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中 세력권 구축, 대한민국엔 주권 빼앗길 위기

[이근의 텔레스코프] 주변국 지배하려는 제국 慣性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4-02-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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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발전국가 모델로 세계 2위 경제대국 浮上

    • 집권 세력 세계관 따라 제국·시장경제 오가는 나라

    • 주변국 굴복·복속으로 덩치 키운 과거 本性

    • 자유주의 국제질서 안착하기엔 아직…

    [Gettyimage]

    [Gettyimage]

    미국의 정치학자 고(故) 찰머스 존슨은 한국, 일본, 대만 등 후발 산업화 국가의 초고속 산업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처음엔 유럽의 선진국에 비해 늦게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이 발전국가 모델이지만 한국과 대만의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과의 유사점이 발견돼 곧 동아시아의 기적을 설명하는 모델로까지 확장됐다. 최근엔 우리보다도 더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중국의 고속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다.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제학자들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발전국가 모델의 설명력을 끊임없이 비판해 왔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국가들의 발전 과정에서 국가의 연성 권위주의(soft authoritarian)가 공통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발전국가 모델의 설명력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단칼에 부정하기는 어렵다.

    연성 권위주의에 의한 경제발전은 강력한 국가의 행정지도(administrative guidance) 혹은 강제력으로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취약했던 사적 영역(private sector)을 만들고, 좁은 국내시장이 아닌 넓은 세계시장을 향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전략으로 삼아 고속 성장을 이뤄낸 것을 의미한다.

    기존에 없던 것이나 취약했던 것을 빨리 만들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동원돼야 하고, 이는 권위주의적 정부로 표상된 것이다. 즉 권위주의가 자유시장경제 안에서 리더십으로 발휘된 경우 고속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가 발전국가 모델의 논리다.

    근대화된 노동력과 노동시장을 만들고, 기업과 기업가를 만들고, 금융을 포함한 자유시장경제가 돌아가는 시장 제도를 만들고, 공공 인프라를 구축하고, 수출 활로를 개척해 주고, 시장 정보를 수집해 기업과 공유하고, 사회 안정을 확립하는 등 이 모든 것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일정 수준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공과(功過)가 나뉘는 것도 발전국가 모델이 권위주의와 고속 경제성장이라는 부정적 면과 긍정적 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中, 제국 관성 & 시장경제 동학 공존

    발전국가 모델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선행조건이 성립돼야 한다. 산업화 이전부터 존재한, 효율적이고 우수한 중앙집권적 관료정부다. 국가고시를 통해 충원된 우수한 관료 인력과 효율적 국가 제도가 이미 존재했기에 이를 통해 신속히 사적 영역을 만들어 고속 근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조선시대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모방 수입한 중앙집권화형의 효율적 관료국가를 가지고 있었다. 또 높은 교육열 덕분에 훌륭한 인재를 공적·사적 부문에 신속히 공급할 수 있는 선행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선행조건은 일제강점기에 더 근대적 양상으로 이어져, 광복 후 한국이 발전국가로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한국뿐 아니라 일본, 대만, 베트남, 그리고 중국도 모두 이러한 발전국가의 선행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연성 권위주의와 발전국가 모델은 아직도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발전국가 모델에 대해 상술한 이유는 ‘신동아’ 1월호 글에서 예고한 대로 현대 국제정치에서 중국의 부상이라는 문제와 그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현 단계에서 한국이 당면한 국제정치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선 세계 2위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과 향후 중국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이미 미국을 위시한 선진 강대국들은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자국의 중국 전문가 및 국제정치·사회과학 전문가들을 거의 총동원하다시피 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작 바로 이웃에 위치해 어떤 국가보다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될 우리나라의 대응책은 미국 학계가 내놓은 다양한 분석과 처방에 대한 찬반 정도에 그치고 있다. 경제적 의존도나 안보적 함의, 북한 핵문제 대응 등에서 중국이 한국의 미래에 미칠 영향은 미국이 미치는 영향 못지않게 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그저 해외에서 제시된 처방을 놓고 찬반을 얘기하는 수준의 진영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은 정말 큰일이다.

    발전국가 개념과 분석틀은 중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연속성과 새로운 발전 방향을 동시에 보여주는 매우 유용한 도구다. 발전국가의 선행조건인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는 전근대 중국 제국이 발전시킨 국가체계고, 이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한 발전국가 중국은 과거의 제국적 모습을 관성적으로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제국의 관성과 시장경제의 동학이 공존하면서, 집권세력의 세계관에 따라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번갈아 움직이는, 시계추와 같은 모습을 보이리라는 의미다.

