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포퓰리즘·기후위기 시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포퍼의 논리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역사주의
혁명론에 맞서는 ‘점진적 사회공학’
다원민주주의 제도·관행 분석한 달
평등을 통해 자유 구현할 수 있다
시장경제·민주주의의 이중적 관계
다원주의·사회통합의 ‘포지티브섬’
지난해 10월 22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 집회 참가자들이 “문재인 이재명 구속”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왼쪽). 같은 시간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 앞에서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이 연 집회 참가자들이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등의 구호를 외쳤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내 생각은 이렇다. 지난 20세기를 이끌어온 것은 전쟁과 평화의 대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 이성과 욕망의 대결, 자연의 지배와 자연과의 공존의 대결이었다. 여기에 남성 지배와 여성 해방의 대결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 전반이 전쟁의 시대였다면, 20세기 후반은 평화의 시대였다. 평화의 시대를 냉전의 시대라고 봐도 좋다. 둘째,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 시작됐고, 이 대결은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로 끝났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지만 이념사회주의는 살아남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셋째, 20세기 전반 파시즘과 20세기 후반 공산주의에서 볼 수 있듯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지구적 대결 양상을 드러내 왔다. 물론 역사는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승리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넷째, 근대를 지탱해 온 이성은 1968년 ‘68혁명’으로 욕망의 도전을 받았고, 21세기에도 ‘욕망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욕망이란 말이 불편하다면 감성 또는 무의식이란 말을 써도 좋다. 다섯째, 근대를 특징지어 온 인간의 자연 지배는 ‘자연의 복수’를 불러들였고, 21세기에 들어와 인류는 기후위기라는 지구적 위험 앞에 위태롭게 서 있다. 기후위기뿐만 아니라 생물다양성 감소 등의 생태 위기는 21세기 인류의 중대한 존재적 위기일 것이다. 여섯째, 성평등은 때때로 후퇴의 경향을 보여줬지만 길게 보면 도도한 전진의 물결을 만들어왔다. 성평등의 역사가 직선형이 아니라 나선형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와는 다른 시대의 도래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21세기가 열린 이후 인류는 어떤 사건들로 20세기와는 다른 시대임을 자각하게 된 걸까. 먼저 금융위기의 발생. 2008년 금융위기, 이른바 ‘대침체’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작동 위기였다. 1980년대 시작한 신자유주의 시대는 절정을 지나 새로운 체제 이행으로 나아가고 있다.이어 포퓰리즘의 부상. 21세기 포퓰리즘의 발흥은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승리를 구가했던 민주주의의 기반을 뒤흔들어 왔다. 예를 들어, 2021년 1월 대선 결과에 불복한 미국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해 파괴 활동을 벌인 것은 21세기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의 도래. 폭염·홍수·태풍·가뭄·한파·산불 등 기상 재난이 가져오는 지구적 위험은 점점 강도를 더해 왔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주장하듯 기후위기는 야생동물들로 하여금 서식지를 이동시켜 인간 세계에 다가오게 함으로써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바이러스 폭풍의 직접적 원인을 이뤘다.
금융위기, 포퓰리즘, 기후위기라는 이 세 가지 현상은 21세기가 20세기와 어떻게 다른지를 생생히 증거한다. 새로운 세기의 기대감에 들떴던 1990년대 말,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우울한 21세기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사회적 불평등이 확산되고, 저급한 선동 정치가가 등장하며, 병적인 가학성 세계로 회귀해 여성과 소수자를 증오하는 경향이 만연할 거라는 예견이었다. 이 예측은 안타깝게도 틀리지 않았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이번 달에는 민주주의의 선 자리와 갈 길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내가 선택한 두 개의 고전적 텍스트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1945)과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1915~2014)의 ‘민주주의’(On Democracy·1998)다. 20세기 중반과 후반에 각각 발표된 이 저작들은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보는 데 적절한 지적 거울이다.
