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호

“北 변하리란 믿음, 대단히 잘못됐다”

[백승주 칼럼] 스탈린 신뢰한 루스벨트 오판이 주는 교훈

  •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前 국회의원

    입력2023-08-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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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잘못 생각했다” 시대 碩學 김학준 고백

    • 분단과 6·25전쟁 낳은 루스벨트 ‘관용적 소련 인식’

    • 트루먼 對蘇觀 수정 결단, 한반도 공산화 저지

    • 대북 인식 오류 인정·수정할 때

    7월 27일 북한이 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을 맞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하고 있다. [뉴스1]

    7월 27일 북한이 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을 맞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하고 있다. [뉴스1]

    이 시대의 석학 김학준(80) 교수는 2008년 ‘북한의 역사’ 두 권을 출판했다. 분단 및 북한 정권 출범 과정에 대한 진실과 주장을 집대성했다. 1권이 1095쪽, 2권이 1233쪽이다. 방대한 분량이다. 출간 직후 필자는 저자로부터 책을 선물받았지만 당시엔 제대로 읽지 못했다.

    김학준 교수는 한국의 정치학자·언론인·정치인이다. 1965년 정치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1973~1989년엔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저술한 ‘러시아혁명사’ ‘한반도와 국제정치’는 당시 정치학도에게 필독서였다. 학계 대표로 12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90~1993년 북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 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다. 그 후 정치학회 회장, 아시아기자협회 이사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매헌기념사업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저서를 냈다. 현재도 단국대 석좌교수·인천대 이사장으로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1992년 2월 17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1992년 2월 17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북한의 역사’를 꺼내 한반도 분단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다시 읽었다. 7월 27일 전쟁기념사업회가 준비한 ‘정전협정 70주년기념 학술대회’에서 김 교수가 축사를 통해 ‘자아성찰적 역사 선언’을 한 것이 계기다. 자아성찰적 역사 선언이란 필자가 명명한 것이다. 김 교수가 한 축사의 핵심 내용은 ‘북한 체제의 본질과 변화 가능성’에 대해 김학준 교수 스스로가 일정 부분에서 통찰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이를 고백한 것이다.

    “한국, 對北 인식 오류 반복하고 있다”

    김학준 교수는 과거 한반도가 분단되고 정전 체제가 유지되는 역사적 비극이 진행되는 과정에 전승국 미국의 지도자이자 연합국 필두이던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야심을 제대로 경계하지 않았다는, ‘관용적 대소련 인식’이 작용했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당시 루스벨트의 정치적 통찰력 부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분단 및 분단체제 강화로 이어졌음을 지적했다. 축사를 통한 그의 주장은 필자를 포함한 참석자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김학준 교수의 말엔 북한 체제가 한국 정부·국민이 기대한 대로 변하지 않는 데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녹아 있었다. 대표적 러시아 전문가이면서 국제정치학자인 그는 북한 체제의 변화에 기대를 건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2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화정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서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가 연설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정치학·외교학 분야 석학으로 노태우 정부 청와대에서 일하며 북방정책 추진을 도왔다. [동아DB]

    2020년 1월 2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화정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서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가 연설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정치학·외교학 분야 석학으로 노태우 정부 청와대에서 일하며 북방정책 추진을 도왔다. [동아DB]

    그는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초 한국이 북방정책을 추진한 이후 “한국 일부 주요 정당과 학자가 북한 체제에 대한 그러한 유형의 인식 오류를 반복적으로 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간 한국은 북한을 지원하면 언젠가 북한이 변해 국제사회의 규범을 따르고 책임을 다하게 되리라는 통찰력과 믿음을 토대로 대북정책을 설계하고 추진했다. 나도 그렇게 믿은 적이 있고, 그러한 정책을 지지한 적이 있지만 현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스탈린에 대한 루스벨트의 잘못된 믿음과 비슷하다”고 고백했다.

