 장건은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져 제후 반열에 올랐다. ‘박망’은 ‘견문이 넓고 널리 바라본다’는 뜻으로, 장건의 넓은 시야를 찬미하는 이름이다.

장건은 대원국에 한혈마(汗血馬, 하루에 1000리를 달리고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는 전설의 말)가 있다고 보고해 한무제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한무제는 말과 같은 크기의 금 조각상을 주고 한혈마를 사려 했지만, 대원국은 이를 무시하고 사신을 죽였다. 격분한 한무제는 1차 원정군으로 수만 명의 병사와 6000명의 기병을 보냈고, 2차 원정군으로 6만 병사, 말 3만 마리, 소 10만 마리, 낙타 1만 마리를 파견했다. 엄청난 대군을 파견한 데 비해 전리품은 준마 10여 마리, 말 3000마리에 불과했지만, 대규모 원정은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 서쪽 가장 먼 변방인 간쑤성은 중요한 원정 근거지가 됐다. 수만 병사와 수십만 마리의 소·말·낙타가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되자 간쑤성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급격히 팽창했다.



한족과 이민족의 동거

동양과 서역의 중계지인 간쑤가 성장하면서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옥문관(玉門關)이란 이름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문자 그대로 ‘서역의 옥이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서역의 옥, 아라비아의 향료, 로마의 유리 그릇, 중국의 비단이 옥문관을 오갔다. 간쑤를 거쳐 들어온 천리마가 간쑤의 상징이 되면서 서역은 상상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 잔뜩 있는 곳이라는 로망이 생겼다. 포도, 석류, 깨, 후추, 오이, 마늘 등 외래 작물과 비파, 하프 등 서역 문물이 간쑤를 통해 들어왔다.

한무제가 강역을 넓히고 흉노가 약해지긴 했어도 유목민족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간쑤에서 한나라와 유목민의 힘겨루기는 계속됐다. 그 결과 서량(西凉)의 군인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과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강인함으로 한나라 정예 병력이 됐다. 머나먼 변방이라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 서량의 군인들은 쉽게 독립 군벌이 될 수 있었다. 동탁, 마등, 마초, 한수 등이 서량을 근거지로 활약한 군벌들이다.

이들 군벌은 한족과 이민족이 어울려 살던 간쑤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탁은 농사를 짓고 있을 때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그자리에서 밭을 갈던 소를 잡아 대접했다. 이에 감동한 강족은 동탁에서 가축 1000마리를 선물했다. 또한 서량 태수 마등의 아버지 마평은 집이 가난해 아내를 얻지 못하자 강족 여자를 아내로 맞아 마등을 낳았으니, 마등은 한족과 강족의 혼혈아다. 마등의 아들 마초가 조조를 상대로 두 차례나 대규모로 거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집안 환경 덕분에 강족, 저족(氐族, 티베트계 유목민) 등 유목민의 습속과 문화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서량을 장악하려면 한족뿐만 아니라 현지 유목민족들 역시 잘 이해하고 포섭할 수 있어야 했다.

서량 군벌의 힘은 대단했다. 후한 말 실권을 쥔 동탁은 18로 제후 연합군이 모두 달려들었어도 끝내 버텨냈고, 당대 제일의 군략가 조조는 마초에게 여러 번 위기에 몰리자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서 묻힐 땅이 없겠구나” 하고 탄식할 정도였다.  


제갈량의 恨, 읍참마속의 땅

제갈량이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에 나섰을 때, 간쑤는 핵심적 작전 지역이었다. 북벌의 궁극적인 목표는 장안과 낙양을 차지해 중원을 제압하는 것이었지만, 촉이 형주를 잃은 후 낙양으로 갈 방법은 없었다. 장안은 천하제일 방어성인 데다 서량의 조진과 형주의 사마의가 양쪽에서 보좌했다. 제갈량은 일단 서량부터 차지해 한 날개를 꺾어버리고 장안을 공략해 중원의 목줄기를 죄어가는 전략을 세웠다.

마침 위나라와 서량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위는 서량을 군사 거점과 물자 기지로만 봤고, 서량인에 대한 처우도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위에 불만이 많은 서량인을 포섭하면서 신속하게 진군하자 천수 태수 마준은 현지 백성을 못 믿고 도망쳤다. 제갈량의 첫 북벌은 ‘임팩트’가 컸다. 천수, 남안, 안정의 3군(郡)이 호응하며 중원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제갈량의 군대는 가정(街亭)에 이르렀다. 가정은 남안, 천수, 안정 중심에 있으며 농서, 장안, 서량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길목 하나만 차지하면 위의 대군을 쉽게 방어하는 한편, 촉군은 수십 갈래 장안 공략 루트가 생겨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 방어의 책임자 마속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마속은 제갈량이 신뢰하던 유망주로 나름대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병법서를 어설프게 읽고선 길목을 지키지 않고 산 위에 영채를 지었다. 위의 맹장 장합은 노련했다. 마속을 직접 치지 않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을 끊자 마속군은 기아와 갈증으로 자멸했다.

