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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⑤]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 ‘코리아에 관한 모스크바의정서’는 발표 직후 남과 북에서 서로 달리 받아들여졌다. 이 의정서는 한반도 상황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면 이 의정서가 발표될 때까지 남과 북에서는 어떤 정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을까. 단순화해서 말해, 북에서는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이 세운 계획표에 따라 극동러시아의 소련군에서 훈련을 받던 김일성 소련 대위가 귀국해 빠르게 권력중앙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모스크바의정서가 발표된 시점에 북에서는 이미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중앙이 형성돼 있었다. 반면에, 남에서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견제로 뒤늦게 귀국해 정치세력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의정서가 발표된 시점에 남은 북에서 볼 수 있는 단일 지도자 중심의 권력중앙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논점 1
소련에서의 김일성 행적은 어떤 의미를 가졌나.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 [동아DB]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왼쪽에서 두 번째). [동아DB]

여기서 우리는 먼저 김일성과 이승만이 각각 평양과 서울로 돌아온 과정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 

김일성, 베리야에게 연결되다? | 1930년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돼 게릴라운동에 참여한 김일성은 일제 관동군의 대규모 토벌작전에 쫓겨 다섯 명의 동지와 함께 1940년 11월 소련 영토인 극동러시아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부대 안에서 식사와 세탁을 맡고 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 김일성은 28세였고, 김정숙은 23세였다. 

훗날 북한 권력구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최용건, 김책, 최현, 오진우, 임춘추, 오백룡 등을 비롯한 여타의 조선인 유격대원들도 서로 다른 방면에서 극동러시아로 들어왔다. 김일성을 비롯한 그들은 그들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련극동군에 의해 구금됐다. 그러나 만주에서 이곳으로 먼저 옮겨왔던 동북항일연군의 중공군 지도자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보증으로 석방됐다. 이로써 일정한 규모의 무리를 이룬 그들 모두는 소련이 1942년 8월 중국인 유격대원들과 조선인 유격대원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88특별국제여단에 편입돼 러시아어는 물론 낙하산훈련과 정보훈련을 포함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은 김일성을 비롯한 이 국제여단에 소속된 조선인 대원들이 소련 육군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의 지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로마넨코는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의 보로시로프에 본부를 둔 소련극동군의 제1독립군총정치국장으로, 자신의 휘하에서 선전부장직을 맡은 그레고리 메클레르 중령을 때때로 국제여단에 보내 교육 현황을 시찰하게 했다. 메클레르는 김일성을 면담하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로마넨코에 보고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소련극동군 산하 제25군은 북한을 점령하면서 평양에 소련점령군사령부를 설치한다. 로마넨코는 이 사령부에서 제2인자 또는 제3인자로 간주되는 민정관리총국장으로 일하고, 메클레르는 그의 지휘를 받는 정치과장으로 일하며, 김일성을 위해 여러 정치공작을 입안하고 추진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것보다 더 주목되는 사실은 이 국제여단이 소련의 국방부가 아니라 내무부에 소속됐다는 사실이다. 그때 내무부는 국경경비에 대해서도 책임을 맡았기에 자체의 국경수비대를 거느렸는데, 국경수비대에 속한 사람은 모두 소련 육군 계급이 아니라 소련 내무부 계급을 부여받았다. 비록 내무부 계급이라고 해도 계급의 명칭과 표지는 군 계급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김일성을 포함한 국제여단 대원들 역시 소련 내무부 계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때 정규경찰과 비밀경찰 그리고 국경수비경찰 모두를 관장하던 내무장관은 소련의 제2인자로 불리던, 악명 높은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그래서 김일성의 존재를 베리야가 알게 됐으며, 우리가 곧 보게 되듯, 훗날 이오시프 스탈린이 누구를 북한 최고권력자로 결정할지를 놓고 몇몇 후보를 비교할 때 베리야가 김일성을 강력히 천거해 결국 김일성으로 결정된다. 



