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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에게 ‘추억’을 판다

서울 동대문 의류시장

  • 김다혜 객원기자 | happyemilee2@daum.net

외국인 관광객에게 ‘추억’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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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대문시장엔 외국인 관광객도 많지만 이곳을 일터 삼아 새벽까지 일하는 꿈 많은 젊은이도 많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요즘 뭐하며 지내?”라는 물음에 “그냥 동대문 옷가게서 일해”라고 답하는 여성을 흔히 접할 수 있다. 동대문시장 옷가게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온종일 동대문을 밝히던 대형 상가의 화려한 불빛은 새벽 5시께가 돼야 꺼진다. 언제나 인파로 북적일 것 같던 상가도 잠시 쉬는 시간을 맞는 것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앞 버스 정류장과 거리는 귀가를 서두르는 이들로 붐빈다.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는 2014년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파크’(DDP)를 중심으로 구성된 클러스터다. 이 특구 협의회에 따르면, 이곳의 하루 유동인구는 웬만한 대도시 인구와 맞먹는 150만 명 규모다. 외국인 방문객도 연간 500만 명에 달한다. 연 매출액은 15조 원 정도로 추정된다. 대형 상가는 30여 곳인데, 여기엔 재래시장 10곳, 신흥 도매상가 13곳, 복합 쇼핑몰이 8곳 포함돼 있다. 전체 점포 수는 약 3만 개, 종사자는 약 10만 명에 달한다.



점포가 직접 공장 운영

‘동대문시장에서 옷 장사 한다’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겠지만, 매우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이곳에서 파는 물건은 무척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원단, 의류, 액세서리 품목이 가장 많다. 동대문 패션 클러스터는 명품 브랜드를 베끼는 곳으로 비하되던 과거와 달리, 참신하고 세련된 상품을 만드는 디자이너 양성소로 인식되는 추세다.

특히 이곳이 ‘패션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작에서 판매까지 모든 공정이 한 번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에다 심지어 반려동물의 옷까지 없는 것이 없다. 같은 사람이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소매로 파느냐 도매로 파느냐에 따라 운영방식도 다르다.



모피와 가죽 옷을 도매로 파는 점포에서 일해본 필자도 동대문 옷가게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바빠 같은 상가의 다른 층조차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다. 다른 쇼핑몰은 늘 불 꺼진 모습만 본다. 재료상이 아닌 이상 운영시간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일한 상점이 위치한 광희시장은 모피와 가죽옷으로 유명하다. 특히 6층 건물 중 최고층 한 층의 모든 상가는 아웃렛(outlet, 전문매장) 형태로 모피를 판다. 이 건물은 다른 고층 건물에 가려져 눈에 잘 띄는 편은 아니지만, 모피 점포들이 30년 이상 같은 자리를 지키다 보니 많은 소매상인이 찾아온다. 백화점, 개인 옷가게, 인터넷 쇼핑몰 등 옷을 가져가는 곳도 다양하다. 현장에서 옷을 입어볼 수 있으며 한 벌도 판다. 호객행위는 없다. 손님에게 “저 집에선 얼마에 팔더냐”는 식으로 다른 점포의 상품 가격을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자 점포 간의 매너다.

이곳 점포의 사장들과 점원들은 일반적인 여성복 매장 인력보다 평균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20대 중반인 필자가 여기선 가장 어린 축에 들었다. 모피나 가죽옷은 고가라 소비자 연령도 높은 편. 아무래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고 경험도 풍부한 사장이나 점원이 손님을 잘 설득하는 듯했다.  

모피 점포들은 디자인 개발과 재투자에 과감하다. 옷가게에서 디자인을 연구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점포마다 고유한 분위기와 스타일을 지키면서 유행을 따라가려 노력한다. 이곳의 한 상인(여·32)은 “대부분의 점포가 옷 제작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팔 수 있다. 주문 제작과 디자인 피드백이 쉽다는 것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6층 ‘공용어’는 일본어

모피 가게의 방문객은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다. 일본인의 비율이 가장 높다. 요즘은 중국인 관광객이 늘고 일본인 관광객이 줄었다지만 동대문 모피 가게는 예외다. 모피 점포가 밀집한 6층엔 엔화-원화 환전상이 매일 돌아다닐 정도다.

모피 점포 중 상당수는 가죽옷과 무스탕 옷도 파는데, 특히 일본인에게 인기가 많다. 따라서 점포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일하려면 일본어는 필수다. 일본인 손님은 대개 한국어나 영어를 못하고 일본어만 쓴다. 이 때문에 6층에선 “어서오세요”라는 말보다 “곰방와”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6층 공용어는 일본어인 셈이다.

일본에서 20년 거주한 광희시장 선일사 점장 조남신(58) 씨는 “단골 중 90% 이상이 일본인”이라며 “일본인 손님들은 한번 유대관계를 맺으면 다시 찾는 비율이 높다”고 전했다. 조씨는 일본인이 유달리 모피 점포를 많이 찾는 이유로 “일본엔 모피 시장이 없다. 처음엔 서울에서 모피를 사러 이태원, 남대문을 다니다 TV, 잡지, 입소문을 통해 동대문으로 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어 모피 의류 수요가 늘어난 데다 엔화 가치가 높아진 점도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점포에서 아무리 많은 옷을 입어보더라도 원하는 디자인과 색상이 없으면 사지 않는다.

