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심층탐구

‘21세기 차르’ 푸틴

  • 윤성학 |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 교수 dima7@naver.com

    입력2017-02-02 17: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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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발다이선언 이후 달라진 위상
    • ‘트럼푸틴(TRUMPUTIN)’이 만들 새로운 국제 질서
    • 남북 간 긴장 완화 위해 극동 개발에 적극 참여해야
    한국은 ‘21세기 차르’로 불리는 푸틴을 너무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바마의 비아냥거림처럼 석유와 가스나 팔아먹고 불량 가짜 보드카로 수십 명의 국민이 죽어가는 무지와 야만의 나라에서 활개 치는 독재자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신기술이나 글로벌 자본이지 국가주의나 종교적 에너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난해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하고 문제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푸틴이즘의 힘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마지막 형태라고 선언했다. 후쿠야마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가 생각한 자유민주주의는 겨우 20년 정도 존재했다. 미국 주도의 단극 체제, 글로벌스탠더드는 점차 붕괴돼가고 있다. 이것을 극적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푸틴이다.

    ‘포브스’는 2013년부터 무려 4년 연속 푸틴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선정했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이나 신흥부자인 중국의 정상들은 그동안 한 번도 1등을 차지하지 못했다. 군사력에서는 미국에 훨씬 못 미치고 GDP(국내총생산)는 한국보다도 낮은 러시아의 대통령이 어떻게 4년 연속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푸틴이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 때문이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트럼프조차 푸틴에 동조하는 것은 푸틴이즘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트럼프에게 영감을 준 푸틴이즘은 2014년 10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외교전문가 포럼인 ‘발다이 토론 클럽(Valdai Discussion Club)’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2012년 푸틴은 집권 3기를 시작하면서 세계를 보는 시각을 점차 수정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유럽이 가진 한계가 노출됐고 미국은 중동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석유 가격의 폭락으로 경제위기 일보 직전까지 간 러시아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나토를 통한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야누코비치 정권이 불법적으로 붕괴되면서 푸틴은 서방과의 모호한 관계를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다. 우크라이나의 폭력 시위를 배후 조종한 서방과는 단호한 선을 긋고 그동안 암묵적으로 추구해온 ‘유럽 속의 러시아’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마침내 2014년 4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는 서방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합병됐다. 발다이 연설은 러시아의 크림 합병 이후 유럽과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고립이라는 상황에서 푸틴이 자신의 정당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나왔다.



    미국 중심 ‘신질서’는 실패했다

    푸틴은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 중심의 신질서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규정한다. 세계 유일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통제가능한 세계질서와 조화, 균형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에서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지정학적 충돌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푸틴은 이론적으로도 영원한 패권국가는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냉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단극의 순간(Unipolar Moment)’이란 개념을 제시한 찰스 크라우서머(Charles Krauthammer)조차 미국의 유일 패권은 길어야 25~30년에 불과하다고 했다.

    푸틴은 미국의 패권이 실패한 이유로 모든 국가가 공감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을 꼽는다. 세계는 갈수록 행위 주체(국가, 기업, NGO 등)가 더 많아지고 있는데도 미국이 제시하는 ‘글로벌스탠더드’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푸틴은 미국 주도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게임하는 것을 거부했다. 크림 합병과 관련한 단호한 행동은 다른 나라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계없이 러시아의 이익이라고 생각한다면 강대국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푸틴은 발다이 클럽 연설에서 서방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특정 국가들의 내부 불안정을 이유로 평화적 대화라는 방법 대신 폭력과 정부 전복 사태로 몰아갔다고 비난했다. 야누코비치 정권의 전복 이후 우크라이나는 경제와 사회 분야의 파국은 물론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러시아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지정학적 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손을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수습하는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특히 러시아의 안보가 위협에 처하면 앞으로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푸틴은 밝혔다.

    2014년 크림 합병 이전 러시아는 ‘유럽 속의 러시아’를 지향하면서 미국과 나토의 동진과 공격에도 인내심을 발휘하며 조심스럽게 대응해 왔지만 이후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한다. 냉전 이후 ‘유럽 속의 강대국’으로 축소됐던 러시아가 다시 국제무대에 복귀해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갈수록 푸틴의 친구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틴의 매력을 잘 분석하면 푸틴 리더십의 특징을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 푸틴은 강력한 실천력을 갖고 있다. 문제가 있으면 회피하지 않고 곧 행동에 돌입한다. 푸틴은 오바마와 같이 민주적인 리더십보다는 카리스마형 리더십에 가깝다. 민주적 리더십은 지루하고 답답하다. 반면 카리스마형 리더십은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와 같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과정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야누코비치 정권의 축출로 위기에 빠졌던 러시아가 곧바로 뒤집기에 성공한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이후 유가 하락과 서방의 경제 제재로 환율이 폭락하고 성장률이 마이너스 상황이다. 경제 수준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러시아 국민의 87%가 푸틴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세계의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푸틴 리더십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세계는 오랜 경기 침체와 테러 등으로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로봇과 인공지능(AI) 등 일자리를 위협하는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닥치고 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유약해 보이는 민주적 리더십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스트롱맨(strongman)을 선호한다.