김일성이 선두주자로 뽑힌 까닭은? | 김일성은 곧 이 국제여단의 조선인 사이에서 선두주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국제여단의 제1대대장으로 뽑히면서 대위 계급을 받았으며,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 말 국제여단 안에 ‘조선공작단위원회’가 결성됐을 때 ‘군사와 정치 책임자’로 지명됐고 특히 앞으로 조선에서 조선공산당이 ‘건립’되는 경우 ‘영도책임’을 맡기로 결정됐다. 이것은 앞으로 북한에서 전개될 권력투쟁에서 김일성에게 유리한 조건이 된다. 

그러면 그때 국제여단에는 최용건과 김책 등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무엇이 김일성에게 이러한 지위를 부여했을까. 최용건의 경우 전처가 일본군에 포로가 된 뒤 전향했고 후처는 중국인이었다. 김책은 소련군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근신 처분을 받고 있었다. 김일성에게는 그러한 문제들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최용건과 김책보다 각각 12년과 9년 아래인 33세로 가장 건강했고 활력에 넘쳤으며, 만주의 조선인들과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최용건이 대체로 참모형에 가까웠음에 비해, 김일성은 전적으로 야전사령관형이었다. 

이 무렵의 김일성에 대해 소련 육군 소령으로 국제여단 교관으로 배치된 조선인 박성훈은 “김일성은 빨치산 전투전술을 충분히 연구했으며, 훌륭한 체격을 갖추었고 지휘관다운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회상했다. 그의 회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사람은 남에게 호감을 주었으며 유쾌했다. 그것에 덧붙여 그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녔다. 자신을 사랑했고 모든 면에서 다른 장교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함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의 지난 사생활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종 만주에서 벌인 전투에서 자신이 세운 공적들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국제여단 고위 지휘관들의 회상 역시 김일성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국제여단 여단장 슈린스 육군 대령은 “나는 항상 그의 내부에 있는 커다란 야심을 눈치채곤 했다. 이 사람이 붉은군대의 진정한 지휘자였다. 우리 여단에서 근무한 모든 조선인 가운데 이 사람이 가장 정치에 능수능란했고 군사 업무를 잘 알고 있었다”고 보고했으며, 부여단장 세료진 육군중령은 “김일성은 진정한 군 장교이며 진정한 레닌주의자였다. 정치선동가로서 그는 여단의 다른 대대장들 가운데 두드러졌다”고 보고했고, 정치장교 아다모프 육군 중령은 “김일성은 작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더구나 외면적으로 언제나 쾌활하고 친절한 모습을 유지했다”라고 보고했다. 

김정일의 출생을 둘러싼 논쟁 |
극동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때, 김일성·김정숙 부부는 장남 김정일의 출생을 보았다.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 15일 백두산의 항일유격대 밀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공식 설명은 사실에 어긋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우선 태어난 해에 대해서다. 김일성·김정숙 부부가 생활한 곳으로 알려진 보로시로프 브야츠코에의 한 마을에서 평생을 산 아우구스타 세르게예브나는 2002년 73세의 나이로 김정일에 대해 “그는 1941년 2월 16일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그의 동생은 서너 살 때쯤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회상했다. 그녀의 이 회상이 있기에 앞서, 김정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이 1941년 출생했으나, 1912년 태어난 김일성의 생일 축하 행사와 자신의 생일 축하 행사를 같은 주기(周期)에 치르게 하기 위해 김일성과의 나이 차이를 30년으로 만들고자 1942년 출생한 것처럼 바꿨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만일 그녀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김정일이 상징조작에 능하고 상징조작을 자신의 통치에 활용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주장은 더욱 힘을 얻는다. 

이어 태어난 곳에 대해서다. 많은 연구자는 1942년 김일성·김정숙 부부는 보로시로프 일대에서 생활했는데, 김정일이 어떻게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 주장은 김정일 우상화를 위한 또 하나의 신화 만들기라고 비판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북한 당국이 1982년 처음으로 김정일 전기를 출판하면서 출생지를 명백히 지적하지 않은 채 ‘피어린 항일의 결전의 장(場)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정일에 대한 개인숭배가 정점으로 치닫던 1984년부터 북한 당국은 그가 백두산의 항일유격대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성지(聖地) 백두산 밀영’을 순례하도록 강제한다.


