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미국‧영국서 이태원 참사 터졌다면 더 많은 세금 썼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피해자가 아닌, 실은 우리 모두를 위해 쓰이는 돈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2-11-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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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국가가 돈 쓰느냐는 볼멘소리

    • 9‧11 테러, ‘우리의 일’로 받아들인 美

    • 英에서 2억5670만 파운드 예산 쓴 이유

    • ‘공동체’가 위협받는다고 여겼기 때문

    11월 8일 이태원 참사 현장과 가까운 지하철역인 서울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출입구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메모지가 가득 붙어 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11월 8일 이태원 참사 현장과 가까운 지하철역인 서울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출입구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메모지가 가득 붙어 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이태원 참사는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내가 낸 세금이 들어가는 것은 반대다.’

    10월 29일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이후 일부에서 접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뉴스 댓글란을 보면, ‘놀러 갔다가 죽은 사람에게 왜 국가가 돈을 쓰느냐’는 식의 볼멘소리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야당보다는 여당 지지층에서 이런 주장에 호응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 나라의 미래가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정치권은 지지층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정치가 이러한 관점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머잖아 심각한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놀러 나갔다 죽었는데 보상금이 웬 말이냐’는 태도에 ‘본인책임론’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자. 본인책임론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요즘 유행어를 빌자면, 그날 이태원역 근처에 가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니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서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즐거움은 참석자 개인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곳에서 겪게 된 비극과 그로 인한 슬픔 역시 참석자와 가족들이 개인적으로 감당해야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논리 같다. 개인의 행동이니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의 정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수습이 길어지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까지 이어졌던 지난 정치사를 곱씹고 있는 이들로서는 더더욱 ‘유가족이라고 단체 만들어서 돈 달라고 하는 꼴 더 못 본다!’는 식의 태도를 고수할 법도 하다. 그런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놀러 나갔다가 죽었다고 세금 써서 수습하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큰 충격을 안기는 참사가 벌어졌을 때, ‘이건 개인적인 일이다’라며 뒷짐 지고 있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비용을 대고 사태를 수습하며 사망자와 부상자 및 유족들을 위로한다. 그러한 과정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초당파적 협력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국가라는 조직, 사회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11일 그 이후

    2001년 9월 11일.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진주만 공습 이후 단 한 번도 본토를 공격당한 적 없었던 미국인들은 말 그대로 공황 상태였다. 당시의 참상 중 몇몇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청명하게 맑은 가을 하늘 너머로 뉴욕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 일명 ‘쌍둥이 빌딩’이 불타고 있었다. 탈출할 길을 찾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살기 위해 수십 층 빌딩 밖으로 몸을 던졌다. 떨어진 시신에서 튄 핏방울 때문에 세계무역센터 인근에는 붉은 안개가 자욱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다. 방송 관계자들도 모두 패닉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장면이 여과 없이 송출됐다.

    모든 미국인들이 그 테러를 ‘우리의 일’로 받아들였다. 사건 직후인 9월 22일 미국 연방의회는 ‘9‧11 테러 피해자 위로 펀드’(September 11th Victim Compensation Fund)를 결성했다. 비행기 충돌 및 건물 파편 등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이들에게 2004년 6월까지 총 총 70억 달러 이상이 지급됐다.

    미국 정부의 ‘세금으로 피해자 돌보기’는 계속됐다. 2011년 1월 2일,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9‧11 테러 피해자 위로 펀드를 부활시키는 자드로가 법(Zadroga Act)에 서명했다. 암, 정신질환, 그 외 테러의 영향으로 발생했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질병들에 대한 치료와 보상을 위한 것이었다. 피해 당사자들의 신고를 받고 추산해보니 27억 달러 이상이 비용으로 집계됐다. 다양한 영역에서 기부가 들어왔으나 기본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재정으로 충당했다. 그 후에도 9‧11 테러 피해자 위로 펀드는 여러 차례 활동 기간을 연장하며 피해자 구제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사후 대처를 ‘본인책임론’에서 보자면 어떨까. 테러는 안타까운 일이다. 9‧11은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총기 사고로 죽는 나라 아닌가. 그 가해자 중에는 무슬림 극단주의자들도 있고, 그들은 명백히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가령 최근 작가 살만 루슈디는 뉴욕에서 북토크를 하던 중 무슬림 극단주의자의 칼에 찔려 한쪽 눈을 잃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왜 살만 루슈디에게 세금으로 보상하지 않는가.

    과연 ‘공정’하냐고?