    대륙제국 本性 = 주변국 굴복·복속

    중국 산시성 윈청시 관제묘(관우의 묘)에 걸려 있는 중국 삼국시대의 전국지도에 한반도 지역을 뺀 고구려의 영토(오른쪽 위)가 그려져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의 일부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DB]

    중국 산시성 윈청시 관제묘(관우의 묘)에 걸려 있는 중국 삼국시대의 전국지도에 한반도 지역을 뺀 고구려의 영토(오른쪽 위)가 그려져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의 일부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DB]

    중국은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근대 주권국가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제국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국가다. 실제로 근대 이전엔 줄곧 공식적 제국이었다.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이 만들어놓은 몰역사적 국제정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를 그저 주권을 가진 민족국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20세기 중반까지 국제정치의 주인공은 제국이었다. 여기서 제국이란 단순히 군사력이 강한 강대국이 아니라 자국이라는 중앙과 이민족 혹은 식민지라는 주변부가 체계적으로 통합된 국가를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서 제국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대별(大別)된다. 하나는 대륙에서 형성돼 거대한 영토를 점한 대륙제국이고, 다른 하나는 해양의 통상 거점을 이어가며 식민지를 건설한 해양제국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은 이 두 종류의 제국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대륙제국과 해양제국은 제국의 성립 이유와 동학이 상당히 다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이전 수천 년간 인간은 농업경제에 의존해 생존해 왔고, 비옥한 땅과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집단을 이뤄 투쟁해 왔다.

    대륙제국은 이미 유리한 조건의 지리적 위치를 차지한 국가로서 제국의 영토를 노리고 침입해 오는, 이른바 ‘야만 세력’을 굴복·복속하면서 덩치를 키운 광대한 국가다. 지리적 범위가 너무 넓어지면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거나 과도한 국력이 소모돼 제국의 중앙이 흔들릴 수 있으므로 주변부의 위협 세력을 반드시 안으로 복속시키진 않았다. 대신 조공을 바치는 종속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대륙제국은 주변부의 위협 세력을 자국의 세력권 안에 안정적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잦은 외침(外侵)과 이에 따른 국력의 소모로 붕괴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효과적 정치체제로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이루게 된다. 주변부의 원심력을 막아내는, 구심력이 강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해양제국은 대륙제국과는 다른 과정으로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좋은 지역은 이미 대륙제국들이 차지했고, 대륙의 주요 통상로마저 그들의 통제하에 있었기에 유럽의 해양에 위치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영국 등 해양세력은 대륙 대신 해상로를 개척해 통상으로 생존·번영을 꾀했다. 즉 해양제국은 비단·차·향료 등 값비싼 고급 재화를 원거리 해상무역을 통해 들여와 부를 쌓고, 이를 통해 강한 군대(특히 해군)를 보유하게 된 국가들이다.

    해양제국은 해외의 통상 거점이나 식민지를 개척해야 경제가 번성하기 때문에 ‘주변부의 침략’이라는 대륙제국의 원심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 수입원을 확보하기 위해 무역상과 일정 수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해양제국의 국가와 상인이 협력해 구축한 제국주의적 회사다.

    이러한 연유에서 해양제국은 처음부터 해외의 다른 국가와 통상관계 및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이러한 통상관계가 자본주의 근대화로 이어지면서 국가 간 계약을 중시하는 지금의 주권국가로 발전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통상을 통해 하나의 세계시장으로 묶인 지금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가장 잘 조응하는 핵심 국가로 발전했다.

    아시아에 제국주의 그림자 드리울 시진핑·트럼프 時代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 뉴시스]

    통상보다는 오랜 기간의 전근대적 농업경제, 그리고 군사력에 의한 영토 확장과 주변 세력의 복속에 익숙한 대륙의 중앙집권적 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과거 대륙제국의 관성을 가지고 현대로 진입하게 된다.

    두 개의 광대한 대륙제국인 중국과 러시아는 불행하게도 근대화 과정에서 시장을 통한 통상국가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채택한 사회주의 제국을 유지했다. 이들은 20세기 말에 들어서야 비로소 근대 시장경제 국가로 전환하는 기회를 갖는다. 중국은 권위주의적 중앙집권 국가에서 발전국가로 전환하면서 사적 영역을 신속하게 만들었고,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을 이룩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수천 년의 대륙제국 역사에 불과 수십 년의 발전국가 역사가 접합된 나라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안착하기엔 아직 대륙제국의 관성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일본이나 한국, 대만과는 다른 발전 경로로 중국이 진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중국엔 사회주의 비전을 버리지 않은 공산당이 건재하다. 국가 통합·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과거 위대한 제국에 대한 향수를 동원하는 지도자도 등장할 수 있다.

    대륙제국은 외세의 위협이 시장을 통해 침투하는 통상보다는 자기완결적 자급자족 경제를 추구하려는 동학이 강하다. 발전국가 모델을 통해 경제성장에 성공한 중국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데이터 플랫폼 경제를 구축해 동아시아 과거 조공국들의 경제를 이 안으로 통합하는 새 대륙제국을 꿈꿀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인공지능(AI)을 가동하면 중앙이 주변을 통제하는 데이터 제국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진핑 정부에서 추진하는 ‘중국제조 2025’ ‘쌍순환 경제’ ‘국제질서의 다극체제’ 등은 대륙제국의 관성에서 생겨난 비전이라고 여겨질 만한 요소들이다.

    미국과 유럽 관점에선 중국이 제국적 세력권을 구축하면 세계시장이 분절되는 것 정도의 의미겠지만 한국으로선 국가 주권이 중국이라는 제국의 플랫폼 안으로 흡수될 위기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 특히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시진핑과 미국 최우선주의 세계관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가 오면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미래가 앞당겨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대륙제국의 관성이 커진 시진핑 치하 중국을 상대하기 위한 ‘강대국 대한민국’ 비전 수립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다음 번 글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주는 국제정치적 의미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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