논점 2
김일성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귀국했을까.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해 들어가던 시점을 전후해 스탈린은 소련극동군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에게 소련의 뜻에 맞게 북한을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바실리예프스키는 베리야가 이끄는 비밀경찰기구의 극동지부장과 협의한 뒤 김일성을 추천했다. 이미 김일성을 잘 알고 있던 베리야가 이 추천에 동의하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곧바로 재가했다. 

스탈린, 김일성을 면접? | 그런데 스탈린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증언이 뒤따르고 이 증언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의 부관이었으며 훗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이 된 이반 코바넨코의 회상에 따르면, 9월 초 어느 날 스탈린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에게 자신이 김일성을 직접 면접하려고 하니 급히 모스크바로 비밀리에 보내라고 지시했고, 바실리예프스키가 김일성을 비밀경찰 요원들과 함께 군용기에 태워 보내자 스탈린은 특별 별장에서 네 시간에 걸친 면접을 하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뒤 다시 극동군총사령부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다시 코바넨코에 따르면, 스탈린은 바실리예프스키에게 “김일성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북한으로 보내고, 소련군이 전적으로 돌보아주라”고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바실리예프스키는 소련극동군 안에서 북한을 관장하는 제1방면군의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에게 스탈린의 지시를 전달했고, 스티코프는 평양을 점령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 레베제프에게 “김일성에 대해 경호를 철저히 하고 그의 활동을 적극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 회상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 그렇게 묻게 되는 까닭은 이 ‘사실’은 소련의 문서에서나 어떤 다른 사람의 회고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전적으로 한 개인의 회상에 등장할 뿐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레베제프가 9월 초 스티코프로부터 “김일성이 곧 평양에 도착할 예정이니 잘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이다. 레베제프는 “스티코프는 나에게 ‘김일성이 비밀리에 지방을 순회하면서 각계각층의 유지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라’고까지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메클레르 역시 같은 취지로 회고했다. 

김일성, 관동군을 격파하며 개선하다? 아니다, 소련군함 푸가초프號로 귀국하다 | 북한 당국은 오랫동안 김일성이 1945년 8월 15일 자신의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며 일제의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조선으로 개선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소련극동군 정보국 참모 자이체프 소령의 인솔 아래 소련함정 푸가초프호(號)를 타고 9월 18일 원산에 도착했다. 에밀리안 푸가초프는 제정러시아의 여걸 예카테리나 대제(大帝) 때 대규모 농민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혁명가로, 이 함정의 이름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배는 미국이 건조한 3000t급 트롤선인데, 미국은 자국의 무기대여법에 근거해 이 배를 소련에 넘겨줬다. 역설적이게도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배’를 타고 귀국한 셈으로, 이 배는 개선호(號)로 명명된 채 오늘날까지 원산항에 보존돼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이 함정에서 내린 한 무리의 공산주의자 가운데 소련 국적의 조선인을 제외한 나머지 60명이다. 이들은 훗날 북한에서 만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 88특별여단에 함께 몸담고 있었기에 88특별여단파라고 불렸고, 그저 빨치산파라고도 불렸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 국적의 조선인들은 북한에서 소련파라고 불렸다. 

김일성은 소련 대위 계급장을 달고 소련군이 부여한 평양시군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의 자격으로 9월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들과는 별도로, 최용건은 저우바오중과 연락할 일이 있어서 동승하지 못해 10월 따로 귀국한다.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과 아들 김정일은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로 귀국한 뒤 곧 평양으로 합류한다. 

김일성이 귀국한 뒤 소련군은 스탈린의 9월 20일자 지령에 따라 북한에 단독 정권을 세우기 위한 조치들을 빠르게 밟아나갔다. 구체적으로, 소련군은 10월 10일 평양에서 북한 전체를 통할하는 공산당 중앙기관으로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을 창설했으며, 10월 8~11일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련합회의’를 소집해 북한 전체를 통할하는 행정중앙기관으로 10개 국(局)을 두도록 결정했다. 이로써 ‘북한의 태아적 정부’가 출범했다. 이러한 법적·제도적 조치를 끝내자 소련군은 10월 14일 소련군을 환영하는 평양군중대회를 열고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등장시켰다.


논점 3
이승만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귀국할 수 있었나.