칼 포퍼가 쓴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1945)과 로버트 달이 쓴 ‘민주주의’(On Democracy ·1998). 이 사진에 소개된 책들은 모두 2020년 출간된 것이다. [프린스턴대 출판부, 예일대 출판부]
열린사회의 적들은 누구인가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증병존을 갖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여전히 호의를 갖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제 잊고 싶은 이념이 아닐까. 그 시절 마르크스주의의 열풍은 거셌다. 금단의 사과가 매력적이듯 마르크스주의는 금단의 이론이었기에 더욱 매혹적이었다.1980년대 우리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표적 비판 논리를 제공한 책은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었다. 내가 공부한 사회학과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옹호하면, 나이 든 교수들은 으레 포퍼의 논리를 소환해 응수하곤 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을 발표한 해는 1867년이다.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발표한 해는 1945년이다. 서구 19세기 후반의 사유와 20세기 중반의 사유가 우리나라 20세기 후반 대학 사회에서 격돌한 거였다. 냉전 분단체제의 지성사적 풍경이었다.
포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이자 사회철학자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사회철학자로서 포퍼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저작이다. 철학자 이한구에 의해 제1권 ‘플라톤과 유토피아’가, 철학자 이명현에 의해 제2권 ‘헤겔과 마르크스’가 우리말로 옮겨졌다. 이한구는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읽기’(2014)라는 소책자를 내놓기도 했다.
포퍼라는 이름을 서구 지식 사회에 알린 것은 ‘탐구의 논리’(1934)였다. 이 책은 당시 서구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분석철학의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한 것이었다. 과학철학자로서 포퍼에게 중요한 두 가지 방법론적 기초는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원리’와 ‘방법론적 개체주의’다. 반증가능성이란 경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한 진술이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는 그 진술의 반증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방법론적 개체주의란 사회를 전체론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는 방법이다. 사회는 유기체적 존재가 아니기에 개별 요소들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포퍼는 주장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한 쌍을 이루는 저작이 ‘역사주의의 빈곤’(1944)이다. 포퍼에게 역사주의란 두 가지 논리로 구성된다. 역사적 예측을 사회과학의 기본 목표로 생각하는 게 하나라면, 그 목표는 역사의 리듬과 유형, 법칙과 경향을 발견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는 게 다른 하나다. 방법론적 전체주의, 역사적 법칙론, 법칙에 따라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주의가 역사주의를 이루는 구성 요소다.
‘역사주의의 빈곤’을 집필한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시절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념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였다. 포퍼에게 이 두 이념은 선민사상에 기초한 역사주의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선민사상이란 역사의 뒤편에 신의 계획이 놓여 있고, 신이 그 계획을 달성하게 하는 이들을 선택한다는 믿음이자 이념이다. 이 선택된 이들을 파시즘은 ‘인종’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으로 정식화했다는 게 포퍼의 생각이었다. 역사가 인종과 계급이 주도하는 법칙적 과정이라는 논리를 비판하는 게 포퍼의 목적이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이러한 논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세 철학자를 다룬다. 제1권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을, 제2권에서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상을 다룬다. 먼저 플라톤은 지도자가 우월한 존재이기에 절대 권력을 갖고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철인왕’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론이다. 플라톤의 사유에는 이처럼 전체론과 역사주의가 숨 쉬고 있다.
한편 헤겔은 역사가 변증법적 법칙에 의거해 발전한다고 파악했다. 마르크스 역시 역사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동력으로 다섯 단계를 거쳐 발전하며, 그 마지막에는 사회혁명을 통해 공산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형적인 역사주의 해석이다. 포퍼가 비판하려는 것은 법칙적 발전을 강조하는 헤겔과 마르크스 이론이 과학이 아니라 허구라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퍼는 ‘닫힌사회 대 열린사회’를 대비시킨다.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의 역사주의가 전제하는 사회는 닫힌사회다. 그것은 1940년대 당시 파시즘과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사회다. 반면 열린사회는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고 서로의 비판을 수용하는, 그리하여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주의 사회다.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에 맞서 포퍼는 점진적 역사발전론, 즉 ‘점진적 사회공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하는 열린사회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비판적 합리주의’다. 이성과 합리성을 신뢰하되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증가능성을 수용하는 태도가 바로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다.
