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정’ 읽은 뒤 반평생 춘원 연구
- 일본인 최초로 춘원 평전 집필
- “‘무정’이 최초 한글 장편소설 된 배경에 일본인 있다”
- “춘원이 납북되지 않았더라면 상황 달라졌을 것”
지난해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푸른역사, 최주한 옮김)’를 펴낸 하타노 세쓰코(66) 니가타현립대학 명예교수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광수 평전을 쓴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 책은 2015년 일본에서 발간된 ‘이광수-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의 한국어 번역판이다. 그는 ‘무정’(2005)을 일본어로 번역한 데 이어 ‘무정을 읽는다’(2008), ‘일본유학생작가연구’(2011), ‘이광수 초기 문장집 1, 2’(2015) 등을 펴낸 ‘춘원 전문가’다.
춘원이 쓴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무정은 매일신보에 1917년 1월 1일~6월 14일 연재됐다. 문학적인 의의가 있어서인지 춘원에 관한 논문만 200여 편에 달한다. 하지만 춘원 문학상은 물론 문학관도 없다. 문학계 인사들이 문학상, 문학관 만들기를 수차례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동서문화사가 2016년 연내에 제정하기로 한 춘원문학상도 감감무소식이다.
춘원, 뜨거운 쟁점
친일작가로 기억되는 춘원. 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춘원 연구자를 만나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까. 궁금증을 안고 지난 11월 4일 서울 강남에서 하타노 씨를 만났다. 그는 홍명희 문학제(2016년 11월 5일)에 본인이 일본 잡지에서 발굴한 벽초 홍명희의 단편소설 ‘유서’를 소개하려고 방한했다. “춘원을 연구하다 춘원의 친구(홍명희)도 살피게 됐다”는 하타노 씨의 한국말에는 일본인 특유의 상냥한 말투와 음색이 묻어났다.▼ ‘무정’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간 춘원을 연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춘원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비판받은 적도 있다. 한동안 한국에 오는 것이 무서웠고, 춘원 연구를 중단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춘원에 대한 시각은 다양해졌다. 2009년 역사학자 김원모 씨는 ‘이광수의 친일은 위장이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무정 탄생 100주년이 되면 한국사회가 춘원을 재평가할까’ 기대했는데…. 여전히 춘원은 한국사회의 쟁점이다.”
중일전쟁 이후로 들면서 이광수는 사이비 민족주의라는 한 꺼풀 탈마저 벗어 던졌다. 조선문인협회장으로 황도문학의 기수가 된 이광수는 극렬한 황민논리로 광수(狂洙)라는 빈축까지 받았다. 그는 ‘금후의 조선의 민족운동은 황민화운동’이라고 단언하면서 ‘조선인은 그 민족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인은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 친일이 변절이 되자면 그 이전의 일관된 독립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광수의 경우는 시(始)와 종(終)이 친일이요 타협이었다.
-‘친일, 그 과거와 현재’(반민족문제연구소, 아세아문화사, 1994) 255쪽
춘원이 남긴 문학적 유산들을 친일이라는 미명하에 폄하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통해 일제가 제국주의의 위상을 세계에 노정시키던 시기였습니다. (…) 문학 연구는 문학작품에 대한 연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논리나 진영 논리가 개입하면 감정적이 되고, 객관적인 연구가 진척될 수 없습니다. (…) 한국근대문학의 개척자이면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춘원의 공적이 더 이상 외면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12회 춘원연구학회 학술대회’(송현호, 춘원연구학회 자료집, 2016) 개회사
▼ 춘원은 흔히 ‘친일파 문인’으로 규정된다.
“언젠가 만난 한 한국 여대생이 춘원에 대해 ‘친일파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자업자득이다’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근대문학 작가를 친일파로만 정의하는 건 사고(思考)의 정지가 아닐까. 춘원은 시대상을 반영해 행동한 인간이자 문인이다. 춘원의 문학상, 기념관이 성사되지 않아 안타깝다. 춘원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차단되는 것 아닌가. 춘원이 납북되지 않고 한국에서 문학작품을 지속적으로 썼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청강생으로 연구 시작
-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298쪽
▼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
“2008년 연구서 ‘무정을 읽는다’를 낸 이듬해에 한 출판사에서 ‘이광수 평전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춘원을 일본인에게 알리자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출판사 편집자가 (출판사가 있는) 도쿄에서 (내가 사는) 니가타까지 찾아와 설득해 마음이 움직였다. 교수로 일하다 보니 책을 쓸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기 퇴직했다.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자료를 준비하는 데 6년이 걸렸지만 책은 1년 만에 썼다.”
▼ 이력을 보니 아오야마학원대학 문학부만 졸업하고 교수가 됐더라.
“내가 석·박사 학위 없이 대학교수가 된 마지막 세대일 거다. 1990년대 한국 관련 학과가 생겨났을 때 교원으로 채용됐다. 난 1993년 현립니가타여자단기대학에서 전문강사, 조교수를 거쳐 정교수가 됐다. 단기대학이 2009년 니가타현립대학(4년제)이 됐고 이곳에서 국제지역학부 교수를 지냈다. 문학 공부는 1980년대 말 동경외국어대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청강하면서 했다. 수강생이 2,3명에 불과해 ‘나만을 위한 수업’ 같았다.”