앞에서 보았듯, 김일성은 스탈린의 비호를 받으며 소련군이 자신의 북한점령계획에 따라 정해놓은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한 채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귀국이 늦어진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나? | 이승만은 김일성의 평양 귀환보다 1개월 정도 늦게, 그리고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때로부터 이틀이 지난 10월 16일에야 서울에 들어왔다. 이것의 의미는 컸다. 

당시 반(反)이승만 세력은, 특히 좌익 세력은,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계획에 따라 미국 정부의 ‘앞잡이’로 귀국했다고 헐뜯었고, 그러한 설명은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살핀 내용은 그것이 사실의 왜곡이었고 정치 모략이었음을 방증한다. 

이승만의 귀국을 둘러싼 미국 정부 안의 논쟁 |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한 이 노(老)애국자의 귀국이 어째서 이렇게 어려워야 했던가. 원래 미국 정부는 반소반공 성향을 지닌 이승만이 귀국하면 소련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그의 귀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한에서 좌익의 힘이 크게 드러난 데 반해 우익의 힘은 미약함을 직시한 하지 사령관은 그의 귀국이 좌익을 견제하고 우익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러한 판단에는 특히 미군정에 소속된 클래런스 윔즈 대위가 9월 28일 작성한 ‘코리아와 임시정부’라는 보고서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 미육군 전략정보처(OSS) 대원으로 활약하며 임정의 지도자들과 접촉했던 그는 임정이 코리아의 독립운동을 이끈 주도 세력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건의했는데, 하지가 그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는 곧 이승만 귀국안을 맥아더에게 건의했으며, 맥아더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 마침 전략정보처의 실력자인 클래런스 굿필로 대령 역시 국무부에 이승만의 귀국을 도와줄 것을 건의했다. 이에 국무차관 겸 국무장관대리 딘 애치슨이 최종 결정을 내리면서 국방부에 그의 귀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미육군 전략정보처 문관대령 신분으로 10월 4일 미군용기 편으로 워싱턴 공항을 출발해 12일 도쿄에 도착했으며, 거기서 나흘을 머문 뒤, 맥아더가 내준 미군용기 편으로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논점 4
이승만·맥아더·하지의 비공개 3자회담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 계획이 논의되다?

도쿄에서의 3자회담 | 이 대목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검토해야 할 논점이 있다. 이승만이 도쿄에서 머물며 맥아더, 그리고 급히 비공개리에 도쿄를 방문한 하지와 여러 차례 비공개 회담을 가졌는데, (ⅰ) 이 회담에서 앞으로 남한을 단위로 하는 과도적 정부를 세운다는 데 합의가 이뤄졌으며 (ⅱ) 이에 따라 10월 15일 맥아더의 정치고문 조지 애치슨(George Atcheson)은 남한에 김구 및 김규식 등 임정 요인들을 핵으로 삼아 ‘행정부적 정부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한인행정집행위원회(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를 설치할 것을 국무부에 건의했다는 취지의 주장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 도진순 교수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도쿄 회동”이 우리가 앞으로 살피게 되듯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에 대한 반대와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반대의 원천이 되고 결국 남한단독정부 수립의 출발점이 된다고 보았다. 미군정은 11월 초 전한인행정집행위원회안을 연합자문위원회(Coalition Advisory Committee)안으로 발전시킨다. 

미군정과 이승만이 소군정과 김일성에 앞서 단독정권 수립을 추진했다? 아니다! | 이 사실에 대해서도 논쟁이 뒤따랐다. 한반도에서 분단 정권의 수립을 먼저 추진한 쪽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아니라 미군정과 이승만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우리는 이 회담이 열린 시점이 1945년 10월 14~16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시점이면 소련군은 한반도에서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군이 내놓은 일련의 제의를 모두 거부한 채, 우리가 논점 2의 끝부분에서 지적했듯, 스탈린의 9월 20일자 지령에 따라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 위한 조치들을 밟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을 것이며, 따라서 소련군의 그러한 시도에 대응하는 조치를 계획했을 것이다.


