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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崔·朴의 그림자

“지금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차 자료, 진짜는 따로 있을 것”

Interview |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1호 이윤택

  • 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지금 떠도는 블랙리스트는 1차 자료, 진짜는 따로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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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문화 게릴라’가 현장에서 겪은 예술 검열 실태
  • ● “유진룡이 물러나고 김종덕이 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 ● “광장의 촛불은 1987년 이후가 아니라 1960년 이후 대변혁”
  • ● “이제 블랙리스트 이후를 논의해야 할 때”
‘문화 게릴라’로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 이윤택(65)은 진보일까 보수일까. 이런 일도양단 식의 질문은 무례하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가 겉으론 ‘문화융성’을 내세우면서 뒤에선 블랙리스트로 문화계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했던 박근혜 정부 문화정책의 허구성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또 경고한 ‘카나리아’였기 때문이다.

연출가로서 이윤택은 독일 사회주의 작가 브레히트와 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작가 장 주네의 파격적 번역극을 거침없이 소개해왔다는 점에서 분명 진보적이다. 극작가로서 이윤택은 ‘오구’와 ‘어머니’ 같은 창작극을 통해 보수의 핵심 가치로서 ‘가족’에 천착해왔다. 인간 이윤택은 ‘세상이 아무리 난리법석 용천지랄을 떨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가족이란 관계’(자전 에세이 ‘결국 삶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한국 보수의 본고장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랐고, ‘경주 양동 이씨 가문’으로 회재 이언적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을 마냥 진보라고 낙인찍을 수 있을까.

자유주의의 출발점이 개인이고, 사회주의의 출발점이 사회라면 보수주의의 출발점은 가족이다. 가족과 그 가족의 확대된 형태로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책임과 명예를 중시하는 이야말로 보수주의자라는 이름에 값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택은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다만 역마살 낀 아버지의 부재 속에 억센 홀어머니 아래 자라면서 형성된 반항기와 그가 종교처럼 믿는 연극의 가치를 억압하는 권력과 자본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그를 문화 게릴라로 길러냈을 뿐. 이는 그가 1986년부터 꾸려온 연극공동체 ‘연희단거리패’에서 휘두르는 가부장적 권위에서도 확인된다.

이윤택 자신도 이런 분열적 정체성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살아왔다. 그가 자신을 비민중권 지식인, 회색분자, 중도파로 끊임없이 규정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회색도 색이다. 나는 차라리 당당한 회색분자로 남겠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런 태도는 좌와 우로부터 모두 공격받는 빌미도 제공했지만 험난한 이념갈등의 격랑을 노회하게 헤쳐올 수 있는 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다.





정책농간 경고한 카나리아

박근혜 정부 들어 그런 정체성에 전례 없는 타격이 가해진다. 탄핵정국과 맞물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라는 빙산의 일각이 그를 통해 처음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5년 9월 그의 이름은 후배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과 함께 신문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그해 1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문학창작기금 희곡 분야에 제출한 그의 시극 ‘꽃을 바치는 시간’이 100점 만점을 받고 1위에 올랐음에도 문화체육관광부의 압력으로 최종 탈락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는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예술위의 ‘대본 공모 지원’ ‘시범공연 지원’ ‘우수 작품 제작 지원사업’에 줄줄이 선정됐지만 역시 문체부의 압력으로 지원금 포기 각서를 제출해야 했다는 소식과 맞물려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이윤택은 2012년 대선에서 고교동창이던 문재인 후보의 TV 지지연설을 했다는 빌미로, 박근형은 2013년 9월 국립극단을 이끌고 공연한 ‘개구리’가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풍자했다는 전력으로 ‘된서리’를 맞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15년 가을 한국 연극계의 척추와 같은 이윤택과 박근형에 대한 지원금 배제 소식이 국정감사 도마에 올랐을 때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은 맞불작전에 나섰다. “이윤택 선생에겐 지난 2년간 15억을 지원했다. 예술가 중에서 최고액의 지원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침소봉대의 ‘물타기 수법’이었음이 드러났다. 도종환 의원실이 문체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15억 원은 명동예술극장·국립극장·국립국악원에서 제작한 6개 작품의 총 제작비를 뭉뚱그린 것이었다. 이윤택 개인에게 돌아간 돈은 그 20분의 1 수준인 7600만 원(극작료+연출료)에 불과했다.

