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오스에 4년째 ‘야구 씨앗’ 뿌려
- “봉사하면 감사할 일도 늘어요”
- 고교선수 북돋우는 ‘이만수 포수상’ 제정
- “현장 복귀? 생각 없다면 거짓말”
지인은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와서 학생을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쳐줄 수 없겠느냐”고 청했다. 처음엔 거절했다. 라오스가 웬 말이냐 싶었으나 아내의 응원 덕분에 라오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야구 감독’에서 ‘야구 전도사’로 옷을 갈아입은 것. 규칙도 모르고, 장비도 없고, 야구장도 없는 곳에서 야구를 가르친다.
야구를 사랑하는 방법
이만수 이사장은 2016년 7월 라오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야구 활성화 공로를 인정받은 것. 불모지에 심은 ‘야구 씨앗’ 덕분에 100여 명의 라오스 아이들이 야구를 놀이 삼아 즐긴다. 초등학교 야구부 3팀이 창단됐다. 1월 5일 이만수 이사장을 인천 송도에서 만났다.▼ 라오스에 가기로 결심하는데 아내의 도움이 컸다면서요.
“아내가 아니었다면 가지 못했을 겁니다. 라오스에 사는 지인이 연락해 도와달라 했는데 결심이 서지를 않더군요. 아내가, SK 감독 시절 내가 그 지인에게 약속한 내용을 떠올리더라고요. 시간 될 때 꼭 라오스에 가서 야구를 가르쳐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항공권, 현지 숙소까지 다 예약한 다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열 계획이었는데 아내의 반응이 예상과 다른 거예요. 동유럽 여행 대신 라오스에 가라고 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여행은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재능기부는 때를 놓치면 하기 어려우니 라오스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공인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요. 결국 2014년 11월 12일 라오스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 부인이 봉사, 재능기부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베푸는 삶에 늘 관심을 가졌어요.”
▼ 라오스가 어떤 나라인지 알고 떠났나요.
“뒤늦게 찾아봤어요. 동남아시아라는 건 알았지만 위치도, 그 나라의 특성도 전혀 몰랐습니다. 라오스가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것도 몰랐고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이고, 바다도, 야구단도 없는, 참으로 없는 게 많은 나라였습니다.”
파이팅~! 엉덩이 툭툭!
“이런 나라에 가서 내가 뭘 하겠나 싶었습니다. 처음 라오스에 가서 야구팀을 만들겠다면서 공개 테스트를 실시했어요. 테스트에 참여하려고 온 아이들 모습이 기가 막혔습니다. 운동화가 없어 슬리퍼를 신고 나온 거예요. 야구 룰을 전혀 몰랐고, 투수, 타자, 수비수가 뭘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중 40명을 추려 팀을 만들었고,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갔어요. 가장 어려운 부분이 희생타, 희생 번트를 설명하는 거였어요. 자신이 죽는데 왜 주자가 한 베이스씩 더 가느냐고 묻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죠.”
▼ 선수들, 아니 학생들이 쉽게 다가오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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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료 수입이 소득원
▼ 현실적 질문을 할게요.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해요. 그간 모아놓은 재산이 있겠지만요.“예전엔 생활비가 얼마나 나가는지 몰랐어요. 관심도 없었고요. 아내는 감독할 때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더라고요. 스포츠채널 해설위원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설위원이 되면 방송 스케줄에 따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재능기부를 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우리 집 유일한 수입원은 강연료예요. 시간 될 때마다 강연을 다니는데 그 수입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기부도 합니다. 강연하게 된 이유, 잘 모르죠?”
▼ ….
“200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로 일할 때 뉴욕에 사는 한국인 회계사가 강연을 부탁했습니다. 시즌 중이어서 시간 내기 어렵다 했더니 시즌이 끝난 뒤에는 해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플레이오프 올라갈 것이기에 불가능하다고 답했죠. 강연해본 적이 없어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시카고가 클리블랜드에 10경기 차로 앞서며 지구 선두를 달리던 터라 이변이 없는 한 포스트시즌 진출을 당연시하는 상황이었어요. 거듭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면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더군요. 우리 팀이 패배를 거듭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한 거예요. 결국 약속을 지키고자 뉴욕을 찾았고, 미국 회계법인에 연수 온 회계사 50명 앞에서 강연했습니다. 야구인으로 살아온 경험을 담담하게 얘기했죠. 그 강연이 계기가 돼 지금껏 청중 앞에 섭니다. 삶의 방향은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강연 수입이 소득원이니까요.”
▼ 한국에서도 재능기부를 합니까.