    완전히 어긋난 루스벨스 소련觀

    루스벨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다.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다. 소련에 대한 루스벨트의 인식은 ‘관용적 3요소’로 구성돼 있었다. 구체적 내용은 이하와 같다.

    첫째, 소련을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봤다. 비록 미국의 정체성과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한 국가지만 미국 안보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둘째, 소련의 변화 가능성을 기대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새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전체주의를 지도 원리로 삼았지만 점차 서방국가와 같은 자유주의 체제에 수렴할 것이라고 봤고, 당연히 국제 규범을 지킬 것으로 생각했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을 최소 희생으로 조기 종식하려면 정치적 손해를 보더라도 군사협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루스벨트가 이와 같이 소련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진 데엔 그가 1938년 보좌관으로 임명한 해리 홉킨스 탓이 컸다. 김학준 교수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그를 보좌관으로 활용해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때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수차례 런던과 모스크바에 그를 파견한다.

    스탈린을 만나고 온 홉킨스는 루스벨트에게 “스탈린은 ‘세계혁명론·공산주의 해외 수출’을 포기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과 우호 친선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고 루스벨트에게 보고했다. 루스벨트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더 나아가 국방장관 헨리 스팀슨과 재무장관 헨리 모겐도에게 소련에 대한 적극 지원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의 대(對)소련 정책 변화도 루스벨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영국이 1941년 7월 12일 소련과 상호원조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영국을 지키는 것이 미국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해 소련에 무기를 빌려줬다. 미국·영국·소련의 정치군사적 협력을 실현한 셈이다. 또 루스벨트로선 1939년 만주 인근 지역에서 진행된 러·일 간 군사충돌에서 러시아군이 압승을 거두자 대일(對日) 전쟁에 러시아군을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후 역사를 살펴보면 소련에 대한 루스벨트의 인식은 완전히 어긋났다. 루스벨트의 기대와 달리 소련은 팽창정책을 전개해 동유럽을 공산화했고, 자유주의 진영에 최대 위협국가가 됐다. 특히 한반도에서 소련의 야욕을 인식하지 못한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소련이 김일성을 사주해 6·25전쟁을 일으키는 국제적 여건을 만들어줬다. 한민족 관점에서 보면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2018년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식사하며 대화하고 있다. [뉴스1]

    2018년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식사하며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부터 스탈린은 한반도 공산화 야욕을 품고 있었다. 일·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이러한 야심을 은폐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대일전 참전 카드로 종전 후 극동 지역에서 소련이 얻을 정치적 이득을 지속적으로 요구·관철한 것은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려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1939년 5월 소련은 만주와 몽골 인근 지역에서 일본군과 치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소련으로서는 1905년 러일전쟁 패배를 설욕한 것으로 여겼다. 일본은 패배 직후인 1941년 4월 5년간 유효한 일·소 불가침협정을 체결했다. 덕분에 일본은 소련의 침략을 배제한 채 다른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소련은 불가침협정을 파기하고 대일전 참전을 카드로 삼아 극동에서 소련의 전략적 이익을 도모하려 했다. 1943년 10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삼국 외상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할 의사를 스스로 밝힌다. 이어 열린 카이로회담, 테헤란회담, 얄타회담에서 참전 의사를 더욱더 구체화하고 미국에 정치·군사적 요구를 한다.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대원수(앞줄 왼쪽부터). [동아DB]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대원수(앞줄 왼쪽부터). [동아DB]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밀협정을 체결한다. 내용은 소련이 독일의 항복 시점부터 최대 3개월 이내에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들어가고,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은 소련에 사할린 및 일본 북방 4개 도서와 몽고·중국에서 이권을 보장하는 게 골자다.