자신을 ‘국민 세금을 15억이나 받아먹은 배은망덕한 하마’쯤으로 몰고 간 ‘물타기’에도 침묵하던 이윤택은 2016년 2월 연희단거리패 3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야만적일 수가 있는가. 이윤택만 떨어뜨린 게 아니고 오태석도 떨어뜨리고 이강백도 떨어뜨렸다. 한국연극계를 대표하는 사람을 모두 떨어뜨리는 한국 사회는 얼마나 잘난 사회인가. ‘개판의 시대’에는 ‘깽판’으로 맞서야 한다. 일체의 정부지원금을 포기하고 소극장운동으로 돌아가 연극정신을 지키겠다.”

이날의 발언은 정치적 검열에 대한 분노 표출에만 머문 게 아니었다. 문화예술 문외한인 최순실-차은택의 농간에 대한 예언가적 경고까지 담겼다. “많은 지원이 문화 콘텐츠, 융합 쪽으로 다 넘어가버리고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인문학적 바탕도 없이 그냥 비빔밥 짬뽕처럼 만들어지는 게 무슨 융합인가. 왜 예술이 미적 형식도 갖추기 전에 콘텐츠가 돼야 하는가.”



창단 30주년에 존폐 위기 몰려

그의 이런 발언은 문화예술계 뒤에 숨어 있던 ‘검은 그림자’의 천박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사이다 발언’이라며 다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는 일체의 정부 지원금 없이 홀로서기를 위해 지난해 힘든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극단의 서울 아지트인 ‘게릴라극장’과 수유동 단원숙소를 매물로 내놨다. 2006년 개관한 게릴라극장은 개막 공연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연된 이윤택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과 박근형의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가 그해 말 나란히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며 대학로 창작극의 산실로 우뚝 떠올랐다. 하지만 노무현, 이명박 정부에서 계속 지원받던 공간지원금이 끊기면서 월 800만 원의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  

대신 은행 대출을 받아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불탄 고시원 건물을 인수해 단원 숙소와 공연장을 겸한 ‘짐머테아터’(가옥극장)로서 ‘30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창단 30주년에 막다른 골목에 섰다는 절체절명의 자의식이 깃든 극장명이다.

1월 4일 오후 창덕궁 담벼락에 위치한 30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청와대에서 내려보냈다”는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의 폭로와 그 작성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조윤선 현 장관의 은폐 의혹이 한창 일고 있을 때였다. 그 만남이 있고 8일 뒤인 12일 유진룡, 조윤선 장관 사이에서 문체부 장관을 맡았던 김종덕 씨가 구속됐다.



▼ 본의 아니게 블랙리스트 존재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린 사이렌이 됐다.

“저는 제가 이 정부의 검열 대상이라는 말을 2015년 말까지도 믿지 않았어요. 다들 기억 못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문화재청이 주관한 (2013년 5월) 숭례문 재개관 축하 공연 연출을 제가 맡았거든요. 그때 요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소문 난 그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만났는데 ‘내가 문재인 지지연설을 한 사람인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잠깐 생각하곤 ‘괜찮지 않겠어요’라며 넘어가더라고요. 모철민 교육문화수석을 만났을 때도 비슷했어요. 그때도 ‘문화융성’이란 표현을 넣어달라는 주문이 있긴 했는데 ‘촌스럽다’고 내가 고사하고 대신 ‘비나리 상생’을 내세웠어요. 당시 유진룡 장관이 ‘반대파까지 포용하자’고 한 말을 박 대통령이 수용해서였는지 별문제 없이 성대하게 공연을 치렀죠.”