논점 5
이승만의 ‘대동단결론’을 둘러싼 논쟁

이승만, “무조건 합치자”고 호소 | 이승만은 귀국 즉시 “우리 모두가 사감(私感)과 사리(私利)를 버리고 합심협력해야 한다”는 취지로 연설했다. 언론은 그것을 ‘대동단결노선’으로 명명했다.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이승만의 이 “대동단결노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그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친일파 숙청’이었는데, 이승만이 ‘친일파 숙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를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합칠 것을 강조하면서 ‘친일파’를 끌어안은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친일파 숙청’에 반대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각당 각파가 통합을 성취해 독립국가를 세운 뒤에 ‘친일파’를 숙청해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그래서 그의 입장은 ‘선(先)독립국가수립 후(後)친일파숙청’으로 불렸다. 

38도선 이북에서 공산주의를 앞세운 전체주의적 독재국가 소련의 군사점령 아래, 동유럽에서처럼 소련이 또 하나의 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남한에서 거기에 맞설 국가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노선은 이해될 만하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출범하다 |
그러한 믿음에서, 이승만은 11월 2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송진우·김성수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 안재홍의 조선국민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등 네 정당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공식으로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한국독립당의 경우, 김구는 아직 환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이 ‘친일파 숙청’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불참했다. 이 결성대회에서도 이승만은 모든 세력의 ‘합심’을 강조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틀 뒤 미국·소련·영국·중국 등 연합국들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이 메시지는 (ⅰ) 코리아를 남한과 북한으로 분할한 ‘중대한 과오’가 연합국에 있음을 지적하고 (ⅱ) 코리아가 자주 독립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한 데 이어 (ⅲ)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 아래 환국하면 1년 이내에 ‘전국선거’를 단행할 것임을 약속함과 아울러 (ⅳ)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만큼 공동신탁제를 거부한다”고 천명했다. 그들은 연합국이 코리아에 대해 국제적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 메시지는 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한반도의 분단이 아니라 완전한 자주적 독립을 목표로 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은 왜 이승만의 제의를 거부했나? | 이 무렵인 11월의 어느 시점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밀사를 평양의 조선민주당 위원장 조만식에게 보내, 조만식과 김일성을 서울로 초청하면서 서울에서 함께 조선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고 제의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남한단독정부 수립보다는 남북한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스티코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말렌코프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조만식은 이 제의를 김일성에게 전달하면서 북한이 남한의 계획에 참여해 12월까지 통일된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했다. 조만식은 이 구상이 실현된다면 남한과 북한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1945년 말까지 동시에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거절했다. 

김일성이 거절한 배경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 김일성은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에서 자신의 지도권을 확립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어서 서울을 방문할 시간 여유를 갖지 못했다. 소련점령군도 그의 서울 방문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소련과 김일성이 남북을 통튼 통일정부 수립에 열의가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논점 6
김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귀국할 수 있었나.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 맨 앞줄 중앙의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 맨 앞줄 중앙의 백범 김구 왼쪽이 김규식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그러면 장제스의 중국국민당 정부가 머물던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지도자들의 환국 과정은 어떠했나? 

김구, ‘당면정책 14개 조항’ 발표 | 일제의 항복이 알려진 직후 임정의 요인들 사이에서는 대응 방법을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했다. 곧바로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어떤 의원들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주장했으며 어떤 의원들은 임정을 해산한 뒤 귀국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김구는 “임시정부 해산 운운은 천만부당하고 총사직도 불가하다. 우리가 장래에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에게 정부를 바친 뒤 국무위원이 총사직하는 것이 옳다”고 설득했다. 

김구는 9월 3일 임시정부 주석의 이름으로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전국적 총선을 통해 정식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는 임정이 국내질서와 대외관계를 주도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동시에 중국전구(中國戰區)의 미군최고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ⅰ) 임정이 귀국한 뒤 조선의 국내 치안 질서는 임정에 맡길 것 (ⅱ) 미군정은 임정의 정치활동에 대해 간섭하지 말 것 등 4개 조항을 제시하고 회답을 기다렸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면서 김구는 임정이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귀국할 것임을 다짐했지만, 임정 요인들은 일제 패망으로부터 100일이 지나서야 환국할 수 있었다. 김구·김규식·이시영 등 제1진은 11월 23일에야, 신익희·조소앙·김원봉·김성숙 등 제2진은 12월 2일에야 겨우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련 정부가 임정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 한 이유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미국 정부가 임정의 귀국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임정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할 중국국민당 정부 역시 미온적이었던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됐다. 

