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호

명사에세이

사관(史官)의 가짜 뉴스

  • 하응백 문학평론가·(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소장

    입력2019-04-12 11: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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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초상화.

    황희 초상화.

    [신동아=하응백 문학평론가]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2년 정도가 지난 1452년 7월 4일의 일이다. 이날 ‘세종실록’ 편찬 책임을 맡은 지춘추관사 정인지(鄭麟趾)는 실록 수찬관들을 불러 모았다. 정인지는 사관(史官)의 황희(黃喜)에 대한 기록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워 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실록은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를 토대로 편찬된다. 이 사초 중에서 비밀스러운 일이나 개인의 인물평 등은 사관이 개인적으로 간직했다가 실록 편찬 시 춘추관에 제출했는데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했다. 이 가장사초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만약 사적인 감정이 개입돼 믿기 어려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군다나 황희는 마침 그해 2월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24년을 재상으로 재임하면서 여러 관료로부터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날 정인지는 “이것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이 지나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과 의논해 정해야겠다”라고 말하며,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허후(許), 이계전(李季甸), 정창손(鄭昌孫), 성삼문(成三問), 김맹헌(金孟獻), 최항(崔恒) 등에게 의견을 물었다. 

    도대체 어떤 기록 때문이었을까. 편찬회의 24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당시 좌의정이던 황희는 사헌부(司憲府)로부터 파주의 한 역리(驛吏)에게서 말 한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고 탄핵받았다. 이것은 ‘뜬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세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희는 스스로 겸연쩍다고 하면서 기어코 사직하고 만다. 문제는 사관의 황희에 대한 논평이었다.

    황희에 대한 악평

    황희는 황군서(黃君瑞)의 서자(庶子)라고 시작되는 이 논평을 요약하면, 첫째 대사헌 재직 당시 설우(雪牛)로부터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대사헌’이란 평을 받았다, 둘째 박포(朴苞)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 셋째 말 한 필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뿐이 아니라 재임 시 여러 번 뇌물을 받아 축재(蓄財)를 했지만, 임금에게 잘 보이고, 임금을 잘 속여서 무사했다 등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일까. 청백리의 표본으로 알려진 인물의 뇌물 수수도 의외지만,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니. 

    사관이 기록한 내막을 따라가 보자. 박포 장기로 유명한 박포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왔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이방원의 형 방간(芳幹)을 부추겨 난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박포가 죽고 그의 아내는 죽산현(竹山縣·경기 안성군 죽산면)으로 쫓겨 가 살았는데, 자신의 종과 간통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다른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자, 그를 살해해 연못에 시체를 유기했다고 한다. 여러 날 후에 시체가 발견되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박포의 아내는 서울로 도망쳤다. 그 후 황희의 집 마당에 토굴을 짓고 여러 해 살았는데, 이때 황희가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다. 



    사관의 논평대로라면 황희는 뇌물을 받고 간통을 하고 임금을 기망한 그야말로 파렴치한 인간이다. 당시 편찬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논평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정인지는 먼저 “황희 스스로가 ‘나는 정실(正室)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들었지만 나머지 일은 전에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종서는 “박포의 아내 사건은 가정 내의 은밀한 일이니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나머지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논의가 진행되면서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자기들이 전혀 모르는 뇌물 관련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황희에 대해 악평을 한 이호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이호문(李好問)은 ‘세종실록’에 단 한 번 등장한다. ‘세종실록’에 이호문(李好文)은 여러 번 등장하는바, 이호문(李好問)과 이호문(李好文)은 동일 인물로 보인다. 이호문은 1428년 무렵에도 사관을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정황상 이호문(李好問)은 이호문(李好文)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호문은 세종 2년(1420년) 과거에 급제해 1425년 사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해 3월 1일 황희는 의정부 찬성 겸 대사헌에 임명되는데, 황희의 사헌부는 4월 16일 “아침 조회에 앉아 졸았다”는 이유로 이호문을 문책한다. 사헌부는 법률에 따라 처벌하라고 했지만 세종은 논하지 말라고 하며 이호문의 잘못을 용서했다. 이후 이호문은 호조 정랑 등을 지내다가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재직하던 1446년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러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파직됐다. 당시 그의 혐의는, 관기를 불러 음욕을 행했다, 이웃 고을의 처녀를 공관으로 오게 한 다음 대낮에 희롱했다, 남편이 있는 관노와 간통했다, 쌀을 도용했다 등 대부분 파렴치한 범죄였다. 

