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존슨 지음,
고혜경·이정규 옮김,
동연, 2012.
내가 자주 꾸는 꿈의 패턴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에 실패하는 이야기다. 꿈속에서의 나는 20대로 자주 돌아간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데 갑자기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거대한 홍수가 나서 길가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엄청난 홍수가 나서 버스도 다니지 못하는데, 나는 길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걸어서라도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려 애를 쓴다. 꿈속에서도 나는 홍수 탓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는데도, 그런 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픈 상처를 남긴 채 행복한 아침을 방해한다.
이렇게 간절한 목적지에 이르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는 내 꿈의 단골 레퍼토리다.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의 ‘내면작업’은 이 같은 꿈 이야기 속에서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비전을 발견하기를 촉구한다. ‘그건 그냥 개꿈이야,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꿈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꿈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도움을 주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다. 존슨의 책에 따르면 꿈은 우리에게 ‘상징의 언어’를 통해 말을 건다.
예컨대 꿈에서 가족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면, 다음 날 가족들을 조심시킬 것이 아니라 ‘가족의 교통사고’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이 어떤 간절한 메시지를 보내려 하는지 알아내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꿈은 인간관계에 큰 문제가 생겼음을 뜻할 수도 있고, 자기 안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꿈의 해석을 의사나 정신분석 전문가의 손에 맡기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오히려 타인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결국 ‘내 꿈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이라는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무의식은 의식이 억압하거나 내버린 것들이 모여 사는 내면의 쓰레기하치장이 아니다. 의식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무의식은 토양이다. 무의식의 토양에서는 모든 종류의 정신적 자양분이 잠재돼 있다. 또한 의식의 핸들을 잡은 우리 자신이 어떤 정신의 씨앗을 뿌리는지에 따라 ‘의식’이라는 나무의 종류와 성장 정도가 결정되곤 한다.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장소에 가보는 것 모두가 ‘의식의 씨앗’이다.
무의식에 접근하는 길
우리가 무의식의 메시지, 즉 꿈의 이야기를 등한시할 때 ‘무의식과 교감하고 대화할 통로’는 차단된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이사를 하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것 같은 ‘커다란 외부적 사건’에 꿈을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길흉화복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인생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바라보고,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꿈이라는 정신의 지형도를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의식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한 지원군을 갖게 된다.인간의 의식은 무의식의 원질에서 출발해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무의식의 내용물들이 쉼 없이 올라와 의식 성장의 자양분이 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 전체 과정을 거치며 추구해온 바가 있다. 무의식에 있는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의식이 비로소 온전한 자기를 전체적으로 반영할 때까지 꾸준히 진행되어야만 한다.
-로버트 존슨, ‘내면작업’ 중에서
존슨은 우리 내면의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길을 찾고자 ‘적극적 명상’을 추천한다. 적극적 명상은 내면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다양한 말에 의식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평소 취향이나 의지대로 무의식을 조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내면에서 어떤 뜻밖의 소리가 들려오든, 그 말을 그대로 들어주고, 대화하고, 그 메시지 자체를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내가 적극적 명상을 통해 얻은 나 자신의 무의식은 ‘거절하는 것에 서툰 나’를 증오하는 감정이다. 20대에는 정말 하기 싫은데도 거절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많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하고 싶어서 하는 일’보다는 ‘거절하지 못해서, 거절할 용기가 없어서’ 억지로 한 일이 더 많았다. ‘나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을까봐, 때로는 적당한 거절의 말을 찾지 못해, 때로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해 거절을 못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그 사람의 부탁을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거절하면 관계 자체가 깨질 것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 뒤, 오히려 나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 그 사람이 싫어져 결국 사이가 나빠진 적도 있다.
나 자신을 향한 경고
‘이제부터 하기 싫은 것은 정말 하지 말자’고 다짐한 뒤에도 타인의 부탁을 어색하게 거절한 뒤 후회와 번민으로 잠 못 이룬 적도 많다. 적극적 명상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바로 그 ‘거절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엄청나게 증오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증오하는지도 모르고 증오하고 있었다. ‘너는 거절조차 할 줄 몰라, 거절하지 못해 망가진 네 삶을 똑바로 봐라봐. 너는 진짜 네 자신이 되는 길을 잃어버리는 거야. 거절해도, 너는 변하지 않아. 오히려 거절을 통해 너 자신이 될 수 있어. 용감하게 거부해봐. 그래도 괜찮아.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나 자신에게 어느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나는 꿈속에서 길을 자주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고, 가끔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너무도 친근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낯선 사람을 만나 그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런 반가운 스승도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 꿈속에서는 전혀 모르는 장소, 얼굴도 모르는 사람, 예기치 못한 우연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꿈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왜 되지 않을까. 어쩌면 내 꿈에는 계획과 일정, 외부의 스케줄에 따라 살아가는 내 삶에 대한 경고가 담겼는지도 모른다. 너무 계획대로, 너무 일관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나,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마치 그런 계획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듯 생각하는 나 자신을 향한 경고가 담겼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길을 찾는 순간
이런 식으로 적극적 명상을 하다가 또 하나 얻은 깨달음이 있다. 나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식적으로는 무척 싫어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계획되지 않는 것, 뜻한 바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것, 의식적으로 기획한 것이 실패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면 그렇게 계획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뜻한 바를 성취하지 못함으로써, 즉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길, 또 다른 길을 찾는 순간이 많았다. 수십 년 동안 ‘내 길은 이 길이야’라고 확신했던 길을 아무 의심 없이 걷다가 문득 ‘이 길이 아닌 걸까’ 의심해보는 순간 그 의심은, 그 위기는, 길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은, 때로는 우리 인생을 바꾸는 커다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자아의 영역에서만 사는 삶은 대단히 부분적이다. 자아에 한정된 삶을 산다면 그 사람 내면에는 아직 살아내지 않은 채 묻혀 있는 거대한 삶이 마치 밀린 과제처럼 숨어 있다. 무엇을 성취했든 어떤 다양한 경험을 했든 상관없이 언제나 뭔가가 더 있다.
-로버트 존슨, ‘내면작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