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우회적 접근’이 주는 교훈

병법의 대가 손빈, 라이벌의 간휼을 이겨내다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6-02-16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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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빈은 한때 라이벌인 방연의 모함으로 배신을 당하고 위기에 몰렸으나 두 차례의 대전투를 치르면서 이를 극복해냈다. 자고로 질투심에 불타는 동문이나 동향은 멀리하는 게 이롭다.
    ‘우회적 접근’이 주는 교훈
    질투심은 추잡하고 해롭다. 그러나 경쟁심은 고상하고 이로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정치학자에다 수사학(修辭學)의 대가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겨레의 착하고 훌륭한 선비들에게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일부 동문(同門), 동향(同鄕)이나 수양이 안 된 친구라면 결단코 멀리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여기 소개하는 병법의 대가 손빈(孫?)만 해도, 젊어서 순진할 때 질투심에 불타는 동문을 간단히 믿었다가 크게 봉변당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명성이나 권세를 좇는 야심가일수록 자기와 동등한 출신이라 생각하던 사람의 평판이 자자해지거나 지위가 높아지면 질투심이 심해진다고 했다. 야심만 컸지 지능이나 학식이 부족하니, 결국은 야비한 수단과 방법으로 상대를 깎아내려서 다시 동등하게 만들어야만 안심한다는 꼴이다.

    손빈의 선조로는 제(齊)나라를 탈출해 오(吳)나라로 가서 병법의 대가로 명성을 떨친 손무(孫武)가 돋보인다. 그의 후손인 손빈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착했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자라서 훌륭한 스승을 찾게 됐는데, 때마침 솔깃한 소문이 식자들 사이에 자자했다. 귀곡(鬼谷)이라는 험준한 심산유곡에, 어디서 왔는지 점잖은 선비가 홀로 찾아들어 주변을 살피고는 은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명을 밝히지 않아 사람들은 그저 ‘귀곡선생’이라고 불렀다. 경력은 모르겠으나 정치와 군사에 관한 소양이 해박하고 심오하며, 난세의 철학을 터득하고 있음이 명백하다고 했다. 처음엔 고독을 즐기는 듯 보였으나, 차츰 난세를 수습할 영재를 만나면 골라서 교육한 다음 세상으로 돌려보낸다는 평판이 있었다. 바로 손빈이 찾던 스승이었다.

    구름이 넘나드는 깊은 골짜기를 더듬어 찾아 올라간 손빈을 눈여겨본 귀곡선생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거의 때를 같이해 위(魏)나라의 방연(龐涓)이라는 젊은이도 찾아와서 함께 병법을 공부하게 됐다. 그런데 방연은 영리하면서도 질투심이 강했다.



    귀곡선생은 제자들을 평등하게 다루면서도 자연스레 손빈에게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손빈 쪽이 더 현명하고 착했기 때문이다. 기억력과 두뇌 회전에 별 차이가 없는 듯해도 성정이 착해야만 미래에 대한 통찰이 공정할 수 있다. 영리하면 동작은 빠를 수 있어도 통찰력에서 뒤지게 된다. 또 착해야만 덕망이 높을 뿐 아니라 통솔력이 탁월하다. 반대로 질투심에 사로잡히면 간휼(奸譎)과 편견으로 흘러 사람들이 심복하지 않는다.

    두 청년은 학업을 마치고 동시에 하산했다. 손빈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방연은 위나라로 귀국하자 재빨리 구직운동을 벌여 등용됐으며, 장군으로 승진했다. 위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당시의 제나라는 손빈의 조국이지만 군주인 환공이 우매한 탓에 국정이 문란해져 선비들이 희망을 걸기 어려웠다. 때마침 위나라의 방연에게서 초청의 친서가 날아왔다. 위나라 혜왕이 어진 사람을 예우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니, 즉 예현하사(禮賢下士)할 줄 아니 이곳에 와보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손빈은 응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방연의 모함과 손빈의 탈출

    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신중을 결(缺)하고 경솔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혜로운 사람도 한두 번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손빈은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을 믿었던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약점이지만, 만사가 여의치 않을수록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또 신중함을 잃고 쉽게 ‘희망적 관측’에 쏠리기 쉽다.

    동시에 착한 사람의 약점이지만, ‘선의적 해석’이라는 것도 있다. 정직한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마음을 추측하다 판단이 어긋나는 것이다. 이번의 경우, 방연의 초대장은 질투심에서 비롯된 간휼한 모략이었다. 자기보다 우수한 잠재적 라이벌을 없애버려야 안심이 된다는 악랄한 발상이었던 것이다.

    손빈이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에 도착하자 혜왕은 기뻐했다. 그럴수록 방연은 빨리 손을 써야겠다고 작심했다. 그래서 국가 안보의 책임자인 자신이 위나라의 파멸 위기를 재빨리 예방한다는 구실로 손빈을 체포했다. 그러고는 손빈이 위나라에 와 있던 제나라의 특사와 내통하고 동조자를 규합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다는 죄명을 날조하여 그를 가혹하기 그지없는 빈형(?刑)에 처했다.