▼ 대학 졸업 후 바로 한국문학을 공부한 건가.
“아니다. 불문학에 관심이 있어 대학 졸업 후 1973년부터 1년간 프랑스에서 살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결혼한 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부동산회사에서 일했다. 통역자격증을 취득해 국립니가타대학 시간강사로 일주일에 한 번씩 불어 강의도 했다. 아들을 낳곤 파트타임으로 일했고, 한국어는 1982년쯤, 아들이 유치원생이 되면서 배웠다.”
▼ 왜 한국어를 택했나.
“한국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살면서 이웃나라 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일본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더라. ‘일본어를 이해하려면 지역 방언, 조선어를 알아야 한다’는 대학 은사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프랑스에 머문 시간이 있었기에 넓은 시야를 갖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기 어렵진 않았나.
“내가 대학 1학년 때 어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기를 낳았다. 그 남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시베리아에 억류돼 죽었고, 북한에서 홀로 키우던 아기는 죽고 말았다.’ 그 얘기를 듣곤 충격을 받아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과거사가 나와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 4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한국 시절에 대해 듣지 못해 아쉬웠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춘원 연구에 몰두하는 것 같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
▼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일본정부가 재외한국인을 위해 만든 교육원에서 무료로 배웠다. 교육원 강사는 한국정부가 파견했다. 한국 초등학교 교사가 열심히 가르쳐주셨다. 선생님들을 보며 은혜를 갚고 싶었다. 한국어 공부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한국문학은 그렇지 않았다. 읽으면 언제나 가난하고 슬픈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무정’은 달랐다. 무정 논문을 쓰고, 무정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춘원 평전을 만들며 인생의 절반을 이광수에 빠져 살았을 정도로 무정은 매력적이었다.”
▼ 어떤 점에서 끌렸나.
“전개 과정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끝까지 읽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정한 짓을 많이 하며 괴로워한다. 주인공 형식의 욕망, 여인 영채의 슬픈 허영심, 일제 무단 통치시기를 잘 담아냈다. 읽고 나서 뭔가가 남는, 아주 드문 소설이다. 이런 소설을 본 적이 없다. 무정이 첫 근대문학작품으로 거론되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다. 하지만 김동인은 1934년 ‘춘원연구’에서 ‘주인공 성격의 불통일은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 ‘무정’은 한글로 쓰였다는 이유로 근대 장편소설의 효시로 평가받지 않나.
“한글로 쓰인 첫 장편소설로 알려졌지만 이는 확인해볼 문제다. 무정이 한글로 게재된 데는 당시 매일신보의 편집자(현장책임자) 나카무라 겐타로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다. 이광수가 무정 이전에 쓴 전작 ‘어린 벗에게’(1916)는 물론 무정 이후 발표한 ‘개척자’(1917)도 국한문체로 썼다. 매일신보가 무정의 연재 시작을 알리며 국한문체로 쓰겠다고 했는데 신문에는 왜 한글로 게재됐을까. ‘가실’이 포함된 단편집(1923) 서문에서 춘원은 ‘앞으로는 글을 한글로 쓰겠다’고 썼다. 무정을 한글로 표기한 건 한국문학사의 수수께끼다.”
▼ 주로 춘원만 연구하나.
“춘원의 배경을 이해하고 싶어 춘원의 주변 인물을 연구했지만 결국 춘원으로 돌아왔다. 춘원의 힘이 센가 보다. 나는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문학소녀라서 시험기간에도 소설만 읽었기 때문에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광수를 안 뒤로는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 (춘원에 대해) 모르니까 정말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책에는 춘원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다. 문학 외에 다른 자료들도 찾아봤나.
“난 책에 증거가 남아 있는 사실만 썼다. 가령 무정이나 동시대에 춘원이 쓴 논설을 읽으며 작가가 글 쓴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다. 작가는 유교가 잘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죽였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비판한다. 이광수는 문학을 통해 생(生)을 향한 욕망을 독자의 마음에 심어주려고 했다. 독자의 욕망을 고취하는 소설, 그것이 ‘무정’이다. 춘원의 친일 행적이 담긴 글의 리스트는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글에 대한 분석은 드물다. 춘원이 이 글을 왜 일본어로 썼는지 누구에게 읽히려고 썼는지 알아봐야 한다. 춘원 분석자들은 2차 자료를 인용할 때가 많다. 춘원이 학병 지원을 권유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나는 또 우리가 전쟁 중의 일본에 협력하지 아니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우리 민족에게 올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일본은 우리 민족을 더욱 탄압할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어떠한 손해가 있을 것인가? 나는 아무 손해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야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말거나, 징용이든지, 징병이든지, 일본은 우리에게서 가져갈 것을 가져가고야 말 것이다.(…) 이왕 가는 길이니 발로 차이면서 끌려가지 않도록, 가서라도 미움받이를 덜하도록 하자는 것이 곧 협력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또 어차피 흘리는 땀이요, 어차피 흘리는 피일진댄, 만일의 경우(일본이 이기는 경우)에 그 값이나 받도록 하여 두자는 것이 소위 부일협력의 동기였다.