    스탈린은 얄타회담 기간 중 루스벨트와 △한반도와 육지로 연결돼 있는 중국·러시아의 전통적 이해 인정 △적절한 때에(In due course) 한반도 독립 △어느 한 국가 혼자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지 않는 상황 조성 등에 합의했다. 스탈린은 전승국 공동 대응이라는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전개할 수 있게 된 명분을 얻은 것이다. 심지어 당시 별도 개최된 미·소 군사지도자들 간 회의에서 소련군이 웅기·라진·청진 등으로 진공하기로 합의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스탈린 야욕 막아낸 트루먼 용기

    트루먼은 미국 33대 대통령이다.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제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까지 군정 시기 한국의 통치자로 볼 수 있다. 6·25전쟁 때도 대통령으로서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부통령으로서 루스벨트를 승계했지만 트루먼의 대소관(對蘇觀)은 그와 확연히 달랐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루스벨트의 관용적 소련관을 수정·폐기하고 모스크바를 경계하는 인식을 드러냈다. 트루먼은 소련이 얄타 합의를 무시하고 동유럽을 상대로 팽창정책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련을 악의 축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일관된 관점을 가졌다.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해 전임자 루스벨트와 상반된 외교관의 소유자로서 소련의 확장에 한층 더 강경히 대응했다. [동아DB]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해 전임자 루스벨트와 상반된 외교관의 소유자로서 소련의 확장에 한층 더 강경히 대응했다. [동아DB]

    6·25전쟁 때 트루먼은 이승만보다 더 먼저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았다.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워싱턴에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했다. 에치슨 국무장관은 곧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하며 점심 무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요구했고, 같은 날 저녁 유엔 대표부는 안보리 소집 요구서와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튿날 오전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무력 공격을 침략행위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트루먼은 6월 27일 미국의 참전을 발표했고,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통해 유엔군을 보내 한국을 지원하도록 하는 결정을 주도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소련이 사주한 북한의 침략전쟁에 미국·유엔이 신속히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 자명하다.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이승만과 트루먼의 동상이 건립됐다. 동상 건립에 대해 다소 논쟁이 있었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을 상상할 수 없다. 실로 트루먼은 빛의 속도로 북한의 침략에 대응했다.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지켜낸 트루먼 동상 앞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동상이 세워진 곳은 누가 한국을 지상에서 소멸시키려 했고, 누가 지키려 했는지 되새기는 공간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관용적 소련관’이라는 전임자의 정세 인식을 극적으로 전환한 트루먼의 용기가 유럽·한반도에 대한 스탈린의 공산화 야욕에 급제동을 걸었다.

    고해성사 심정으로 잘못 인정해야

    “대통령 각하, 북한의 요구를 들어줍시다. 들어주지 않으면 동포가 굶어 죽는데 이를 외면하고 통일 기회를 놓쳤다는 역사적 비판에 직면할 것입니다. 북측은 핵을 종국적으로 폐기할 준비를 하고 있고, 한반도 공산화를 이미 포기했습니다.”

    과거 한 한국 대통령 참모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 지도자를 만난 후 대통령에게 건넨 조언이다. 1980년대 말 한국 정부가 북방정책을 시작하며 새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여기에 참여하거나 조언을 건넨 지식인들은 북한의 건강한 변화를 기대했다. 필자도 한때 그러한 기대를 했다. 1991년 남북한이, 1994년 북한과 미국이 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고위급회담이 수차례 진행되면서 북한의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북측은 우리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했다. 핵무기를 만들어 핵보유국이 된 것도 모자라 시도 때도 없이 한국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정치 의지를 금과옥조로 여김은 물론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 지도자와 지식인은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시간 동안 가져온 인식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홉킨스의 말을 맹신한 루스벨트는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성찰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사망했고, 그를 승계한 트루먼이 다른 관점을 가지면서 바로잡힐 수 있었다. 지식인은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데 앞장서야 한다. 김학준 교수의 자아성찰적 역사 선언의 울림이 더 커야 한다. ‘관용적 대북한 인식’을 가진 학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역사의 목소리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신동아 9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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