프랑크푸르트학파 허버트 마르쿠제와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러한 포퍼의 자유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마르쿠제는 점진적 사회공학에 맞서 근본적 사회혁명을, 하버마스는 비판적 합리주의에 맞서 헤겔리언 변증법을 지지했다. 주목할 것은 전후 서구 역사가 마르쿠제와 하버마스 이론보다는 포퍼 이론에 더 가깝게 진행돼 왔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해 10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게시된 여·야의 플래카드에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 다원민주주의다. 이 다원민주주의의 제도와 관행을 중시하고 이를 실제적으로 분석한 이가 달이었다. 달은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다두정(polyarchy)’이라고 명명했다. 현대사회의 ‘분산된 불평등’과 ‘기회의 평등’이 다두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달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논리와 분석으로 달은 전후 민주주의론의 최고 이론가로 평가받았다.
달의 지적 여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다원민주주의에서 경제민주주의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 달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회의하고, 정치적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개선하기 위한 경제 영역의 민주적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다룬 책이 ‘경제민주주의’(1985)다. 달의 경제민주주의의 출발점은 알렉시 드 토크빌의 고전적 민주주의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기반으로 확립되지만, 그 평등이 자유를 위협해 민주주의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토크빌의 주장에 달은 이의를 제기한다. 평등이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니라 그 평등을 통해 자유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게 달의 견해다.
이렇게 달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수에서 진보로 나아간 것처럼 보였다. 서구사회든 동아시아든 지식인들이 나이가 들면 보수화되는 것과 달리, 달은 그 반대로 자신의 사유를 근본적으로 성찰함으로써 보수에서 진보로 나아간 이채로운 사회과학자였다.
1998년 달은 ‘민주주의’를 내놓았다. 이 책은 민주주의 입문서이자 교과서다. 달은 민주주의를 국민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정치제도로 이해한다. 민주주의를 수단 또는 절차로 보는 기성 정치학과는 달리 달에게 민주주의의 핵심은 인민의 자기지배에 있다.
‘민주주의’에서 내 시선을 끈 달의 견해는 세 가지다. 첫째는 민주주의가 가져오는 바람직한 결과들이다. 전제정치의 방지, 본질적 권리들, 일반적 자유, 자기결정, 도덕적 자율성, 인간개발, 본질적인 개인적 이익의 보호, 정치적 평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해 민주주의는 평화의 추구와 번영을 가져다준다. 민주주의를 선택해야 할 이유를 달은 이처럼 명료하게 제시한다.
둘째는 대규모 민주주의 체제에 필요한 여섯 가지 조건이다. 선출된 공직자들, 자유롭고 공정하며 빈번한 선거, 표현의 자유, 선택의 여지가 있는 정보원(情報源), 결사의 자율성,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정치제도에 필수적 권리를 부여하는 융합적 시민권이 그것이다. 이 여섯 가지 민주제도를 갖춘 정치체제가 ‘다두 민주주의’다.
셋째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친화적인 동시에 적대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달에 따르면, 다두 민주주의는 시장자본주의가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국가에서만 지속돼 왔다. 이러한 친화적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경쟁’과 같은 시장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이 민주주의 제도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두 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는 서로 수정하고 제한하는 적대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장자본주의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고, 이는 다시 정치적 자원의 배분에서 불평등을 야기함으로써 다두 민주주의의 잠재성을 제한하게 된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이중적 관계에 대한 분석의 결론으로 달은 둘 사이의 생산적 긴장 및 협력을 요청한다. 그 관계가 지향하는 바는 다두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의 훼손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시장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방법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달에게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해 분명한 사실은 두 가지다.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정치제도는 부재(不在)한다는 게 하나라면, 민주주의의 가치와 자본주의의 효율을 동시에 증대시킬 모델 개발 및 실천이 중요한 제도적 과제라는 게 다른 하나다. 이처럼 달은 자기 시대와 자기 이론에 대해 더없이 정직하면서 성찰적인 사상가였다.