임정에 대한 미국 정부 안에서의 토론 | 그러면 미국 정부는 왜 임정의 귀국에 소극적이었던가? 첫째, 미국 정부는 임정이 ‘정부’임을 내세울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중국국민당 정부의 비호를 받았던 만큼 임정이 귀국하면 미군정의 남한 통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경계한 것이다. 둘째, 미국 정부는 소련 정부가 중국국민당 정부의 후견을 받는 존재로 인식하는 임정을 조기에 귀국시키면 소련 정부는 미국 정부가 중국국민당 정부와 제휴해 임정을 중심으로 한반도 전체를 통할하는 임시정부를 세우려 할 것으로 받아들여 북한에서 자신의 독자적 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공고화하는 쪽으로 가게 되리라고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임정을 귀국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요인들은 제1진으로 귀국시키고, 상대적으로 좌파적인 요인들은 제2진으로 귀국시켜 그들 자체를 분열시키고 특히 좌파적 요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임정은 이미 이 점을 파악하고, 1945년 8월 30일 외무부장 조소앙으로 하여금 충칭에 주재하는 미국대사관을 방문하게 하고 임정의 입장을 요약한 5개항의 ‘비망록’을 전달하게 했다. 미대사관은 이것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이 문서에서 임정은 (ⅰ) 러시아 내부의 한인들과 옌안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코리아로 입국해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려고 하고 있고 (ⅱ) 임정을 귀국시킨다면 임정 지도자들은 미국 점령군과 국무부의 뜻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ⅲ) 결국 코리아가 민주국가로 발전하느냐 또는 공산국가가 되느냐는 미국이 취할 태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임정은 이 문서에서 자신의 친미적 성향을 강조함으로써 미국 정부의 호의적 반응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정의 이러한 주장은 미국 정부와 미점령군을 설득하지 못했다. 미국 측은 여전히 임정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다. 두 가지 사례를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장제스는 김구와 임정에 귀국한 뒤 독립운동에 쓰라고 20만 달러의 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김구를 통한 중국국민당 정부의 한반도 내 영향력 행사를 차단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돈의 국내 반입을 막았다. 

둘째, 미군정은 김구가 귀국성명을 경성방송국을 통해 발표하고자 했을 때 2분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만 허용했다. 그래서 그는 “나와 (임정의) 각원일동은 (…)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논점 7
남한에서 왜 정당통합운동은 실패했는가.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1945년 12월 1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전국환영대회’에 참석해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앞줄 왼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1945년 12월 1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전국환영대회’에 참석해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앞줄 왼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이 알려지면서 민중의 기대는 그들에게로 쏠렸다. 해방이 돼 100일이 넘었는데도 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혼란한 상태에서 남한의 민중은 “이제 임정이 돌아왔으니 임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질서가 태동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다시 갖게 됐다. 이승만이 그날로 그를 방문한 것은 민중의 그러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민중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임정은 김구 주석의 주재로 1945년 12월 6일 경교장에서 국내 첫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승만은 임정이 임명했던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곧 미묘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자신이 이끄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임정을 ‘엄호하는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이 기구가 남한 정치세력의 통합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을 표시한 데 대해, 김구는 자신이 이미 발표한 ‘당면정책 14개 조항’에서 언급된 ‘국내 과도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기구로 인식한 것이다. 

이렇게 김구와 이승만 사이에 갈등의 싹이 보이는 가운데, 임정의 중요한 지도자인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가까워지는 조짐을 보였다. 1945년 12월 이후, 그는 일제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총독부에서 행정 경험을 쌓은 장경근과 최하영 및 윤길중 등을 중심으로 행정연구회를 발족시켜 장차 수립될 정부의 조직과 정책 등을 연구하게 했는데, 이 행정연구회는 결국 이승만에 연결된다. 1945년 12월 중순이 되면 그와 이승만의 제휴는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논점 8
당권을 장악한 김일성의 연설은 어떤 뜻을 담았나.

그러면 북한에서는 정치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었나? 

