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근대미술 항일은 없고 친일 낙인만 남았다

[Special Report | 성취의 기록, 대한민국 75년] 춘향 영정 소동과 친일 프레임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3-08-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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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향 영정 소동 “괜히 바꿨나” “다시 그려야”

    • 친일 미술인 지목 23人, 공평·공정하지 않은 잣대

    • 근대 조각 선구자 김복진의 자발적 친일

    • 월북작가 정현웅, 생계 위한 친일은 변명

    • 미술계 친일 논쟁 전면 재검토해야

    2020년 친일 논란으로 철거된 김은호의 춘향과 김현철이 그린 새 춘향 영정(오른쪽). [남원시]

    2020년 친일 논란으로 철거된 김은호의 춘향과 김현철이 그린 새 춘향 영정(오른쪽). [남원시]

    “우리 소리꾼들은 춘향가의 춘향과 전혀 다른 춘향을 영정으로 모시고는 춘향가를 부를 수 없다.”

    8월 1일 국악인들이 남원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새 영정의 춘향은 실제와 너무 다르다. 춘향가 속의 고귀한 춘향 모습으로 다시 그려 봉안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3년 전 남원시는 친일 화가 김은호(1892~1979)가 그린 영정을 철거했다. 올해 5월 25일 남원 춘향제를 앞두고 열린 봉안식에서 새 영정이 공개되자 소동이 일어났다. “단오일 몸단장을 한 채 그네를 타러 나온 17세 안팎의 18세기 여인상”이라고 소개됐으나 시민들은 중년 여성에 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차라리 최초 영정(김은호가 그리기 전 1931년에 봉안된 영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오더니, 국악인들까지 나서 “다시 그려야 한다”고 반발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춘향가 속 고귀한 춘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1억70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친일 잔재’를 청산하려던 남원시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친일 작가가 그린 영정 논란은 2005년 경남 진주시의 시민단체들이 진주성 의기사에 봉안된 논개 영정(복사본)을 강제로 뜯어내면서 시작됐다. 이 영정 역시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 대표적 항일운동가 논개의 영정을 친일 화가가 그렸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이유였다.

    친일파가 그린 표준영정 해제하라

    불똥은 장우성(1912~2005)이 1953년에 그린 이순신 장군 초상화로 튀었다. 이 초상화는 1973년 표준영정 1호로 지정돼 500원짜리 동전 도안에도 사용됐으나 장우성의 친일 이력이 알려진 뒤 매년 충무공탄신일 때마다 해제론이 대두됐다. 표준영정이란 선현의 동상이나 영정 제작 시 통일성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하는 초상화를 가리킨다. 같은 이유로 김기창(1913~2001)이 1973년에 그린 세종대왕 표준영정(2호)도 해제 논란에 휩싸였다.

    김은호는 구한말 마지막 어진(왕의 초상화) 화사로 ‘순종어진 초본’을 그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창덕궁 앞 권농동 집에 화숙 ‘낙청헌’을 열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국 문인화의 정형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장우성,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훗날 ‘바보 산수’라는 독자적 형식을 선보인 김기창이 바로 낙청헌 출신. 친일 논란에서 살짝 비켜갔지만 천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이황 표준영정(4호)을 그린 이유태(1916~1999)도 이들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1973년 이래 지정된 표준영정 100점 가운데 이유태가 그린 이황을 포함하면 김은호와 제자 3인방이 그린 표준영정이 총 16점에 달한다. 이들 작품이 지폐 도안, 동상 제작, 교과서 등 각종 자료에 사용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표준영정 해제가 불러올 파장이 적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미술계 살생부와 ‘반민족 행위자’ 굴레

    친일 여부를 판단하는 절대 기준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이다. 이 사전에 수록된 미술 분야 2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본웅, 김경승, 김기창, 김만형, 김용진, 김은호, 김인승, 김종찬, 노수현, 박영선, 박원수, 배운성, 손응성, 심형구, 윤효중, 이건영, 이국전, 이봉상, 이상범, 임응구, 장우성, 정종여, 지성렬, 현재덕(가나다 순). 

    애초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선정한 친일 미술인은 26명이었으나 유족의 탄원과 해명으로 정현웅과 송정훈이 빠졌다. 이후 친일인명사전 앱을 제작할 때 월북작가 현재덕이 빠져 최종 23명이 됐다.