21세기 포퓰리즘의 부상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데 포퍼와 달 사이에는 변화가 관찰된다. 그 논리의 전개 과정을 보면 전체주의를 비판한 포퍼의 주장은 수긍할 만하다. 전체주의는 닫힌사회다. 열린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다원주의의 상상력과 실천이 일차적으로 요구된다. 20세기 전반이 닫힌사회와 열린사회, 다시 말해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이었음을 돌아볼 때 전후 서구 사회의 역사는 포퍼의 기대처럼 진행돼 왔다.그런데 1970년대 이후 자유민주주의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기업자본주의의 힘이 커진 거였다. 이에 달은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자본주의 기업들 내부에 존재하는 비민주적 행정, 그리고 기업의 배타적 소유권과 이로 인한 불균등한 이익의 배분이 가져오는 정치적 불평등이 그것들이다. ‘다원민주주의의 딜레마’다.
달은 두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하나가 경제민주주의라면, 다른 하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간 생산적 균형이다. 달은 20세기 후반의 경험을 돌아볼 때 전자의 실험이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하고, 후자의 목표를 21세기 민주주의의 과제로 남겨둔다. 시장자본주의가 갖는 장점의 최대화와 정치적 평등이 받을 위협의 최소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21세기 민주주의의 성격과 질을 결정할 거라고 달은 결론짓는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달이 우려했던 불평등의 결과다. 21세기에 들어와 불평등의 점진적 구조화는 포퓰리즘을 불러들였다. 여기서 말하는 포퓰리즘은 ‘21세기 포퓰리즘’이다. 21세기 포퓰리즘은 ‘20세기 포퓰리즘’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21세기 포퓰리즘은 인기영합주의라는 점에서 20세기 포퓰리즘과 유사한 반면, 반엘리트주의와 반다원주의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21세기 포퓰리즘의 부상에는 여러 요인이 존재한다. 세계화의 증대에 따른 이민과 난민의 증가,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리더와 시민들 간의 ‘정치적 직거래주의’의 활성화가 그 배경을 이뤘다. 물론 결정적인 것은 불평등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의 실종이었다. 점증하는 불평등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말한 세습자본주의 경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평등을 완화시킬 정치가 작동해야 했음에도 기성정치는 우파든 좌파든 무능했다. 포퓰리즘은 이에 대한 정치적 반응이자 결과였다.
권력 쟁취의 무한 전쟁터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인도 태평양 지역회의가 3월 30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려 윤석열 대통령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둘째, 포퓰리즘은 반엘리트주의 정치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쓴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에 따르면,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이분법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킨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엘리트란 기득권의 다른 호칭이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은 정치의 목표가 엘리트 기득권에 맞서 인민 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논리보다 정서에 의존하고, 민중이 정치의 주인임을 내세우는 게 포퓰리즘 정치의 중핵을 이룬다. 이런 반엘리트주의는 대중 다수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가졌고, 이런 호소력은 포퓰리즘의 지구적 부상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쳐왔다.
셋째,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이다. 뮐러가 지적하듯, 반엘리트주의가 모두 포퓰리즘인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의 중요한 특징은 엘리트주의와 다원주의를 모두 반대한다는 점에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만을 ‘진정한 국민’으로 여긴다. 그리고 포퓰리스트 정치가 자신들과 진정한 국민만이 정치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즘의 20세기적 특성, 즉 국가 재정을 탕진하는 인기영합주의만이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의 비자유주의와 반다원주의는 극단적인 이념 대결의 고착, ‘정치적 부족주의’의 등장,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선동적인 가짜 뉴스의 범람을 낳아왔다.