▼ 언제 이상 신호를 감지했나.

“유진룡 장관에서 김종덕 장관으로 교체된 (2014년 8월) 이후부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느꼈어요. 김종덕 장관이 부임했을 때 저는 문체부 서울사무소와 같은 건물을 쓰는 국립극단의 작품을 연습 중이었는데 찾아와 인사 한 번 없이 쌩하니 지나치더라고요. 유 장관 시절엔 제가 연출한 국립극단의 ‘길 떠나는 가족’을 명동극장까지 와서 보고 ‘선배님’ 소리까지 해가며 격려하던 분위기가 싹 바뀐 거죠. 그 몇 개월 전부터 국립극단의 손진책 예술감독이 박근형의 ‘개구리’로 찍혀서 쫓겨나듯 물러나고 후임으로 거론되던 연출가 최용훈, 김광보가 줄줄이 낙마하는 걸 보면서 살짝 걱정되긴 했어요. 하지만 김종덕 장관이 온 뒤 국공립 단체장 인사가 줄줄이 적체돼 공석이 되거나 자꾸 엉뚱한 사람들을 앉히는 것을 보면서 ‘아하 문화 마인드를 가진 사령탑이 무너졌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어요. 그리고 (2013년에 국립극단 기획공연으로 선보여 반응이 뜨거웠던) ‘혜경궁 홍씨’를 2015년 말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국립극장 쪽에서 ‘안 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예요. 문체부에 알아보니 문화예술과에선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면서도 ‘문화정책과에서 청와대와 조율하는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국공립 공연 일체를 포기한 거죠. 2016년엔 명동극장 기획공연으로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초청받은 ‘길 떠나는 가족’이 여비 지원도 못 받아 가는 데만 48시간 걸리는 저가항공을, 그것도 뿔뿔이 나눠 타고 가야 하는 촌극까지 벌어졌고요.”

▼ 2016년 지원금 심사에서 최종 탈락한 게 결정타가 된 건가.

“그때까지도 ‘설마’했어요. 당시 심사위원 중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번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나이 많은 사람들을 다 뺐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그다음해(2016년) 다시 다른 지원금 신청을 넣었는데 바로 떨어뜨더라고요. 그걸 보고 비로소 ‘아하 내가 제대로 걸렸구나’ 했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은 늙은이들뿐 아니라 박근형, 이성렬, 김재엽, 윤한솔까지 그나마 연극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떨어뜨렸더라고요. 그렇게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은 다 줄여놓고선 난데없이 콘텐츠니 융합이니 하는 분야 지원금만 늘리는 것을 보고 ‘개판에는 깽판으로 맞서겠다’고 나선 게 예언 비슷한 게 된 겁니다. 10월 중순경엔 CBS 노컷뉴스와 갑작스럽게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누군가가 문화를 통제하려 하고 검열하려 한다. 이런 행위는 반드시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그 직후 바로 최순실 사태가 터지더군요.”



광장의 촛불은 대변혁의 물결

▼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검열 주체가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천박한 사람들이란 점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저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검열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70~80년대부터 연극을 한 사람이에요. 그때의 검에는 물리적 폭력이 수반됐어요. 당시 검열관은 계엄사 보도처 소령, 중령이었는데 항변이라도 할라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무자비한 폭력을 퍼부었어요. 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확실히 무장된 소신 있는 우파였으니까요. 반면 이 정권에서 검열한답시고 농간 부린 사람들은 우파적 신념 체계조차 없는 천박한 세속주의자에 불과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군인들이 탱크 몰고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그거였는데 광장의 촛불이 수백만 개씩 켜지는 걸 지켜보면서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본질적 대변혁의 물결이 밀어닥쳤음을 깨달았습니다.”