가정을 잃자 승승장구하던 제갈량의 북벌은 어이없게 물거품이 됐다. 애초에 물량 면에서 촉은 위의 상대가 못 됐다. 촉은 예상치 못한 속도로 위를 치고 연달아 허를 찔러야 서량과 장안을 ‘접수’할 수 있었다. 간쑤와 산시(陝西), 두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해야 위와 붙어볼 만했다. 그 전에 기습이 실패한다면 소모전이 되고,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위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판세를 뒤집을 뻔한 북벌이 실패하자 제갈량은 울면서 아끼던 마속의 목을 쳤다(泣斬馬謖). 쓰촨과 산시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간쑤는 제갈량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의 진면목

외국 문물 전파에서 종교를 빼놓을 수 없다. 간쑤는 중국에 불교와의 인연을 맺어준 길이다. 간쑤를 통해 불교는 동아시아로 퍼질 수 있었고, 현장과 혜초는 구법여행(求法旅行)을 할 수 있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소설 ‘서유기’ 덕분에 친숙하다. 작품 속에서 현장은 매우 덕망이 높은 고승으로 나오지만, 정작 독자에게는 와 닿지 않는다. 저팔계 말만 믿고 손오공을 꾸짖으며 내쫓기도 했으니 지혜롭지도 않고, 싸우는 손오공과 저팔계를 제대로 중재하지도 못하고, 위기에 빠지면 “얘들아, 이걸 어쩌면 좋으니” 하며 울기만 하니 무능해 보이기도 한다. 매번 요괴에게 납치돼 손오공 등 제자가 구하러 가야 하는 ‘민폐 덩어리’다.

‘서유기’는 주인공 손오공을 띄워주기 위해 현장을 깎아내렸다. 실제 현장은 만능의 천재다. 현장의 별호인 삼장법사(三藏法師)는 부처의 가르침인 경장(經藏), 그 주석을 모은 논장(論藏), 교단의 생활규칙과 계율을 모은 율장(律藏) 3가지에 모두 통달한 자라는 뜻이다. 현장은 젊은 나이에 ‘석문(釋門)의 천리마’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유망주였다.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사막을 횡단해 ‘생존술 전문가’ 베어 그릴스 못지않은 생존력을 과시했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중국에서 인도까지 왕복한 대모험가다. 더욱이 어학의 천재여서, 인도에서 수집한 불경 75부 1335권을 번역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중세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정치외교,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빼어난 보고서다.

‘서유기’에서는 현장은 당태종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인정받고 환송을 받으며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떠난다. 중국 안에서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여행했지만, 국경 밖을 나서자마자 온갖 기기묘묘한 사건을 만난다.

실제 역사는 정반대다. 28세 청년 현장은 당시 불교계의 유망주이긴 했지만, 큰 영향력은 없었고, 당태종을 만난 적도 없다. 중국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지명수배를 피하며 이동하다가 사막에서 죽을 뻔했다. 오히려 중국을 벗어나자 외국에서 온 고승으로 대접받으며 비교적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개국 초기 당나라는 몸을 추슬러야 하는 단계였다. 당은 귀중한 노동력이자 병력인 인구의 이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게다가 간쑤 주변은 토번·돌궐과 대립하는 상당한 긴장이 감돌고 있어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더욱 허용되지 않았다.



唐 서역 공략 도운 求法여행

현장은 동료 승려들과 함께 천축에 가서 불경을 얻어오겠다는 탄원서를 올렸지만, 조정에서는 출국금지 입장을 고수했다. 모든 이가 포기했을 때, 현장만큼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현장은 나라에서 안 보내준다면 몰래 나가겠다며 밀출국을 계획했다. 현장은 불법(佛法)을 위해서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 만큼 대담한 사내였다.

현장은 일단 서량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불경을 설법했다. 서량에는 서역 상인이 많아 설법을 하면서 돈도 벌고 서역에 대한 정보도 얻고 서역어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현장이 인도 여행을 꾀한다는 소문을 들은 서량 태수 이대량은 현장에게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간쑤엔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곳답게 불심이 깊은 사람이 많았다. 현장의 천축행을 도와주는 간쑤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서량의 고승 혜위법사는 현장에게 길잡이를 붙여줬고, 과주의 향리 이창은 현장의 지명수배서를 찢었으며, 옥문관의 경비대장들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줘 현장의 도망을 도왔다.