“필요한 곳이 있다면 달려가야죠. 아내가 봉사하는 삶을 살라면서 모은 돈으로 자동차를 사줬습니다. 야구계를 떠난 후 아내 덕을 톡톡히 봐요. 야구선수를 상대로 재능기부를 가면 학부형도 초청하곤 합니다. 부모님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게 자식의 미래예요. 어릴 적부터 야구만 했는데 프로야구단에 지명받지 못하면 앞날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지금껏 수많은 야구선수를 봐왔는데 넘어지고 쓰러지고 엎어지더라도 나중엔 다 자기 자리를 찾아갑니다. 야구로 할 수 있는 22가지의 직업이 있는데 프로선수 못한다고 인생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개중엔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옆길로 새는 선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거의 다 잘 살고 있어요.”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
▼ KBO 경기도 챙겨 봐요?“그럼요. 1~9회까지 다 보지 못할 때는 하이라이트 방송을 챙겨 보면서 업데이트합니다. 현장을 떠났지만 여전히 야구인이에요.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인가요.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현장 복귀에 매달릴 생각은 없어요. 선택은 구단주가 하는 것이고, 선택받아야 감독이 되는 거니까요.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일에 얽매여 불안하고 초조한 삶을 살 수는 없어요. 좋은 일 하면서 희로애락을 느끼면 그만이죠. 물론 공부, 준비는 해야죠.”
▼ SK 경기를 더욱 유심히 지켜봤을 텐데요. 김용희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나고 외국인인 트레이 힐만이 감독으로 왔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SK가 4강에 들어갈 거라 기대했다가 실패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SK를 좋아하는 팬의 처지에서 경기를 지켜보게 되는 것 같아요.”
▼ 야구 승부 결과에 감독이 미치는 영향이 큽니까.
“아니요.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겁니다. 감독으로 일하면서 배운 건 기다림과 인내예요. 감독은 끊임없이 참아야 합니다. 선수가 제 구실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런데 인내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요. 세상에 쉬운 일 없겠으나 야구 감독은 정말로 어려운 자리입니다.”
▼ 자유계약선수(FA) 몸값이 4년 10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미국, 일본에 비해 야구 시장이 작은 상황에서 FA 계약을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지난해 KBO리그가 사상 첫 800만 관중 시대를 열었습니다. 엄청난 관중 수죠. 그런데 관중은 금세 사라질 수 있습니다. KBO 선수의 연봉이 올랐는데도 경기 내용이 별로면 관중이 외면합니다. 각 구단이 관중이 야구장을 찾게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야 해요. 감독, 코칭스태프가 제 역할을 하고, 미디어도 도와줘야 합니다. 뛰어난 외국인 선수를 데려와 한국 선수와 시너지를 내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은 한국 선수가 있다면 무조건 나갔으면 좋겠어요. 미국 야구를 경험한 이가 많아야 한국 야구가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봐요.”
▼ SK 시절, 김성근 감독이 시즌 중 물러나자마자 감독대행을 맡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김 감독과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언급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게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인 것 같아요. 야구 감독으로 일할 때는 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감독을 그만두고 라오스에서 봉사하다 보니 작은 돈이라도 기부해주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더군요. 야구를 더는 볼 수도,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무척 괴로웠죠. 평생 야구만 하고 살다가 그걸 못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을 돌리자 할 일이 많더라고요. 갖고 있는 재능으로 사회에 공헌할 길을 찾은 거죠. 화려한 것만 좇다 보면 삶이 불행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깜냥, 그릇의 크기에 맞춰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게 행복한 삶 아닐까요.”
이만수 이사장은 ‘신동아’와의 대화 말미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년부터 준비한 건데 올해 ‘이만수 포수상’을 제정해 고등학교 야구부 선수를 대상으로 홈런왕, 포수왕을 뽑으려고 합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영민 타격상’처럼 이만수 포수상도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시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야구愛
이만수 이사장을 떠올리거나 근황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10년 전 ‘SK 수석코치 이만수’는 인천 행복드림야구장에서 팬티만 입고 달렸다. 행복드림야구장을 찾는 관중 수가 적다고 아쉬워하면서 “만원 관중을 이루면 팬티만 입고 경기장을 달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1982년 프로야구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첫 100호 홈런, 첫 트리플 크라운(한 시즌 타점, 타율, 홈런 부문에서 모두 1위)을 달성했고, 수차례 홈런왕에 오른 야구인 이만수. ‘한국 야구의 전설’이 된 그는 KBO 육성부위원장을 맡아 유망주 발굴과 아마추어 선수 육성에도 참여하고 있다.
방망이를 처음 잡은 초등학교 때부터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그는 ‘야구愛(애)’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