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 10조 ‘공화정’ 규정
1948년 발행 정부 관보 1호 ‘대한민국 30년’
MB, 노무현을 그렇게 조사하는 게 아니었다
장관이라면 한동훈·원희룡처럼 소신껏 일해야
이종찬 광복회장. [조영철 기자]
이종찬 광복회장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현장에 있었다.
“작은아버지(정확히는 5촌 당숙 이규열)가 그날 존 R 하지 장군에게 작은할아버지(이시영 부통령) 말씀을 통역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그분이 영어를 참 잘했거든….”
이시영 초대 부통령은 이종찬 광복회장 작은할아버지. 우당 이회영 선생이 이 회장 조부다. 우당의 손아래 동생이 이시영 부통령. 이 회장은 부통령 가족 자격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했다. 현대사의 산증인 이종찬 광복회장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던 7월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보훈회관 광복회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이 회장은 5월 25일 제23대 광복회장으로 선출됐다.
민주공화정 선포 ‘기미독립선언문’
광복회를 앞으로 어떻게 이끌 거예요.“독립운동 현장에서 활동한 1세대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셨어요. 광복회는 2세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선대 유지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긴장합니다. 항일투쟁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또 그동안 어떤 고난을 이겨내 왔는지 이런 것을 국민께 잘 설명드려야 하는데, 1세대 분들처럼 몸에 배 나오는 얘기가 아니기에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 회장은 “독립운동을 한 우리 선열이 바란 나라는 민주공화정”이라고 강조했다.
“고종 시대에도 독립운동은 있었어요. 1905년 을사늑약 반대 투쟁도 있었고, 1910년 한일합방 반대 투쟁도 했지요. 그런데 그때의 독립운동은 ‘나라를 되찾자’는 취지는 같지만 결국 왕정 중심, 고종 임금을 황제로 모시기 위한 운동이에요. 독립운동이 질적으로 달라진 계기는 3·1운동부터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배경을 이렇게 해석했다.
“1919년 1월 고종 승하를 기폭제로 3·1운동이 터졌죠. 그때 군중 생각은 ‘임금을 다시 세우는 시대는 갔다’는 거예요. 내가 공화정 원년이 1919년이라고 얘기하는 연유가 그래서입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문이 추구하는 나라가 공화정입니다. 3·1운동 이후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헌장을 만들었는데, 제1조가 바로 민주공화제입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대한민국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의 시초가 임시정부 헌장에서 비롯했습니다.”
이 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 영인본을 직접 보여줬다.
“여기 임시정부 헌장 10조를 보세요. ‘국토가 회복된 후 1년 이내에 국회를 소집한다’고 돼 있죠. ‘국회’라는 말이 우리 역사에서 이때 처음 나왔어요.”
국회는 ‘국민대표자회의’를 두 글자로 압축한 단어다.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국민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서 헌법과 법률을 제정해 나라를 통치한다는 공화정이 임시정부 헌장 10조에 일찌감치 명시돼 있다는 설명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 영인본의 국회 소집을 명시한 ‘10조’(확대 부분). [조영철 기자]
“임시정부도, 공화정을 담은 헌장도 처음엔 약간 엉성한 점이 있었죠. 그런데 유의할 것은 임시정부는 망명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있었기에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닌가요.
“망명정부는 국내에 정부가 있다가 외침을 당해 존립할 수 없어 망명한 정부를 말해요. 그런데 임시정부는 3·1 선언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기초로 합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상하이에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는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한성(지금의 서울),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를 포함해 다섯 곳에 세워졌어요. 안창호 선생께서 임시정부가 이렇게 난립하면 중구난방이 되겠다 싶어 ‘한곳에 모이자’고 제안했죠. 그러곤 정부 체제는 한성 것으로, 정부 구성은 블라디보스토크 인물 중심으로, 위치는 상하이에 두기로 했어요. 그 같은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임시정부 초기 내무총장(현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안창호 선생이 세 곳 임시정부가 하나로 합쳐질 때 노동총판(현 노동부 차관)으로 스스로 자기를 낮췄어요. 그 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자리 잡은 겁니다.”
