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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고노담화 정신 지켜야 위안부 해결” (일본군위안부에 사과)

위안부 보도로 협박받는 日언론인 우에무라 다카시

  • 이혜민 | 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고노담화 정신 지켜야 위안부 해결” (일본군위안부에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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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내 보도 전에 이미 한국 여성지에서 수기 형식으로 한국 거주 위안부의 존재가 공개됐다. 내 기사가 한국에 사는 위안부의 존재를 전국지(일간지)로 알린 첫 보도인 것은 맞다.”

▼ 왜 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생겼나.

“입사 후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조선어사전을 책상 위에 올려뒀다. 시간은 없지만 돈은 있었으니까 공부는 안 하고 사전만 사둔 거다. 그걸 본 선배가 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해 어학연수를 추천해줬다. 그 덕에 1987년 아사히신문 어학연수 프로그램으로 1년간 한국에 유학 와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평소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는 백정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꺼내 1990년대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영상에는 그와 그가 진행한 연재물 ‘이웃사람’이 나왔다. 기사에는 일본 교토부 우지 이세탄초 우토로에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거주지 우토로 마을이 소개됐다.





약한 쪽 서는 게 습관

▼ ‘이웃사람’ 연재는 어떻게 시작했나.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썼다. 1978년 와세다대에 입학해 기숙사에 살면서 재일한국인 선배를 만났다. 서울대 의대 유학생이던 그 선배는 재일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구속되는 경우를 목격하면서 두려워져, 일본으로 돌아와 와세다대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 선배를 보며 이웃 나라의 현대사가 가깝게 느껴졌다. 김대중 씨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인물로 구속돼 사형판결(이후 무기로 감형)까지 받았을 때 세계 각지에서 석방운동이 활발했는데 대학생인 나도 아사히신문에 구명 글을 기고했다.”  

▼ 인권에 관심을 둔 특별한 계기가 있나.

“부모님이 이혼해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 없이 살았다. 이후 어머니가 재혼했는데 어린 시절에는 소외를 경험했다. 아버지도 없고 못살았기 때문에 무시당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약한 쪽에 서는 게 습관이 됐다.”

▼ 언제부터 기자를 꿈꿨나.

“사실 산악인이 되고 싶었다. 산악 동아리가 유명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떨어졌고, 재수해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그때 막연히 ‘신문기자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보며 서울특파원을 꿈꿨다.”

▼ 한국에는 언제 처음 왔나.

“첫 해외여행으로 대학 4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왔다. 인심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런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졌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아침을 사주고, 광주에서 만난 군인이 유원지에 데리고 가줬다. 내가 시장에서 새마을운동 모자를 쓰고 다녀서 그런지 사람들이 좋아했다. (여행 사진을 보여주며) 이건 종로에서 머문 여관, 옛 서울역, 연세대에서 만난 여학생들과 독수리다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 1987년 어학연수 시절 기록한 것들을 묶어 ‘서울의 바람 가운데’(1991)를 냈더라.

“어학연수 기간에도 월급을 받았지만 기사 쓸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는 신촌에 살고 있는 데다 6·29선언 이후 민주화운동이 대단해, 나만의 신문 ‘서울유학생통신’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 신문과 유학 시절 일기를 묶어서 책을 냈다.(그가 보여준 책에는 노래 ‘아침이슬’ 해금 뉴스, 최루탄 집회 사진이 있었다).”



정신대 용어 썼다고 공격받아

“고노담화 정신 지켜야 위안부 해결”  (일본군위안부에 사과)

우에무라 다카시가 받은 협박 엽서들. [자료제공·푸른역사]

▼ 신문까지 만든 것이 흥미롭다.

“저널리스트이니까 기록했다. 신문은 한 달에 한 번 만들었다. 기사는 샤프펜슬로 쓴 뒤 복사해 오려붙였다. 만화 ‘고바우영감’ 팬이라 그것을 흉내 내 그림도 넣었다. 한국말을 고바우영감으로 배운 나는 고바우영감 연재물 중 현대사적으로 중요한 걸 뽑아 책(‘만화 한국현대사 고바우영감의 50년’(2003))으로 만들었다. 책의 연표는 사건을 쉽게 찾아보려고 만들었다. 나중에 아사히신문에 고바우영감 특집 기사도 썼다.”  

▼ 부지런해 보인다.

“사람들에게 뭔가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갖고 살았다. 서울특파원 때는 한국 분단 반세기 연재, 38선 르포르타주도 기획해 보도했다. 위안부도 내가 진행한 기획 중 하나다. 전쟁 희생자의 인권 문제 차원에서 접근했고, 위안부를 끝까지 취재하지는 못했다. 다만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작업은 계속했다. 아사히신문의 전쟁 부역 행위를 조명한 책 ‘신문과 전쟁’(2008)을 썼다.”

▼ 위안부 문제를 보도한 뒤 일본 우익들은 특히 어떤 대목을 비판했나.

“내가 위안부를 소개하며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를 썼다는 부분이다.(현재, 정신대는 근로정신대 즉 일제에 강제 징용돼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여성들의 줄임말로 쓰인다) (위안부 문제의 쟁점인) 강제연행이란 말을 썼다는 비판도 받았다.”

▼ 그때 ‘정신대’란 단어를 왜 썼나.

“당시 당사자들은 물론 단체들도 위안부를 가리켜 정신대라고 썼다. 일본 연구자의 조사에 따르면 해방 후부터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우에무라 다카시 보도 논란을 다룬 잡지 별책부록을 보여주며) 송건호 선생님도 1963년 경향신문에 일제 정신대란 용어로 위안부를 설명했다. 나도, 일본 언론도 그런 맥락에서 이 용어를 썼다.”

▼ ‘김학순 할머니가 기생학교 출신이란 점을 쓰지 않았다’고 우익이 지적했던데.

“난 정대협이 들려주는, 익명의 증언을 담은 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썼다. 그 안에는 기생학교 얘기가 들어 있지 않았다. 초기 보도와 나중에 쓴 기사를 대조하면서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고 초기 보도를 날조라고 비판할 수 있나. 기생학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기생학교 출신이 위안부로 갔다고 해서 인권유린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또 기생은 성매매자와 동일하지 않다.”



강제동원 인정한 고노담화

▼ 강제연행이란 표현을 썼나.

“그 표현은 안 썼다. ‘이 여성은 17세 때 속아서 위안부가 됐다’고 썼다. 우익은 “우에무라가 강제연행이란 말을 써서 일본 사람들이 국제사회에 사과하게 됐다”며 나를 비난한다. (1991년 신문을 보여주며)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은 강제연행이란 말을 썼다. 비판자들이 “왜 당신만 강제연행이란 용어를 안 썼느냐”고 묻는다면 사과하겠다.”

▼ 강제연행은 일본의 법적 책임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이슈다. 한겨레 2014년 12월 21일자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는 조선에선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없었고, 적어도 지금까진 이와 관련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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