모피 층에는 ‘취직 안 되면 동대문에서 옷 장사라도 하지’라는 생각으로 입점한 사람이 드물다. 디자인 개발에만 평균 수개월이 걸린다. 사업에 막 뛰어든 사람은 디자인이 확정돼도 이를 옷으로 만들어줄 공장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는 사람의 추천 없이는 한 달 이상 걸리기 일쑤라고 한다.



사업 장벽도 높은 편이다. 작은 규모의 가게일지라도 고가의 제품이라는 특성상 초기 비용이 많이 든다. 5㎡(약 1.5평)의 매장을 운영하려면 가죽옷을 갖추는 데 3000만 원 정도, 모피옷을 갖추는 데 60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

돈이 있어도 점포를 얻기가 쉽지 않다. 공실이 나올 때까지 최소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특기할 것은, 자기 돈으로 점포를 얻는 데 동료 상인들의 심사까지 받아야 하는 점이다. 점포 모집공고가 나오면 제품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상인회에 제출해야 하고 심사에 통과해야 가게를 열 수 있다. 상인회 측은 “물건의 질뿐만 아니라 제품을 어디서 만드는지 등도 살펴본다”고 했다.  

지난여름 심사에 통과해 창업한 두 점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 곳은 20대 여성이, 다른 한 곳은 30대 남성이 사장이다. 두 곳 모두 가죽 전문점으로 시작했으며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공 들인 디자인 카피당하면…

제인도의 사장 김나영(29) 씨는 다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2016년 1월부터 매장 오픈을 준비했다.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했지만 오프라인 매장 없이는 인터넷 쇼핑몰을 계속 끌고 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인터넷 쇼핑몰은 지인에게 넘겼다. 김씨는 좋은 디자인을 연구하기 위해 파리와 밀라노를 다녀왔다. 확인하고 싶은 브랜드들을 미리 정해놓고 갔다.

“기성복이 아닌 컬렉션(collection, 패션 메이커가 시즌 끝에 발표하는 작품들) 쇼피스(showpiece, 대표작)를 입어보고 왔다. 한국에는 없는 제품이 많아 디자인 개발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평소 인터넷으로도 유럽의 패션 동향을 따라잡는다. 컬러 감각과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브랜드들을 두루 참고한다.”

의류 디자인은 김씨의 대학 전공과 관련이 없다. 하지만 하고 싶던 일이기에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열정을 쏟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새벽 5시에 영업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인 뒤 오전 중 집을 나선다. 신제품을 제때 출시하려면 제작공장에 가서 이것저것 점검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디자인 출시 때 가장 예민해진다고 한다.

“수개월간 공을 들인 디자인을 누군가가 베끼면 힘이 빠진다. 매장을 찾은 손님들이 마침내 자기가 원하던 옷을 발견해 좋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모든 고생을 잊게 된다.”

레더홀릭 사장 안창호(37) 씨는 가죽제품만 17년째 다뤄온 베테랑이다. 5년 전 광희시장에 입점했으나 연거푸 디자인 카피를 당해 가게를 정리했다. 안씨는 수개월 단위로 새 제품을 제작해 두 가지 색상 정도로 개시하곤 했다. 디자인은 반응이 좋았고 잘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 상점에서 훨씬 다양한 색상으로 똑같은 옷을 판매하더라는 것이다. 안씨는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변했지만 과거엔 디자인을 서로 베끼는 일이 빈번해 갈등을 빚곤 했다”고 했다. 디자인을 등록하면 베끼기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등록 절차에 수개월이 걸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아이디어는 자본력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광희시장 사람들은 “가죽시장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탄탄한 자본력을 기반으로 물건과 거래처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선점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안씨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디자인과 서비스 수준의 향상을 꾀했다고 한다. 젊은 감각이 녹아든 디자인, 소매가게에 온 듯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적극 활용한다고 한다.

“G마켓보다 내가 먼저 쇼핑몰을 운영했기에 SNS 쪽엔 노하우가 있다. 현재 블로그, 쇼핑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신상마켓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그에게 SNS는 거래시장을 전 세계로 넓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오픈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그의 가게엔 일본, 호주, 러시아, 대만, 몽골 등지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소셜미디어로 이 가게 상품들을 먼저 접한 뒤 한국을 방문하는 길에 들르는 것이다. 안씨는 인기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을 보면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20년 전 길거리 오락게임에 등장한 옷들이 최근에 유행하는 경우도 있다. 디자인 연구는 실생활과 멀지 않다.”  



어머니와의 여행 추억 

광희시장 6층은 동대문 옷가게의 전형적 양상을 띤다. 시장과 쇼핑몰의 중간지점에 서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늘 ‘페어플레이’가 펼쳐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열정과 실력, 노력을 다하면 그만큼 보상을 받는다.

필자는 이곳 모피와 가죽옷을 파는 점포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일본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일본인 여성 고객들과 대화하면서 고가의 모피를 곧잘 팔았다. 점포 사장은 “일을 빨리 배운다”면서 필자를 대견스러워했다. 많은 일본인 손님과 진심을 나눌 수 있었다. 손님들은 종종 작은 선물을 챙겨오기도 했다.

한 손님은 간암 말기 어머니를 간병하다 딱 하루 휴가를 얻어 서울에 왔다고 했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무스탕을 파는 이 가게였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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