1948년 8·15는 건국 아닌 정부수립 국민대회
그는 ‘대한민국 건국 시점 논란’를 이렇게 정리한다.“1948년 8·15 행사는 대한민국 건국 대회가 아니에요. 정부수립 국민대회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은 30년 전 임시정부가 재활한 것’이라면서 관보 1호에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쓰도록 했어요. 당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고, 이승만 대통령 자신도 건국했다고 한 적이 없는데도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신격화하려는 사람들이 건국, 건국 하는 거예요.”
재활이든 재건이든 1948년 정부를 수립한 지 올해 꼭 75주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75주년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70년 전 오늘(7월 27일)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그때 부산에서 매일같이 종전 반대 관제 데모를 했어요. 그때 데모하면서 속으로 ‘전쟁을 그만하자는데 왜 학생들을 동원해서 반대하라고 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관제 데모가 이승만 대통령의 전략이었어요.”
어떤 점에서 전략이라고 평가하는 건가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없이는 정전협정도 없다’고 반공포로까지 석방하면서 미국에 쐐기를 박은 거죠.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알았어요. 을사늑약 체결 직전 미국에 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 회장은 을사늑약 체결 직전 일화를 들려줬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 이승만 대통령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거론하며 미국이 대한제국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개입할 것을 요청한 일이 있어요. 그때 루스벨트가 이승만에게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 외교문서로 국무부에 제출하라’고 했어요. 당시 미국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해 놓고서 겉으로는 정식 외교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한 거죠. 그런데 어떻게 됐나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어 결국 공문을 제출하지 못했죠. 그때 이승만 박사가 깨달았죠. ‘루스벨트가 내가 공문을 접수시키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날 놀렸구나.’ 이후 이 박사는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문 책을 펴내 ‘일본을 조심하라’고 끊임없이 미국에 경고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이승만 박사 경고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이 깨달았죠. 그 같은 경험이 있는 이승만 박사는 6·25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보다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 거죠. 한미상호방위조약 덕에 70년간 우리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가 안보 걱정 없이 평화를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어요.”
워싱턴 선언·NCG 구성 합의 의미
북핵과 미사일 위협이 현실화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안보 환경이 달라졌습니다.“윤석열 대통령이 4월 미국 국빈 방문 때 ‘워싱턴 선언’을 내놓았지요. ‘워싱턴이 핵무기를 맞을 각오를 하고 서울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 측 요구를 선언에 담았는데요. 핵 확장 억제 정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핵협의그룹(NCG)을 만들기로 한 것은 저쪽(북한)에서 핵을 쏘면 (미국이) 때리지 않을 수 없도록 구체적 조항을 넣으려고 한 것으로 봅니다. 8월 워싱턴에서 한미일 3국 협의를 할 때 어떻게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안보 환경을 갖춰나갈지 논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백악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다. [뉴시스]
“양극화와 저출산 문제 해결에 앞장설 책임은 정치권에 있어요. 그런데도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만 일삼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이 원장은 “정치가 극한 대결로 치닫게 된 시점을 이명박 정부 때부터”라고 꼽았다. “이명박이 노무현을 그렇게 조사하는 게 아니었다”며 “(이명박이) 달달 볶아 (노무현을) 자살하게끔 만들었다고 (문재인이) 결국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느냐”며 “그런 보복 정치를 이제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복 및 증오의 정치를 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년 국회의원 선거 때 국민이 선택한 윤석열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줘야죠. 지금 정권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3분의 1만 바뀌었어요. 입법부도, 사법부도 여전히 문재인 정부 때 그대로예요. 공공기관장 중에 윤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만약 (윤석열 정부에) 일할 기회를 줬는데도 제대로 못 하면 그때는 나부터 비판합니다.”
이 회장은 중앙부처 차관 교체를 통한 이른바 ‘차관 통치’에 대해서는 “장관을 바꾸려면 인사청문회 절차를 거치느라 석 달의 공백이 생겨 불가피하게 차관을 교체한 것으로 이해한다”며 “내년 총선에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되면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싫든 좋든 윤석열 정부는 앞으로 4년 가까이 국정을 책임지고 운영합니다. 그러려면 권한을 줘 일하는 여건을 조성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고 나서 일하는 실력을 보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는 게 순리지요.”
그는 “한동훈이나 원희룡은 대통령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하는 것 같은데 다른 장관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며 “장관은 자기 분야 전문성을 갖고 소신껏 대통령을 설득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동아 9월호 표지.
구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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