    일단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는 굴레가 씌워지면 해당 작가와 작품은 송두리째 부정당할 만큼 큰 타격을 받는다. 한 예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의 작품들은 속속 철거되고 있다. 2003년 도산공원 안창호 동상, 2010년 서울 남산 안중근 동상, 201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이순신 동상, 2021년 전북 정읍 황토현전적의 전봉준 동상이 철거되거나 교체됐다. 수유동의 4·19혁명기념탑,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의 철거도 시간문제다.

    이처럼 ‘친일인명사전’은 미술계 살생부이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일종의 성역이다. 그런데 정작 친일 미술인을 규정하는 잣대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의 저자인 미술평론가 황정수 씨는 공평하려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하고, 공정하려면 시대 상황과 개인의 처지가 똑같이 고려돼야 함에도 친일인명사전은 제한적 자료에 의존해 자의적으로 선정됐다고 했다. 또한 사전이 발간된 지 15년째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사료가 많이 발굴됐음에도 이를 반영한 재평가 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미술계 친일 논쟁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주장한 미술평론가 황정수 씨. [본인 제공]

    미술계 친일 논쟁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주장한 미술평론가 황정수 씨. [본인 제공]

    후방에서 그림 그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근대기 미술 연구자들이 친일 미술인을 비난할 때 가장 문제 삼는 말이 채관보국(彩菅報國), 채필보국(彩筆報國), 화필보국(畫筆報國), 그리고 총후미술(銃後美術)이다. 채관, 채필, 화필 모두 ‘그림 그리는 붓’을 가리키는 말로 ‘그림을 그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고 ‘총후’는 후방을 가리킨다. 서양화가 구본웅(1906~1952)은 1940년 매일신보에 ‘채필보국의 일념’이라는 글을 써서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상적으로 사용된 언어로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황정수 씨는 실제 ‘채관보국’을 실천한 현장을 담은 기사를 보여주었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10일자에 ‘경성육군병원에서 재기봉공의 날을 꼽아 기다리며 치료에 정진하고 있는 백의용사들을 스케치로 위문하고자 방문한 재동경미술협회 김인승 씨 이하의 위문대원의 정성스러운 채관 위문에 백의용사들은 한때의 더위도 잊고 미술을 통한 위문을 받았다’는 기사와 위문단 11명의 명단이 실렸다. 인솔자인 서양화가 김인승(1910~2001)은 조각가 김경승의 형으로 친일인명사전에 형제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이때 동양화가 조중현과 이유태도 참여했다.

    친일 미술인을 가르는 또 다른 중요 잣대가 1939년 ‘중·일전쟁 종군기록 전시회’와 1942년과 1943년 두 차례 열린 ‘반도총후미술전’, 1944년 ‘결전미술전’ 참여 여부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람회로 조중현과 이유태는 출품도 하고 입상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친일 미술인으로 지목되지 않았다.

    황정수 씨는 “결전미술전에서 상을 받은 한국인 화가는 70여 명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목만 전할 뿐 도판이 없다 보니 유일하게 도판이 발견된 김기창의 ‘적진육박’이 친일 부역의 대표작이 됐다”면서 “큰 상을 받으면 적극적 친일이고 입선만 하면 소극적 친일이라거나, 세 군데 모두 입상하면 친일이고 한 곳만 입상하면 아니라는 식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이라고 했다.


    항일 미술인 김복진, 국민화가 박수근마저…

    지난 4월 청주시립미술관은 2023년 제1회 ‘김복진미술상’ 수상자로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조각한 김영원 작가가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김복진(1901~1940)은 누구인가. 청주 출신인 김복진은 도쿄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1924년 제국미술전람회 조각 부문에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는 기록을 갖고 있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수차례 입상하며 한국 조각계를 이끄는 거물이 됐을 뿐 아니라 모교인 배재고보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시 동생 팔봉 김기진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다 구속돼 5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사후 공로가 인정돼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여기까지가 독보적 ‘항일 미술인’으로 추앙받는 김복진이다. 하지만 그가 독립군 토벌자 김동한, 궁성요배를 하고 죽었다는 ‘애국옹’ 이원하, 친일 거두 박영철, 극렬 친일파 김윤복의 동상을 제작한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막판 친일 명단에서 빠진 서양화가 정현웅(1911~1976)은 1927년부터 1940년까지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상을 받았지만 해방 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했고 6·25전쟁 중 월북해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 대신 ‘반도의 빛’ ‘신세대’ ‘소국민’ ‘방송지우’ 등 친일 잡지에 장기간 표지화와 삽화를 그리면서 누구보다 많은 친일 흔적을 남겼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친일 행적이 드러난 김복진(왼쪽), 정현웅. [동아DB]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친일 행적이 드러난 김복진(왼쪽), 정현웅. [동아DB]