▼ 본질적 대변혁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촛불의 광장은 (1960년 4·19 직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광장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최인훈의 광장은 지식인들의 수직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광장이었습니다. 반면 촛불의 광장은 정치가 일상이 되고 혁명이 축제가 된 수평적 광장을 열어젖혔습니다. 소설 ‘광장’의 주인공인 이명준이 회색인으로서 결국 제3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이건 남이건 그 일상이 스며든 광장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4·19의 민주화 논리가 됐건 5·16의 성장 논리가 됐건 둘 다 일상의 힘과 기반을 갖추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화 논리가 ‘배운 자’들의 제한된 이념이라면 성장 논리는 ‘가진 자’들을 위한 논리였습니다. 촛불의 광장은 그 둘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상인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엄청난 변화가 이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거예요.”

▼ 1987년 이후가 아니라 1960년 이후가 맞는가.

“1987년의 민주화는 실패한 민주화입니다. 권위주의 시대를 종식시키긴 했지만 결국 ‘3당 합당’이란 야합으로 귀결됐기 때문입니다. 여야의 구별이 무너진 통합의 시대라 포장하지만 집권세력은 권위를 상실했고 재야세력은 신념이 무너졌습니다. 권위는 박정희를 부를 때 따라붙은 ‘각하’란 호칭과 결부돼 있었고 신념은 김대중을 부를 때 따라붙은 ‘선생’이란 호칭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각하와 선생이란 호칭이 사라진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중심과 가치체계가 사라진 ‘야합의 시대’란 게 제 소신입니다. 촛불의 광장을 채운 소시민들은 스스로의 가치와 신념을 내면화해낸 행동하는 주체로서 민주화와 산업화의 논리에 갇히길 거부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화는 30년짜리가 아니라 50년짜리라 할 수 있습니다.”


블랙리스트는 배제의 정치

▼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박 대통령의 논리는 제가 1980년대 신문기자 시절 계엄사 보도처에서 만난 육군 소령의 논리와 똑같습니다. 쿠데타에 나선 군인들 머릿속에는 민중이나 시민이 없거든요. 목숨을 걸었기에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게 무조건 정의인 겁니다. 그 결과물이 시민에게 엄청난 손해를 줘도 미안함은 있을지언정 죄의식이 없어요.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 ‘나는 죄가 없다’는 거죠. 그게 바로 파라노이아(paranoia), 자폐증환자 내지 편집광의 논리죠. 5·16 이후 한국 사회의 한 축을 이끌어온 게 바로 그런 독선 내지 편집광이에요. 하지만 4·19 이후 목 놓아 부르짖어왔던 민주화가 일상의 수준으로 고루 퍼져서 이제 더 이상 독단적이고 편집광적인 정치가 발붙일 곳이 사라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 정도는 다르지만 과거 정권에서도 블랙리스트 비슷한 것은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단언컨대 없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 이번 정권에서 처음 생겼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도 공연계에서 민족극이나 마당극 하는 분들을 제외하면 연극인들은 비교적 고르게 지원금 혜택을 받았습니다. YS(김영삼) 정부는 대단히 문화적이지 못했습니다. 문화적 성향이 아니었던 거죠. 제가 YS와 같은 경남고 출신이지만 지원금 한 푼 못 받았으니까요. 반면 DJ(김대중) 정부 시절은 르네상스였어요. 문화에 대한 관심도 많았지만 호남 사람 아니라 차별했다는 말 듣지 않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영남 사람에다 비운동권인 제가 지원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노무현 정부 시절엔 ‘진영논리’가 들어왔죠. 그래서 민예총 출신 젊은이들에게 혜택이 많이 돌아가고 상대적으로 원로나 기성세대가 홀대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차원은 아니고 성향의 차이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제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했으니까요. 이명박 정부도 비슷했습니다. 유인촌 장관이 편향성 있는 문화정책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누구는 피해를 보고 누구는 혜택을 볼 수는 있을지언정 누구를 배제하는 식의 블랙리스트는 없었습니다.”