국경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고비는 막하연적 사막 횡단이었다. 막하연적은 현장의 표현대로 “하늘에 나는 새가 없고, 땅에 달리는 짐승도 없는(上無飛鳥 下無走獸)” 죽음의 사막이었다. “사방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내 그림자 하나뿐(顧影唯一)”이었다. 실수로 물을 사막에 엎지르자 현장은 “천리 길에 써야 할 밑천이 하루아침에 바닥났다”며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사막의 날씨와 환경은 변화무쌍했다.

“밤만 되면 온갖 도깨비와 요괴들이 횃불을 치켜들어 그 찬란하기가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과 같고, 한낮이면 사나운 폭풍이 모래를 휩쓸어 올려 소나기 퍼붓듯 휘몰아쳤다.”

극단적인 피로와 배고픔, 갈증, 긴장으로 별안간 한 무리의 군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환각증세에 시달렸다. 이 모든 것은 요괴와 마귀의 장난으로 여겨졌다. 하늘의 뜻인지 현장은 기적적으로 사막을 횡단해 무사히 중국 밖으로 나왔다. 현장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가면서 많은 나라와 사람을 만났다. 현장이 모험하며 겪은 혹독하고 이질적인 환경,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와 사람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는 ‘서유기’의 모티프가 됐다.

현장의 가장 큰 공헌은 불경 번역·해석 작업이지만, 당나라가 국력을 떨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공헌했다. 장건의 정보가 한무제의 흉노·대완 원정과 실크로드 개척을 도왔듯,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당태종의 서역 공략을 도왔다. 현장의 구법여행은 ‘장건도 전하지 못하고, 반고와 사마천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큰 위업이었다.


강희제의 ‘최후 토벌’

당나라 말기부터 간쑤엔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 주변 민족들이 발호하며 티베트의 토번, 탕구트의 서하, 몽골족의 원나라가 간쑤를 차지했다. 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졌을 때에는 토착 호족들이 거의 독립적으로 간쑤를 지배했다. 특히 9세기 중엽에서 11세기 초는 당제국이 붕괴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이 일어났으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요·금·원·서하·토번 등 수많은 유목민족이 각축을 벌인 파란의 시대였다. 이 시기 둔황에서는 토착 호족인 장씨와 조씨, 두 가문의 소왕국이 미묘한 세력 균형을 잘 활용해서 200년 동안 살아남았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했지만 간쑤성에 대한 영향력은 전만 못했다. 명대의 간쑤 영역은 서부 끝의 옥문관에서 중부의 가욕관으로 크게 줄었고, 둔황 방어에 몽골족 일파를 활용하는 등 지배력이 현저히 줄었다. 더욱이 투르판이 침입해 약탈을 일삼자 1524년 명은 가욕관을 폐쇄하고 동서 교통을 차단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투르판의 동진을 막지 못해 간쑤성은 16~18세기 ‘투르판 지배기’를 맞았다. 청나라 강희제가 숙적 몽골의 준가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간쑤를 석권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며 중국의 간쑤성 지배는 비로소 안정됐다. 이민족에게 위협받던 간쑤는 결국 이민족인 만주족 황제에 의해 안정을 찾았다.

간쑤성은 뜨겁고 건조한 열사(熱沙)의 땅이다. 사람이 살기에 혹독한 날씨이지만, 그 덕분에 간쑤의 멜론, 수박 등 과일은 달콤하기로 유명하다. 뜨겁고 건조한 날씨가 과일의 수분을 날려 당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쑤의 날씨는 의외의 소득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 부산물 중에선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3대 석굴 중 하나인 둔황 막고굴 역시 혹독한 환경이 피워낸 꽃이다. 둔황은 중앙아시아로 가는 북도(北道)와 인도로 가는 남도(南道)가 만나는 곳으로, 중국을 오가는 모든 여행자는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둔황을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지나야 한다.


“서북풍을 마신다(喝西北風)”

승려 낙준은 상인, 여행자들의 불안, 공포를 잘 이용했다. 낙준은 석굴을 아름답게 꾸며 부처님께 봉헌하면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극도의 공포심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싶은 게 인간이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이가 막고굴에 석굴사원을 지어 봉헌했다. 그 결과 735개의 동굴, 1만3600여 평의 벽화, 2415개의 채색 조각상을 가진 막고굴이 탄생했다.