    2022년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이 ‘미술사논단’ 제54호에 ‘신예 화가 박수근의 등단-춘천과 평양에서의 초기 미술 활동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45년 이전 박수근(1914~1965)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자 많은 이들이 당혹해했다.

    지금까지 박수근(1913~1965)에 대한 평가는 195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가장 한국적 소재를 그렸고,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개발했으며, 무엇보다 친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논문에서 밝혀진 일제 강점기 박수근의 행적은 오히려 적극적 부역에 가까웠다.

    춘천 출신의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들의 후원으로 미술을 계속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후원자가 강원도청 사회과장이었던 미요시 이와키치였다. 미요시는 평남도청으로 옮긴 뒤 1938년 박수근을 사회과 서기로 추천했고, 이곳에서 박수근은 일제의 국책 선전 수단 중 하나인 ‘종이연극’ 제작에 투입됐다. 

    미요시와 박수근의 이야기는 1939년 8월 15일자 아사히신문에 ‘훈훈한 인정미담’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수근은 광복할 때까지 평남도청에 근무하면서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 아라이 쥬콘(新井壽根)이라는 이름으로 ‘일하는 가족’을 출품해 입상했고, 1944년 결전미술전에 ‘일하는 여자’를 출품해 4등을 했다.

    친일 미술이라는 프레임 지금도 유효한가

    1929년 김은호의 ‘낙청헌’에 이어 1933년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청전화숙’이 문을 열고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두 스승의 문하에서 한국 미술계를 대표할 많은 작가가 탄생했지만 친일 미술인이라는 비난도 함께 받아야 했다. 이상범의 큰아들 이건영(1922~?)도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 ‘개발지의 추’를, 1944년 결전미술전에 ‘도전하다’를 출품해 부자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건영의 친일 이력에는 1945년에 열린 ‘해양국방미술전람회’가 등장한다. 일회성으로 끝난 생소한 전시회지만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열린 만큼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한국인 수상자로 박래현(1920~1976)이 눈에 띈 것은 한국 여성 화가로는 유일한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기도 가즈히데(木戶一秀)라는 이름으로 출품한 ‘요조훈련’이 경성지방 해군인사부장상을 수상했다. 박래현은 1940년 창씨개명을 한 뒤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단장’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44년 결전미술전에 ‘공작장’으로 특선을 하기도 했다.

    황정수 씨는 김복진, 이유태, 정현웅, 박수근, 박래현 등을 언급한 이유가 이들의 친일을 밝혀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친일 미술인 규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친일 미술인 규정에 참여했던 이들은 김복진, 정현웅, 박수근의 친일 행위를 눈감아 주고 오히려 그들을 선양하는 작업에 앞장선다. 또한 정현웅과 송정훈을 마지막에 빼준 일도 어불성설이며 박득순과 김중현을 봐준 일, 이유태·조중현·안동숙을 모른 체한 일, 박래현을 고려하지 않은 일도 형평에 맞지 않는다. 이런 바탕에서 김복진을 ‘항일 의지를 가진 미술인’의 중심에 두고, 정현웅은 ‘북한 주체미술의 중심’으로 서술하고, 박수근은 ‘자생적인 민중미술인’인 것처럼 취급해 한국 미술의 축으로 삼으려 한다면 모순이고 엉터리다. 반대로 이들보다 친일의 정도가 강하다고 보기 어려운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은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의 대표적 인물로 이들의 공적까지 무시되기 일쑤다.”

    황정수 씨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 이래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미술계 친일 논쟁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수근조차 친일 미술인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면 한국의 친일 미술의 역사는 폐기 처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친일 미술이라는 프레임을 해체하고 정치적 행위보다는 미술에 중심을 두고 공과를 따지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신동아 9월호 표지.

    신동아 9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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