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일성 “미국이 돌아왔다!”
과거의 야망 다시 추구하는 중‧러
‘욕망’의 시대 → ‘야망’의 시대
“성채를 공격하라” 中 시진핑
독자 공급망 원하는 권력욕
‘자본에 국적 없다’ 논리 종말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2월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동아DB]
사람들은 이 말을 반도체 산업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이 첨단 반도체 산업에 진입하지 못하게끔 미국 내 대대적 투자를 벌이면서, 반대로 한국이나 일본, 대만 같은 핵심 반도체 생산국을 영향권 하에 강하게 묶어둔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인다.
혹은 시야를 넓혀 미국이 자국 내 제조업 비중을 늘리는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을 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다. 한때 자랑스럽게 세계 시장을 석권하던 ‘Made in USA’ 제품을 다시 만들어, 위대한 제조업 강국이자 그 산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가져간 지위를 회복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이 돌아왔다’는 선언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크다. 경제적 맥락만 봐서는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그 속에 담긴 정치적 무게가 실로 막중하다. 요즘 유행어처럼 쓰이는 ‘지정학의 귀환’을 선포하는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지정학이 돌아온 세계가 어떤 곳인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표현인 셈이다.
지정학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말은 널리 쓰인다. ‘안미경중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수식어처럼 뒤따라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3월 이후, 적어도 언론에 등장하는 담론만을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돌아온 지정학의 시대를 사는 듯하다.
전보다 많은 이들이 국제 뉴스에 관심을 기울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게 그러했듯 베이징이 대만을 침공할지, 미국이 첨단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을 가로막는 이른바 ‘디커플링’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진행될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을 접하는 게 어렵지 않다. ‘지정학이 돌아왔다’는 말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글을 언론에서 접하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이 지면에서 바로 그 역할을 해보도록 하자.
‘밀림의 귀환’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자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케이건은 2018년 ‘밀림의 귀환(The Jungle Grows Back)’이라는 책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당연시되던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가 약화됨을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일종의 자연 조건처럼 여기는 세상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미국이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며 안정적 교역로를 제공하고, 자국의 시장을 다른 나라에 열어줌으로써 독일이나 일본 등 전범국이 외려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한 독특한 제국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이다.여기까지는 많은 독자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미국 패권을 위협하고 있고, 반대로 미국은 극한의 정치 대립과 내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는 점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가 단지 국가 사이의 상대적 힘, 군사력과 경제력 차원에서 전개되는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더욱 근본적 변화는 세계 여러 국가의 지도자, 더 나아가 국민 스스로의 ‘감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밀림의 귀환’의 한 문단을 인용해 보자.
“오늘날 문제는 지정학이 귀환한 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이 한동안 중단했던 과거의 야망을 다시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불가피했다. 문제는 자유주의 세계질서 자체가 더 이상 지난 70년 동안 해왔듯이 그러한 야망을 봉쇄하고 꺾을 만큼 건강하고 튼튼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러한 세력에 맞설 의지와 역량이 미국을 비롯해 도처에서 쇠락하고 있다. 자우주의 세계질서에 속한 국가와 국민들조차 과거의 전철로 되돌아가고 있고, 어찌 보면 미국이 이러한 과정을 재촉해왔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야망’이다. 1990년대, 냉전이 끝나고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던 그 시절과 지금의 차이가 그것이다. 당시는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말처럼 ‘역사의 종언’이 이뤄졌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그저 ‘욕망’을 추구하면 그만인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욕망’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팡파르와도 같았다.
우리는 ‘욕망’의 시대에서 ‘야망’의 시대로, 역사의 장이 또 하나 넘어가는 광경을 목격하는 중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떠올려 보자. 경제적 동기, ‘욕망’으로는 그 침략 전쟁을 벌인 푸틴뿐 아니라,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러시아 국민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물질적 욕망이 아닌 정신적 야망이다. 러시아가 위대한 강대국이던 시절,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패권국이던 영광을 다시 한 번 누리고 싶다는 야망이 무리한 전쟁을 낳았다. 2018년에 펴낸 책에서 케이건이 묘사한 러시아의 행동 동기는 2022년의 전쟁을 충분히 설명해낸다.
“러시아가 직면한 문제는 푸틴과 많은 러시아인들이 추구하는 위대함이 안전하고 안정된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중략) 현재의 세계질서에서 러시아는 안전을 유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초강대국이 될 기회는 없다. 세계무대에서 위대함을 성취하려면 러시아는 러시아도 그 어떤 나라도 안보를 누리지 못하는 과거로 세계를 되돌려 놓아야 한다. 러시아가 과거에 세계무대에서 행사했던 영향력을 되찾으려면 자유주의 질서는 약화되고 무너져야 한다.”
베이징 수뇌부 진짜 목표
지난해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과 함께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시진핑 체제 아래 중국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욕망’보다 ‘야망’이 더 커졌거나, 그 전까지 ‘욕망’의 힘으로 억눌러왔던 ‘야망’이 불거져 나온던 것이다. ‘칩 워’의 한 문단을 길게 인용해 보자.