    푸틴 리더십의 또 다른 특징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한다는 것이다. 푸틴은 다른 국가에다 인권, 자유시장, 민주주의, 환경 등에 관해 충고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은 지난 몇십 년 동안 글로벌스탠더드로 세상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세계 문제에 힘을 쏟다 보니 미국은 정작 자국민을 챙기지 못했다. 이 틈을 타고 중국은 값싼 상품을 만들어 미국 시장을 장악했다.

    푸틴은 외교란 ‘자국의 이익 실현’이라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진리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자국에 이익이 된다면 옆에서 뭐라고 비난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푸틴은 크림 합병, 그리고 2008년 조지아 침공에 대한 세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푸틴의 친구들이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국가 지도자라면 자국 이익을 위해 명분 같은 것은 따지지 말고 철저하게 현실주의자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가장 먼저 이것을 깨닫고 ‘America First’라는 구호로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마지막으로 푸틴은 소통과 경청의 리더십을 갖고 있다. 보통 국가지도자가 되면 들으려 하기보다는 말하려 하고, 설교하려 하고, 설법하려 한다. 인류가 직면한 추상적인 고민에 몰두하고 서민의 고통에는 무감해진다. 푸틴은 2001년부터 매년 연말 ‘국민과의 대화’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보통 3시간 이상 걸리는데 2013년에는 무려 4시간 47분을 쉬지 않고 국민들과 전화, 인터넷, 기자회견 등을 통해 소통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것은 일반 시민들도 무작위로 출연해 대화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민원성 질문도 많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푸틴이 돌발 상황에 가까운 지엽적인 질문에도 거의 막힘없이 답변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국정 구석구석을 챙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틴은 2009년 총리 재임 시 철강재벌 데리파스카를 불러 합의문과 펜을 집어 던지며 임금 체불을 해결하라고 호통 쳤다. 푸틴이 장관이나 주지사를 불러 장시간 동안 현안을 토론하는 장면을 TV로 보는 것은 러시아에서는 일상이다.



    북한 문제에서 충돌 가능성

    푸틴과 트럼프가 앞으로 전개할 세계질서와 한반도 정책은 과거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트럼프는 오바마와 달리 북한 문제를 미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전면 재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북한 자체는 관심도 없고 미국의 이해에 영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의미가 있는 것은 중국을 고립화하거나 한국에 더 많은 방위비를 올리는 조커로 사용될 경우다. 한반도에 긴장관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북한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북한이 5차, 6차 핵실험을 한다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과시성 무력 제재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중국과의 극단적 마찰을 꺼려한 오바마와 달리 트럼프는 중국이나 국제사회를 무시하고 일방통행 식으로 북한에 대한 무력 제재를 주저 없이 진행할 것이다.  

    트럼프와 달리 푸틴은 북한에 대한 어떠한 개입도 반대한다. 러시아가 시리아 사태에서 부패하고 반인권적인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였듯이 러시아는 김정은 정권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 의한 레짐 체인지는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의견 충돌이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극동 개발에 적극 참여해야

    북한에 대한 무력 제재가 논의되는 순간부터 한국은 심각한 안보 리스크에 놓일 수밖에 없다. 북미 간 어떤 식으로든 무력 대결 양상이 나타난다면 한국의 경제나 안보는 절체절명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미국의 무력 제재에 북한이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없는 북한은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이나 한국을 상대로 반격에 나설 것이다.

    북한을 국제문제화하지 않고 한반도에 긴장을 완화하려면 차기 정부는 러시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러시아가 한국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면 푸틴은 트럼프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틴이 자신의 정책 트레이드로 생각하는 극동 개발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극동 개발이 구체화하고 성과가 있으면 러시아가 북한이 골칫거리가 되는 것을 꺼려해 미국을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트럼프에게 잘 보이려고 미국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보다 러시아 극동 개발에 수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성이 높다.

    한국은 푸틴을 자국 영토 문제 해결의 파트너로 보고 전력을 기울이는 아베에게서 배워야 한다. 트럼프와 푸틴이 앞으로 세계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아베는 지난 두 달 사이 푸틴과 트럼프를 모두 만났다. 트럼프에게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거부라는 딱지를 맞았고 푸틴에게는 북방 도서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베는 올해 초에 또 이들과 각각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아베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외교를 주도하면 한국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빨리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할 이유가 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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