둔황 막고굴은 석굴사원으로만 끝나지 않고 문서보관소 기능도 했다. 이것 또한 간쑤의 날씨가 가져온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습기, 곰팡이 등으로 손상되기 쉽다. 그러나 건조한 간쑤에서는 문화재가 잘 썩지 않아 모래에 묻힌 문화재가 모래를 털기만 해도 원래의 자태를 자랑한다. 중국 내륙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문서들이 간쑤에서는 무더기로 출토된다.

특히 막고굴의 제17호 동굴은 ‘문서가 묻힌 동굴’이라는 뜻으로 장경동(藏經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출토된 4만여 건의 문서는 ‘둔황문서’로 불리며, 중세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됐다. 이 문서들만을 연구하는 ‘둔황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생길 정도다.

이처럼 간쑤는 다디단 과일과 화려한 문화를 지녔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고 열악하다. 중국어로 ‘서북풍을 마신다(喝西北風)’는 말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린다’ ‘고생한다’는 뜻이다.

변방 간쑤의 잦은 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일본 사학자 니시무라 겐유는 둔황 6향의 문서를 검토한 뒤, 모든 장정(壯丁) 중 약 70%가 병역 복무자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간쑤성에서 널리 읽힌 시를 보면 민초들의 고초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16세에 부역을 하고, 20세에 부병에 충당된다. (…) 장군은 말 위에서 죽고, 병사는 땅의 군영에서 죽는다. 피는 널리 황야에 흐르고, 백골은 변경에 있다.”

병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생활은 궁핍했다.

“빈궁한 촌사람 (…) 지금 부부가 되어, 부인은 방아 찧는 일을 하고, 남편은 날품팔이 일을 한다. 황혼 무렵 집에 들어오면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다.”

아무리 국법이 지엄하다지만 이토록 험한 땅에 병사를 보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형수나 비행 청소년을 간쑤 지역 병사로 파견했다. 불량소년이 제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결국은 어린 소년이다. 변방의 사막까지 끌려와 모래 섞인 ‘짬밥’을 먹는 심정은  “14, 15세에 전장에 나가, 손에 장창을 들고 머리를 떨궈 눈물을 흘리고 후회하며 배를 채운다”는 시에 잘 드러난다.

마초가 조조를 급습해 거의 죽일 뻔했을 때, 보급품을 관리하던 교위 정비는 소와 말을 서량군에게 풀었다. 가난한 서량 병사들이 소와 말을 한 마리라도 챙기려고 난리가 난 틈을 타 조조는 위기를 간신히 벗어났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강하지만 오합지졸 같던 서량군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편 가난했던 간쑤의 일면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불법 금 채취

중국인은 북방인을 가리켜 “동북의 호랑이, 서북의 늑대”라고 말한다. 늑대는 호랑이의 위풍은 없어도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생존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간쑤인의 삶은 어떨까. 간쑤성의 면적은 45만4000km²로 남한의 4.5배나 되지만, 70%가 사막과 고원지대다. 인구는 2600여만 명. 2015년 간쑤성의 1인당 명목 GDP는 4201달러로 중국에서 가장 낮다.

가난한 만큼 많은 간쑤인이 외지로 나가 일한다. 행동반경이 넓은 ‘늑대’답게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불법으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가나 정부는 불법 금 채취 협의로 2012년 101명, 2013년 124명의 중국인을 체포했다. 2005년부터 중국인들이 가나에서 불법 금 채굴을 시작해 2013년 당시에는 5만여 명의 중국인이 수천 개의 금광을 개발하고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간쑤인이었다. 중국인답게 통도 커서 가나의 연간 금 채굴량 98t의 4분의 1에 달하는 24t의 금을 채굴했다. 많은 중국인이 불법 입국해서 무차별로 개발하는 바람에 하천이 오염되고 환경이 파괴됐으며, 조직폭력배와 결탁하는 바람에 치안까지 악화돼 가나의 골칫거리가 됐다.

간쑤성에서 ‘가난 탈출’은 지상과제다. 간쑤인들은 일대일로(一帶一路) 바람을 타고 21세기 신(新)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돼 물류와 관광업 등 서비스업이 활성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미래가 썩 밝아 보이진 않는다. 창양쉬(長楊恕) 란저우대 중앙아시아연구소장은 이렇게 단언했다.

“간쑤성은 서쪽으로는 신장(新疆)보다 못하고, 동쪽으로는 산시(陝西)보다 못한 조건을  갖고 있어 황금지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북의 늑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 동안 악전고투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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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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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고 목 졸린 서북의 늑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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