‘서울중앙’ 이론을 배격하다 | 가장 중요한 새로운 국면은 1945년 12월 17~18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전개됐다. 여기서 우선 지적돼야 할 것은 이 회의 때부터 ‘중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사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에서 박헌영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을 ‘중앙’으로 인정하는 ‘서울중앙’ 이론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집결체를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으로 불렀던 것인데, 이 ‘서울중앙’ 이론을 거부하는 첫 시도 가운데 하나로 확대집행위원회 앞에 ‘중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김일성, 책임비서로 선출되다 |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북부조선당의 착오와 결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보고했다. 매우 긴 이 보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됐다. 

“동무들! 쏘련의 붉은군대는 우리 인민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왔다. 그는 우리 조국의 령토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영원히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붉은군대와 그의 지도자 쓰딸린동무가 우리에게 준 형제적 방조를 언제나 잊을 수 없다.” 

김일성과 북한 당국은 1960년대 들어가서는 이러한 말을 하지도 않고 지난날에 그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뜻에서 지난날의 출판물들을 고친다. 

그러면 김일성의 이 연설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을까. 첫째, 이 연설에는 남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우리가 이미 살핀 그 이전의 몇몇 공개적 연설에서도 그는 남한에 대해 사실상 침묵했다. 이것은 이때 남한의 정치지도자들이 38도선에 대해 자주 언급한 사실과 대조된다. 그의 일차적 관심은 오로지 북한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이 연설은 그가 소련에 대해,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의 가르침에 대해 매우 충성스러운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레닌을 ‘우리 수령’이라고 부르며 네 차례 거명했고 스탈린을 일곱 차례 거명했다. 거기에 더하여, ‘레닌선집’에서 두 차례, 그리고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제(諸)문제’에서 두 차례, 스탈린의 ‘당사업의 결점 등에 대하여’에서 한 차례 인용하기도 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그들의 저작들 이외에는 어느 누구의 이름이나 저작도 언급되지 않았음에 미뤄, 이 연설은 그가 얼마나 깊이 레닌과 스탈린에 의존해 있었는지 말해주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야체이카, 구룹빠, 쀼로 등 러시아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소련공산당 교육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뒷날 북한의 공식 간행물에 이 연설을 수록하는 경우 러시아 단어들을 가능한 한 줄였으며, 특히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언급을 거의 삭제한다. 레닌을 ‘우리 수령’이라고 호칭한 대목은 완전히 삭제한다. 

셋째, 이 연설은 그가 레닌주의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이 노동자 중심의 당이 돼야 한다는 것, 하부조직은 상부조직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철의 기율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직업동맹은 당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 등은 모두 레닌주의 당조직 원칙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때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일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기섭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오기섭은 직업동맹은 당의 지도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넷째, 이 연설은 그가 군중노선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당의 군중과의 연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당의 일꾼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군중노선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 이후에도 일관되게 계속되며 그의 정치 자산이 된다. 

다섯째, 그는 친일파의 당내 침투에 대해 경고했다. 여섯째, 이 연설은 그가 1945년 11월 하순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공학생시위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사건이 사회민주당의 교사(敎唆)에 의해 일어났다고 파악하면서도 당이 ‘군중의 기분’을 알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여섯째, 이 연설은 그가 통일전선노선에 여전히 집착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 역시 오기섭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주의자에 비해 국내 기반이 약한 그가 자신의 지지자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입당시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일곱째, 그는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이란 말을 전혀 쓰지 않았으며 ‘북부공산당’ ‘북조선공산당’ ‘우리공산당’이란 말을 썼다. 그는 ‘분국’이란 말이 싫었던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1946년에 들어가서는 ‘북조선공산당’이란 호칭 하나만을 쓰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이 연설은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 같다는 느낌 또는 조선어에 능숙하지 않은 소련계 조선인이 쓴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볼셰비크들이 군중들과 광범한 련락을 보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당적할 자가 없을 것임을 정당하게 시인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볼셰비크들이 군중들과 절연되어 있고 군중들과의 련락을 잃으며 관료주의적 색채에 덮여 있다면 그들은 모두 힘을 상실할 것이며 폐허지로 화하고 말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가장 중요하게, 김일성은 12월 18일 소련점령군의 강력한 영향력 행사에 힘입어 ‘북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선출됐다. 입국한 때로부터 90일째 되는 시점에 그는 북한에서 공산당 최고책임자의 자리를 획득한 것이다.



신동아 2020년 12월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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