21세기 포퓰리즘은 정치사회를 공통의 정서와 신념으로 무장한 세력들이 벌이는 권력 쟁취의 무한 전쟁터로 전환시킨다. 기성 정치의 혐오화와 상대 세력의 악마화는 21세기 포퓰리즘의 두 전략이다. 권력의 탈이성화와 과잉 감성화는 21세기 포퓰리즘의 두 얼굴이다.
이쯤에서 포퍼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두 개의 닫힌사회가 충돌하는 것이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두 개의 닫힌사회는 오늘날 구조화된 정치 양극화로 드러나고 있다. 달의 통찰을 빌려온다면,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는 한, 반다원주의로 무장한 포퓰리즘 시대는 계속될 것이다. 경제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에 영향을 미치고, 정치 양극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고 있는 것이 21세기 현대정치의 자화상이다.
다원민주주의를 향하여
그렇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최근 우리 민주주의가 직면한 최대 문제는 세 가지다. 다원주의의 빈곤, 포퓰리즘의 부상, 정치 양극화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현상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포퓰리즘의 부상과 다원주의의 빈곤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이러한 현실이 정치 양극화를 부추기고 구조화하고 있다. 이 양극화된 정치 질서는 그렇다면 변화할 수 있을까. 현실을 지켜볼 때 그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세 가지다.첫째, 국가 비전과 정책 방향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분명해 보인다. 국가 운영의 양대 축인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을 지켜보면, 보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한미동맹 중심의 대북 강압정책을, 진보는 케인스주의 경제정책과 균형외교 중심의 대북 포용정책을 각각 자신의 정책적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21세기적 의제라 할 수 있는 젠더정책과 환경정책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선명히 부각되고 있다.
둘째, ‘87년 헌법’의 핵심 중 하나인 대통령제 또한 정치 양극화의 제도적 원인을 이룬다. 대통령제는 기본적으로 승자독식 시스템이다. 그러기에 21세기에 들어와 어떤 정부도 국민통합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적은 없다. 그런데 만일 내각제였다면,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다른 세력과 정치 연합이 추진됐을 가능성이 높다. 권력구조에 대한 헌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 승자독식과 이와 연관한 정치 양극화는 계속될 것이다.
셋째, 포퓰리즘에 기반한 ‘갈라치기’가 정치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포퓰리즘은 ‘기득권 대 국민’이라는 균열에 기대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치 집단만을 진정한 국민으로 받아들인다. 갈라치기 전략이다. 상대방을 오래된 기득권세력 또는 새로운 기득권세력이라 서로 공격하고, 상대방과의 공존을 완강히 거부하며, 자신의 지지 그룹에만 배타적으로 메시지를 타전하는 갈라치기가 우리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가 부딪치고, 자본과 노동이 충돌하고,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 대결하고,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갈등하고, 남성과 여성이 적대하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민낯이다. 이러한 정치 질서 아래에서 현재와 미래의 권력 자원을 놓고 진영 간 대립은 격화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상황이 이러하다고 해서 진영 또는 요새로 나눠진 우리 민주주의를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는 점이다. 사회통합이 중요한 까닭은 간단하다. 저성장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성장과 분배는 다원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다시 말해 협치와 통합을 추구하는 포용적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오늘날 국민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 따라서 익명의 국민을 동원하려는 통합은 철 지난 방식이다. 21세기에 요구되는 통합은 권위적 국민통합이 아니라 이념·세대·젠더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적 사회통합이다. 다원주의와 사회통합이 맞서는 가치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다원주의와 사회통합을 ‘포지티브섬 관계’로 만들어가는 게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점이다.
2023년 대한민국의 현재, 다원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원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은 불평등과 사회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가장 소망스러운 체제이자 방법이다. 열린 정치사회와 성숙한 민주주의 없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세기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달의 ‘민주주의’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호기
● 1960년 경기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센터 코렛 펠로
● 現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저서 :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신기욱과 공편) 등
신동아 9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