    태종 대부터 중용돼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대에 오래도록 영의정에 재임한 황희와 이호문은 서로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경중이 다른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호문이 결점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에는 참석자 모두 동의했다. 더군다나 이호문과 외가 쪽 친척이었던 허후는 “이호문은 나의 친척이지만,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하다”고 혹평을 한다. 이호문과 같이 공부했다는 김맹헌도 그를 “사람됨이 광망(狂妄)해 족히 따질 것이 못 된다”고 했다. 

    참석자 모두가 동의했듯이 이호문의 인간됨이 그릇되고, 사적인 감정에서 사초를 작성했다는 것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큰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과연 사관이 남긴 사초를 수찬관들이 임의로 제거해도 되느냐 하는 문제다.

    “둘 다 보아라, 그리고 판단해라”

    참석자 대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만일 한 사람이 사정(私情)에 따라서 쓰면 천만세(千萬世)를 지난들 능히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삭제할 것을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 모임에서 비교적 젊은 층에 속했던 성삼문은 사초를 꼼꼼히 살펴본 후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이호문의 사초(史草)를 살펴보건대, 오랫동안 연진(烟塵)에 묻히어 종이 빛이 다 누렇고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한데,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와서 추서(追書)한 것이 분명하니, 삭제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호문이 쓴 문제의 그 기록이 새롭게 작성됐다는 것이며, 그러니 삭제하자는 주장이다. 황보인 역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삭제하자고 말한다. 

    어떤 회의든 자유롭게 의견이 개진된다면, 만장일치는 나오기 어렵게 마련이다. 이날 회의도 그랬다. 깐깐한 최항과 정창손이 소수 의견을 냈다. 

    “이것은 명백한 일이니 삭제해도 무방하지만, 다만 한번 그 실마리를 열어놓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경솔히 고칠 수 없다.” 

    이 회의의 결론은 실록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토론의 전개 과정만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봐서는 황희에 대한 이호문의 기록을 삭제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세종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이호문의 기록이 버젓이 살아 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이 회의 다음 해에 계유정란으로 인해 김종서와 황보인은 불귀의 객이 됐다. 삭제를 주장했던 조정의 원로가 사라지고, 최항이 마지막 수찬관이었으니 최항이 고집을 꺾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자신이 졸았다고 사헌부가 탄핵한 데 대한 복수였을 수도 있지만, 이호문이 왜 황희에 대해 그런 악평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호문의 기록과 ‘세종실록’ 수찬관들의 회의 기록이 다 남아 있어, 후대인들은 ‘세종실록’과 ‘단종실록’을 통해 그 둘을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두 기록을 모두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누가 진짜였고, 누가 가짜였는지, 누가 역사의 돌을 맞아야 하는지 후대인들은 알 수 있다. 

    “둘 다 보아라, 그리고 판단해 보아라”라고 수찬자들은 후대에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조선시대 기록 정신의 냉혹함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호문의 기록은 가짜 뉴스에 해당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거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가짜 뉴스는 생산되지 않음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생산된다 해도 역사의 돌을 피할 수 없다. 곡필(曲筆)의 허망함이 이러하다.

    하응백
    ● 1961년 대구 출생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경희대 대학원 박사
    ●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 ‘부권상실의 시대 그 소설적 ● 변주’로 평론가 등단
    ● 저서 ‘황동규 깊이 읽기’
    ● ‘이옥봉의 몽혼’ ‘창악집성’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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