    11월 5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11월 5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다른 예를 들어보자. 11월 5일자 ‘뷰파인더’(‘이태원 참사를 ‘후진국형 사고’라고 말하지 말라)에서 다룬 영국 그렌펠 타워 화재 사건은 어떨까. 그 사건의 수습에도 영국 정부의 세금이 투입됐다. 사건 발생 후 1년이 지난 2018년 6월 14일, BBC는 “그렌펠: 화재 생존자들에게 약속된 돈은 어떻게 되었나?”(Grenfell: What's happened to money promised for fire survivors?)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영국 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내용이지만, 우리는 반대로 영국이 해당 사건에 얼마나 많은 공적 자금을 투입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건 발생 직후 영국 정부는 5890만 파운드를 제공했다. 그 후로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여러 차례 제기돼, 결국 중앙정가 내놓은 돈을 포함해 투입된 예산은 총 2억5670만 파운드에 달했다. 정부가 내놓은 7800만 파운드 중에는 화재 생존자들에게 새로운 주거를 제공하고, 그렌펠 타워 화재 현장을 수습하며, 생존자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것뿐 아니라, 장례비용 및 당장의 생계를 위한 급전까지 포함돼 있었다.

    영국 정부가 모든 돈을 다 낸 것은 아니다. 전체 비용 중 2800만 파운드가 자선단체의 기부를 통해 충당됐고, 기사가 작성된 2018년 6월 현재 그 돈 중 2400만 파운드는 이미 여러 곳에 쓰였다. 전체 비중으로 따지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으나(2억5000만 대 2800만), 정부의 지출액은 현금성 보상이 아닌 화재 수습 및 현장에 필요한 제반 비용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영국에서, 런던에서,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이 그렌펠 타워 거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경우도 ‘본인책임론’의 눈으로 보자면 시비를 걸 수 있지 않은가. 집에 불이 나서 한 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다치면 그냥 그것은 본인 책임이고 자신이 들어놓은 보험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인데, 72명이 죽은 떠들썩한 사건이 되니 국가가 나서서 장례를 치러주고 생계비 지원까지 하는 이것이 과연 ‘공정’한가.

    자타공인 ‘자유’의 본고장에서

    미국과 영국은 자타공인 ‘자유’의 본고장이다. 개인의 능력으로 최대한의 부를 쌓고 성공을 거두는 것을 전혀 금기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개인의 판단 착오나 노력의 부족 등으로 인해 실패하는 것 역시 당연히 온전히 스스로 부담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왜 미국과 영국은 9‧11 테러나 그렌펠 타워 화재 등에는 기꺼이,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나랏돈을 퍼부어 피해자들을 물심양면 지원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그것, ‘공동체’가 위협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과 열 사람의 죽음, 백 사람의 죽음 사이에는 단순한 산술적 비례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살만 루슈디라는 한 사람이 25세의 무슬림 테러리스트에게 습격당한 것은 개인의 고통과 비극으로 인지된다. 미국인 중에는 루슈디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테러범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주도 하에 항공기를 납치하고 그것으로 자살 테러를 한 결과 3000명이 죽은 것은 미국인 전원에게 ‘우리 모두의 일’로 즉각 수용됐다. 런던의 집 한 채가 불에 타는 것은 한 개인의 슬픔이지만, 빌딩 전체가 불에 타고 72명이 사망하는 것은 런던을 넘어 영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개별적으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나 화재를 겪은 이들의 고통과 비극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백만 년 넘게 군집 생활을 하며 진화해온 우리 인류의 감정 체계가 그렇다. 우리는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일, 개별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한꺼번에 벌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순간에 벌어질 때, 겁에 질린다. 공포에 빠진다. 현장에 있었거나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참사를 피한 사람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 일을 직간접적으로 겪지 않고 그저 소식만 들은 사람마저도 집단적으로 충격에 사로잡힌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사회는 보편적인 공통의 신뢰가 있어야 정상 작동한다. 생존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단순한 거래를 할 때조차 ‘내가 아는 사람’ ‘나와 가족이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아는 현대적인 ‘개인’은 성립조차 불가능하다. 큰 재난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며, 부상자를 수습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역할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도 저런 피해자가 되면 어떡하나’ 싶어 겁에 질린, 피해자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쓰이는 돈이라고 보아야 한다.

    믿기 어려운 사실에 대하여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싶다. 산업 현장에서 꾸준히 벌어지는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사망과 부상 사고, 가정폭력 등에 대한 무관심으로 방치되고 있는 여성을 향한 폭력 등은, 모두 ‘느린 참사’라고 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느린 참사’들을 예방하고 막는 일에는 경중이 따로 없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한 명씩 죽는 비극이 100일간 벌어지는 것과 100명이 하루에 죽는 비극은 모두 큰 사건이며, 사회적 관심과 고민이 요구된다.

    또한 이 글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가적 애도의 크기와 보상의 범위가 얼마나 돼야 할지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1인당 최대 1500만원의 장례비 지원에도 ‘내 세금이 이런 곳에 쓰여야 하느냐’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지만, 그것이 현실이므로, 그래서는 세상이 유지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힘주어 하고 있을 따름이다. 보상의 범위와 액수, 방식 등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넘어 논의돼야 한다. 국가와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세월호 참사처럼 몰아가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끔직한 재난 앞에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 투입되는 것마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물론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인격 문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혹은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한 이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양 극단의 목소리를 줄이고 합리적인 논의의 발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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