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전대호 역, 까치글방, 2010
모나드의 영역
쓰쓰이 야스타카,
이규원 역, 은행나무, 2016
우리 시대의 우주는 번역을 필요로 한다. 공통의 종교나 사상이 더는 공유되지 않는 시대, 지구인으로서의 우리를 구성해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 감각과 지각만으로 닿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난해한 우주에 대해 과감히 직역과 의역을 시도하는 자들이 천체 물리학자와 SF소설가다. 물리학자가 수학이라는 언어를 통해 우주를 직역해 설계도를 내놓으려고 한다면, SF소설가는 가정과 비약의 상상력을 무기로 만일의 우주를 의역해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주를 번역하는 모든 이가 반역자가 되는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과 대중적 과학 저술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위대한 설계’는 수학의 언어를 통해 가늠한 우주의 디자인을 일상어의 코드로 바꿔놓는다. 이들은 우선 우주 창조에 ‘신은 없다’고 과감히 선언하면서 종교계와 기존의 오래된 과학에 대해서 의도적 반역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우주를 직역하면서 고전적 학설에 대한 반박과 소거를 이뤄내고 최종적으로 최근 물리학의 발견과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물리학자가 수학의 언어로 발견해낸 우주의 탄생과 존속을 이해하려면 ‘모형(model)’ ‘우아함(elegance)’ ‘우리’라는 지점 위에 서야 한다.
우주에 접근하려는 현재의 물리학자들은 무엇보다도 ‘모형’을 필요로 한다. 모형에 의존하지 않고는 육안으로 보기 힘든 실재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가 관찰자로부터 독립적,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여긴 철학자들의 생각과 관찰 가능한 경험과 실험에 의존하는 반실재론자들의 견해가 충돌해왔으나 현재의 물리학자들이 공유하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은 그 모든 논쟁과 토론을 우회해 만물의 이론에 도달하는 길을 탐색한다.
인간, 파괴자이며 창조자인
현재의 시점에서 궁극적인 만물의 이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 후보가 ‘M이론’이다. M이론 모형이 제시하는 우주의 진실은, 우리의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니며 엄청나게 많은 우주가 무(無, nothing)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창조했다는 증거다. 또한 우주의 자유의지는 우연히도 매우 정밀하게 조정돼 현재와 같이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M이론은 왜 다른 가설보다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가. 그것은 이 모형이 가장 ‘우아’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우아함이란, 복잡하고 난해한 수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 모형이 간단하고 경제적이며 압축적인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새로움을 수용하고자 기존의 모형에 기괴한 수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새 모형으로 대체돼야 한다는 반증이 된다.인간, ‘만약의 우주’ 경험자인
그리고 이 우아함을 파괴하기도, 창조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다. 하찮고 미미하지만 우주의 관찰자인 우리는 거대한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우주는, 우리의 관찰을 통해 우주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모형의 초기 상태를 설정할 때 그것을 선택하는 당사자가 바로 우리이며, 가능한 미래 상태 가운데 우리의 존재와 양립 가능한 상태만 선택해 정당화하는 것도 우리다. 그리해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일부로서, 우리는 그 모형의 단순명료한 우아함을 지향하면서도 우주의 안정성을 깨뜨릴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주의 안정성에 대한 파괴적 반역자인 동시에 새로운 미래의 우주에 대한 창조적 번역자가 된다.복잡하고 전문적인 수학의 언어 없이 우주를 번역하는 방법도 있다. 가정과 비약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SF소설의 의역이 그것이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SF를 창작한 거장 쓰쓰이 야스타카가 자신의 마지막 장편이라면서 출간한 최신작 ‘모나드의 영역’은 소설로 구현한 M이론 모형이다. 오랜 세월 ‘과학 환상’을 글로 푼 작가답게 그의 소설은 최신의 물리학 지식을 염두에 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호킹과 믈로디노프가 추측한 ‘위대한 설계도’와도 조응한다.
그러나 ‘모나드의 영역’은 물리학자의 이론이 아니라 허구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소설가의 상상력은 설계도를 세워가는 과정이 아니라 안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설계도가 찢어지거나 구멍 날 수도 있다는 잔혹한 반역을 가정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파열이 우주 스스로의 자정 능력에 의해 봉합될 수 있는지 탐구해가는 것이 이 소설이 우주를 말하는 방식이다.
소설 속 현실은 뒤틀려 있다. 어느 날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과 다리의 사체, 이후 인근 베이커리에서 이 사체를 본뜬 듯 만들어진 팔 모양 바게트의 품절 사태, 작가가 인격신과 유사하게 설정한 GOD라는 존재, 그 존재가 보여주는 전지전능함과 시공 편재의 형태로 이뤄지는 빙의. 이 같은 파편적 사건은 지구의 중력 질서 안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모순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소설의 제목이자 시공간이기도 한 ‘모나드의 영역’이다.
모나드 영역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훼손된 중력의 질서가 원상복구될 수 있다. 모나드의 공간은 우아한 궁극의 지성인 우주의지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지는 ‘주변이 어디에도 없는 도처에 편재하는 중심’인 평행우주를 가능하게 하기에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모순과 파열을 저 세계로 돌려보내는 방식을 통해 다시 안정성을 확보한다. GOD라는 존재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위대한 설계자의 역할이 바로 우주적 균형의 유지다.
그렇다면 이 절대적 우주의 지성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기만 한가. 작가는 소설적 방식을 통해 관찰자로서 ‘우리’를 부각한다. 이 소설은 최근 막 등장한 ‘파라픽션’ 기법을 사용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를 호명하거나 독자가 읽는 것이 소설임을 상기시켜 우리가 능동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등장인물에게 그들이 사는 세계가 소설 속일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암시를 주기도 한다. 아마도 SF계의 노련한 노(老)작가가 의도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평행우주를 말하는 ‘모나드의 영역’의 독자가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우주를 관찰하는 파괴적이며 창조적인 지구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