-‘나의 일생’(이광수, 푸른사상, 2014) 462쪽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춘원이 썼다고 알려진 ‘조선 사람의 이마를 바늘로 찌르거든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일본정신을 몸속에 넣어야 한다’는 말은 드라마 대사로까지 회자된다. 관련 일화는 1944년 11월 중국 난징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춘원과 동행한 평론가 김기진 씨가 1974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김씨가 춘원에게 이런 글을 썼느냐고 묻자 춘원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믿도록 보이기 위해 그런 글을 썼다’고 답했다고 한다. 문제의 그 원문을 보면 일본인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구실 삼아 조선인 독자에게 적극성을 가지라고 호소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끌려가는 일본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내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 끝으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매일신보 ‘황민화와 조선문학’ 1940년 7월 6일(‘이광수, 일본을 말하다’ 285쪽 재인용)
▼ 그 외에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확대했나.
“1983년 처음 한국에 온 뒤 가능한 한 매년 한국을 찾아 현장 스터디를 했다. 당시 한국은 냄새제국이었다. 일본이 잊어버린 냄새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한번은 혼자 한국에 왔을 때 택시기사가 나를 간첩으로 신고한 적도 있다. 한국 춘원연구학회, 미국 AAS(Association Asian Studies)에서 1년에 1, 2차례 참여했고, 춘원의 자제분들도 만났다. 자제분들의 성격이 부드러우니까 그간 문학상 제정이 무산된 것 같다.”
이 개조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각 사람으로 하여금, 1.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 2. 공상과 공론은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 3. 표리부동과 반복함이 없이 의리와 허락을 철석같이 지키는 충성된 신의 있는 자가 되게, 4. 고식, 준순( 巡) 등의 겁나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어든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게, 5.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게, 6. 보통 상식을 가지고 일종 이상의 전문학술이나 기예를 배워 반드시 일종 이상의 직업을 가지게, 7. 근검 저축을 상(尙)하여 생활의 경제적 독립을 가지게, 8. 가옥, 의식, 도로 등의 청결 등, 위생의 법칙에 합치하는 생활과 일정한 운동으로 건강한 체격을 소유한 자가 되게, 함이니, 이것을 다시 줄여 말하면 덕, 체, 지의 삼육(三育)과 부의 축적, 사회봉사심의 함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민족 중에 이러한 사람이 많게 하자, 그리하여 마침내는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참되고, 부지런하고, 신의 있고, 용기 있고, 사회적 단결력 있고, 평균하게 부유한 민족이 되게 하자 함이외다.
불행히 현재의 조선인은 이와 반대외다.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타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임사(臨事)에 용기가 없고 이기적이어서 사회봉사심과 단결력이 없고 극히 빈궁하고, 이런 의미로 보아 이 개조는 조선 민족의 성격을 현재의 상태에서 정반대 방면으로 변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족개조론’(이광수,우신사, 1993) 135쪽
▼ ‘춘원의 민족개조론 주장이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별문제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개조는 그 시대의 유행어였다. 춘원의 주장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루쉰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다만 춘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길게 해 논란을 불렀다.”
▼책에는 춘원의 대일협력과정 관련 자료가 많이 있더라.
“춘원이 대일협력을 시작했다는 시점이 1938년이다. 하지만 춘원이 그 후로 7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 관련 재판서류 등을 찾아 읽었다. 기록을 보며 춘원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중간에 자리한 사람인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조사는 역사가가 해야 하는데…. 관련 자료를 묶어 책으로 낼 계획이다.”
▼ 춘원연구학회(2016년 9월 24일)에서 춘원의 자필 시집에 대해 발표했던데.
“삼중당이 1962년부터 이광수전집을 발간했다. 전집 19권에는 춘원 친필시집(2권으로 시집 이름은 ‘내 노래’)에 실려 있는 시 33편이 수록돼 있다. 우신사는 삼중당을 이어받아 1979년 이광수전집 10권을 간행했고, ‘내 노래’ 친필 사진도 실었다. 하지만 실물은 찾을 수 없었는데 우연히 도쿄외대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전집과 ‘내 노래’를 대조해 미공개작 3편도 찾았다. 친필을 봤을 때는 손이 떨릴 정도로 감동했다. 하지만 일본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도쿄외대 도서관은 춘원이 신문에 연재한 친필 원고도 갖고 있더라. 경매시장에서 춘원의 가족 편지까지 팔리고 있다던데…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
▼ 춘원을 연구한 소득은 뭔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머니의 상황을 짐작하게 됐다. 어머니는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매년 백김치를 만드셨던 분인데…. 어머니 개인만이 아닌 윗세대가 겪은 세월을 이해하게 됐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
-‘무정’(이광수, 민음사, 2010) 5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