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런 희망과는 달리 사회주의 1당 독재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이끄는 동독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무장하여 부르주아 사상과 종교를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냉전의 위협이 날로 거세지던 때이기도 했다. 동독의 행정구조와 법체계는 소련을 모범 삼아 정비됐고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도 이뤄졌다.
동독에 아무 연고도 없던 메르켈 가족이 정착한 곳은 인구가 300여 명에 불과했던 브란덴부르크 주 ‘깡촌’ 크비트초프였다. 메르켈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신에 대한 경외로 생각하는 가장(家長) 덕분에(?) 가난하게 살았다. 3년이 지나 템플린이라는 작은 마을로 옮겨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 숙소와 성직자 평생교육원이 있는 그곳은 일반인이 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지만, 어린 메르켈은 동물을 쫓아 뛰어다니고 식물을 관찰하고 초원을 쏘다녔다.
게다가 교회라는 특수한 공간은 어릴 적부터 그에게 삶과 죽음, 궁핍과 정의, 의무와 동정심이라는 커다란 문제들과 대면하게 했다. 교회에 수용된 장애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정상적인 신체조건이 반드시 즐거움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빈약한 환경이 오히려 그를 일찍 철들게 한 셈이다.
부모는 자식을 엄하게 키웠다. 말을 듣지 않으면 체벌도 서슴지 않았고 용돈을 몰수했으며 외출금지령도 내렸다. 부족한 것은 많았지만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치 시스템의 억압과 감시는 ‘깡촌 교회’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전화를 할 때도 항상 슈타지(비밀경찰)가 도청하고 있음을 의식해야 했고, 중요한 대화는 숲에서 산책할 때까지 미루는 게 좋다는 생활의 지혜(?)를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익히게 됐다.
선교활동과 자선사업까지 제한받는 상황에서 메르켈 아버지의 처신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회가 굳이 체제에 반대할 이유도 없고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를 형성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기에 정부와 별 마찰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우리에겐 숲과 호수가 있었다”
1961년 8월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당시 메르켈은 일곱 살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서독의 친가와 외가를 자주 가곤 했는데, 어머니와 함께 함부르크에 사는 외할머니 댁을 방문하고 돌아온 며칠 뒤 장벽이 세워졌다. TV뉴스를 듣던 어머니가 “이제는 더 이상 외갓집을 가지 못한다”고 울먹이던 모습이 어린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메르켈은 성인이 되어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 이후 동독을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아예 없어지면서 동독이냐 서독이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회고했다.
장벽이 세워졌다고 교류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소포 같은 우편물은 서로 보낼 수 있었다. 메르켈 식구들에게 온 것은 주로 인스턴트 수프, 비누, 청바지 등 자유시장경제의 산물들이었다. 이를 통해 서독 자본주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10대 시절 그의 우상은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였다.
메르켈은 나중에 기자로부터 “서독에 태어났으면서도 동독에 살아야만 했던 것을 불평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장벽이 세워지기 전 여름방학 때 서독에 사는 사촌들이 우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서독 애들이 동독 애들보다 더 행복한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사촌들도 그들의 부모한테 혼나는 것은 똑같았다.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한테 없는 물건을 그들이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그 애들에게 없는 숲과 호수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독이라는 환경은 내가 잃은 게 뭔지 계속 고민하도록 도와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상황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성격을 갖게 됐다.”
메르켈의 회고를 듣다 보면 낙천적인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누구나 꿈꾸는 성공의 비결인 ‘긍정의 힘’을 만들어내고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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