“만약 중국이 이 생태계에 참여해 더 큰 몫을 가져가고자 했다면 중국의 야망은 아주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이징의 목표는 미국과 그 우방들이 만들어 낸 시스템 속에서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진핑은 ‘성채를 공격하라’고 외쳤고, 이것은 시장 점유율을 조금 더 끌어올리라는 말이 아니었다. 반도체 산업에 통합되는 게 아니라 반도체 산업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어쩌면 중국에도 세계 반도체 시장에 좀 더 깊숙이 통합되는 쪽을 선호한 경제 전략가나 반도체 산업 전문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효율보다 안보를 중요시하는 베이징의 리더들은 상호 의존 관계를 위협으로 간주했다. ‘중국제조 2025’ 계획은 경제적 상호 의존이 아닌 그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수입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요구였다. ‘중국제조 2025’ 계획의 우선 목표는 중국에서 사용되는 외국산 반도체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이 ‘서로 경제적 손해’라는 이유로 흐지부지되거나 유명무실하게 끝나고 말 것이라는 예측에 현실성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패권국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의 동기는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갖게 된 중국은 이미 ‘욕망’을 충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야망’을 이루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해는 ‘영광을 향한 고통’이기에 감당할 수 있으며 감내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미‧중갈등과 무역분쟁을 둘러싼 국내 언론의 보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정보의 접근성이 높은 미국 언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다보니, 일각에서는 마치 미‧중 무역분쟁에서 미국‘만’ 디커플링을 원한다는 듯한 시각이 통용한다.
실상은 다르다. 그런 관점은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반박된다.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일 수 있지만 미국이 중국을 배제해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만큼이나, 중국 역시 미국 중심의 기술‧산업‧무역 질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야망을 감추고 있지 않다.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 더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적 동기가 당연히 깔려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만의 공급망’을 갖고 그 속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국가 단위의 권력욕이다.
미‧중‧러 공히 야망이 정치의 원동력
욕심 대신 야심이, 욕망 대신 야망이 정치의 원동력이 되는 현상은 러시아나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미국의 현임 대통령과 전임 대통령의 선거 구호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 외쳤고, 그를 몰아내고 대통령이 된 바이든은“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한다.흔한 애국주의 언사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두 문장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작금의 미국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 말하며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바이든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 민주당 지지자 눈으로 볼 때, 특히 트럼프 집권기는 가장 나쁜 시기였다. 정권을 되찾아온 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사회, 경제 정책의 변화를 꾀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미국이 이윤동기에 따라,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금 벌어지는 뉴스만 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바이든 정부는 8월 9일(현지시간) ‘아웃바운드’(역외) 투자 제한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AI) 등 최첨단 부문에서 매출의 절반 이상을 얻는 중국 기업에 대해 미국 자본의 투자를 금지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자금줄을 옥죄어 중국이 최첨단 기술 발전에서 치고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전혀 납득하기 어렵다. 중국의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는 매출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올리고 있지만 미국 증권 시장에 상장돼 있다. 중국인뿐 아니라 미국인 역시 알리바바 주가가 오르면 이득을 본다. 아직 상장되지 않은, 시험 단계의 기술을 개발 중인 벤처 기업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중국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한 기업이 미국 투자자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준다면 그것은 미국의 이익이며 동시에 중국의 이익 아닌가.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이러한 논리는 2023년 현재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에서 활동하는 기업인지, 그 기업의 핵심 의사결정권자와 엔지니어 등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등을, 이제 우리는 묻고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지난해 8월 워싱턴과 베이징은 미국 증권시장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을 상장폐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너무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혔기에 단번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던 것이다. 280여 기업을 일시에 상장폐지할지 여부가 논의됐다는 그 사실 자체부터 문제적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7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와 당 홈페이지 오픈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이날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안전 수호,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문구와 함께 초대형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을 회의장 배경으로 내걸었다. [이훈구 동아일보 기자]
반일감정, 반미주의, 이주민 혐오
지정학의 귀환은 엄연한 현실이다. 문제는 그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반도체를 비롯한 글로벌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보는 것에만 익숙한 나머지, 이 거대한 변화를 추동하는 근원 동기를 흔히 간과하곤 한다. 지정학의 귀환은 그것을 원하는 다양한 나라 사람의 세계관, 가치관, 우선순위가 달라졌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러시아, 중국, 심지어 미국의 많은 대중이, 이전과 달리 경제적 번영과 평화와 안정보다는, 본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줄 강력하고 위대한 나라를 원하는 것이다.문재인 정권 당시 나온 ‘반도체 소부장 독립’이라는 주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은 한미동맹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일본과 외교를 순탄하게 이끌어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반일감정을 활용해 대중적 감정을 들쑤시고 정치적 이득을 얻는 ‘치트키’로 써먹었다.
고도로 전문화, 복잡화한 첨단 산업인 반도체를 두고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며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깎아 먹는 자해극이 벌어졌지만 그로 인해 정권 지지율이 떨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여당과 대통령의 지지층이 공고하게 뭉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은 그래서다. 이는 중국에서 ‘중국제조 2025’라는 무모한 프로젝트를 벌여 반도체 국산화에 매진하고 그 결과 미국 중심의 공급사슬에서 떨어져나가는 손해를 보게 됐지만 시진핑의 지지층은 더욱 열렬히 그들의 지도자를 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적어도 그 손해가 구체화하기 전까지는, 반도체 산업이 가져다주는 부와 풍요를 향한 ‘욕망’보다 일본을 향해 자존심을 세운다는 민주당 지지층의 ‘열망’이 더욱 드높았던 것이다.
지정학의 귀환을 단지 국제 뉴스로, 혹은 경제 뉴스로만 바라봐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다. ‘욕망’의 시대를 넘어 ‘야망’의 시대로 치닫는 이 세상에서 우리만 예외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는 다음과 같다.
2023년 현재 한국인이 원하는 ‘열망’중 퇴행적 반일감정 같은 소모적이고 해로운 것이 아닌 긍정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반일감정, 반미주의, 이주민 혐오 등의 감정을 동원해 손쉬운 이득을 맛보고자 하는 정치 세력의 영향력을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까.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할 긍정적 야망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선도국가로 나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와 같은 질문은 경제학이나 지정학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우리가 지닌 철학과 지향을 전면으로 재검토하는 인문학 작업일 수밖에 없다. 일본을 넘어 미국과 함께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75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