▼ 현재까지 드러난 블랙리스트가 정부가 관리했다고 보기엔 너무 중구난방에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 떠도는 블랙리스트가 허접한 것은 사실입니다. 일단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보도된 블랙리스트에 저랑 박근형의 이름이 안 보여요. 그 명단에 오른 사람 대다수는 소위 반정부 서명에 동참한 사람인데 우리 둘은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았거든요. 정작 직접적으로 찍혀서 바로 당한 우리 이름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부족해요. 게다가 1만 명 가까이 망라한 명단에는 이 정부 들어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임영웅 선생의 이름까지 들어 있더군요. 자료 수집 차원에서 만든 1차 명단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이고 진짜 블랙리스트는 따로 존재할 거예요. 그 진짜 블랙리스트는 단순 명단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치밀하게 공격할 자세한 증빙자료까지 구비했을 거라고 봐요.”

▼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逆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탄핵이 가결되느냐 부결되느냐,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느냐가 정치인들에겐 중요할지 몰라도 우리 같은 예술가들에겐 이젠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세상이 본질적인 변화의 힘을 얻었음을 확인했으니까요. 옛날엔 데모가 벌어지면 연극은 손님이 없어 문을 닫아야 했어요. 하지만 요새는 촛불시위 있는 날에도 관객이 줄을 서요. 연극은 연극대로 보고 또 데모하러 나가는 문화가 생긴 겁니다. 역사적, 정치적 행위에 동참하는 게 일상화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죠.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개인주의에 물들어 따로 놀던 젊은 연극인들이 검열에 저항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면서 공동체 의식이 생긴 점이에요. 정부지원금 바라보지 않고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소극장 작품에 주력하다 보니 작품도 좋아졌어요. 지난해 주요 연극상을 휩쓴 작품들이 다 그런 작품이에요. 이제는 천박한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정치가 물러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셈인 거죠. 따라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불합리하고 천박한 전 시대의 논리로 예술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 그래도 정부의 예술가 지원사업에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지 않나.

“네 가지를 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첫째, 예술가들에게 사상적 선택의 자유를 줘라. 사상적 이유로 지원을 배제해선 안 된다. 둘째, 세대 간 차별을 없애야 한다. 나이가 적거나 많다는 이유로 지원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 셋째, 지역 간 차별을 없애야 한다. 중앙과 지방의 차별, 경상도와 전라도에 차별을 둬선 안 된다. 넷째, 학파나 유파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한예종과 비한예종 이런 식의 차별을 둬선 안 된다. 그럼 무슨 기준을 적용할 것인가. 개성과 다양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말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작품 지원이 아니라 예술가에 대한 보편적 복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웨덴처럼 예술가로 공식 등록된 사람은 직장 유무를 따져 고정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실직수당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지급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봐요.”

▼ 마지막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개인적 소감은.

“제 경험을 곱씹어 보면 정권을 잡고 미리 블랙리스트를 만든 게 아니고 중간에 괘씸죄에 걸린 사람들을 혼내줘야겠다는 치기 어린 복수심에서 누군가가 만든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제가 어쩌다 1호로 걸려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붙들려갈지 모른다, 두들겨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동반된 검열의 시대를 겪은 저 같은 사람에겐 사실 큰 위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제가 대단한 희생자나 피해자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번 사태를 전후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넘겼다는 생각은 듭니다. 문재인 지지연설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 많았습니다. 그래서 단원들과 상의했더니 소신껏 발언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지연설에 나섰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숭례문 재건축 축하 공연 연출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고민 많았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는 소리 들을까봐요. 하지만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연극파다. 연극인으로서 우리에게 요구된 것은 하자’는 결심으로 나섰고 역시 후회하지 않습니다. 검열 문제와 문화정책 농간 사태에 대해서도 연극인으로서, 문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회피하지 않고 발언해야 할 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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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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