    빈형이란 무릎뼈를 제거하고 얼굴에 큰 흉터를 만드는 형벌이다. 관습상 이런 형벌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공직에 오를 수 없으며, 국왕은 만나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후 방연은 손빈의 도주를 막고자 엄중한 감시망을 붙여놓았다.

    손빈은 고통과 절망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졌고 정신이상을 가장해 살아남으면서 하늘의 도움과 우연의 배합을 기다렸다. 그런데 60억 인류의 지문이 각기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개성에 차이가 있고, 인간성도 한결같지 않다. 감시인 중에 동정하는 자가 생겼고 대화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들의 정보에 의하면, 제나라에 새 군주가 즉위했는데 그가 위왕(威王)이고, 인재의 발견과 등용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했다. 또 제나라의 새 특사가 이곳 대량에 도착했다고 알려줬다.

    허점을 보아 감시망을 빠져나온 손빈은 제나라 특사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다. 특사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또한 동정하여 손빈을 마차 한구석에 숨기고 제나라로 돌아갔다. 마침내 손빈이 풍부한 학식과 경험, 뛰어난 지능을 살려 전국시대의 중국 천하에 명성을 떨칠 역사적 기회가 온 것이다.

    귀국한 손빈은 잠시 전기(田忌) 장군의 저택에 기거하게 됐다. 전기는 위왕의 친척으로 국방장관 격이었다.

    마차 경주의 지혜

    전기는 손빈을 자주 만나 군사와 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 지식과 경험, 통찰력에 탄복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전국시대 중엽에 접어들면서 군대의 으뜸 병종도 과거식 전차를 에워싼 보병으로부터 기동력과 돌격성을 중시하는 기병으로 바뀌던 무렵이었다.

    그런 새로운 풍조를 반영하듯, 운동경기에 돈을 거는 ‘내기’도 각종 경마로 옮겨갔다. 장교들 사이에선 ‘말 타고 활쏘기’가 유행했다. 그러나 왕족과 고급귀족들 사이에선 각자가 3대의 4두마차를 출장시키는 경주가 유행했다. 손빈도 몇 번 그 경주를 관람했다. 보아하니 쌍방이 출장시키는 각 3대의 마차는 상·중·하로 구분되는데, 동급이라면 말의 주력에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큰돈을 거는 내기이니 이겨야 좋다. 그래서 손빈은 꼭 이길 계략을 짜서 전기에게 건의했다.

    “우리 측의 가장 느린 마차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마차와 겨루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측의 가장 빠른 마차는 상대방의 두 번째 빠른 마차와, 우리 측의 두 번째 빠른 마차는 상대방의 가장 느린 마차와 경쟁케 합니다. 그러면 합계해서 2대 1로 반드시 이깁니다.”

    전기가 그의 건의를 따랐더니 어김없이 이겼고, 내기 돈을 크게 거둬들일 수 있었다. 국왕과 한 내기에서도 승리하니, 위왕은 그 비결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손빈의 그러한 계략은 20세기 들어 1940년대 이후에 발달하기 시작한 기획연구인 신흥학의 원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컨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人工頭腦學)나 경영학의 ‘경영전략 연구’니 ‘기획 업무론’은 한결같이 성공을 위한 인력 및 물적 자원의 효율적 사용에 관해 ‘종합성 안목에서의 합리적 안배’를 강조한다. 쉽게 풀이하면 손빈의 경마 이론과 같다.

    처음엔 수학자와 통계학자들이 이를 연구했으며, 과학기술의 새 분야로 간주되다 마침내 경영학과 군사학에도 운용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엔 무역 자유화와 농업보호정책 간의 모순과 당착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에도 원용되고 있다. 다만 한층 더 폭넓고 깊이 있는 보상·보조·홍보 대책이 아쉽게 느껴진다.

    다시 손빈의 고사(故事)로 돌아가서, 그의 발상을 볼 적에 뚜렷한 것은 ‘상대를 알고 스스로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가르친 손무의 일깨움에 대한 충실한 터득이다. 이는 적과 나의 ‘힘 관계’와 그 포치(布置)를 알고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상대방이 생각지 않던 방법을 채택해야만 대승을 거둘 수 있다(以奇制勝)’는 원칙에 대한 슬기롭고 대담한 실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한국인도 익히 아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제갈량 또한 감탄하면서 이렇게 썼다.

    “손빈의 그 실천은 바로 군사이론의 진수이지, 결코 단순한 경마이론이 아니다.”(兵說也, 非馬說也…. 諸葛亮集, 兵法).

    마침내 위왕이 전기에게 필승의 연유를 묻자 전기는 손빈의 지혜라고 정직하게 찬양했다. 위왕은 손빈을 초대하여 만나기로 했다. 위왕과 전기 두 사람 모두 기량이 큰 대인이었다.

    계릉의 싸움과 마오쩌둥의 격찬

    ‘우회적 접근’이 주는 교훈

    ‘우회적 접근’ 작전을 구사한 손빈의 전법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사진)의 전법과 일맥상통한다.

    손빈과 면담을 나누고 그 능력을 확인한 위왕은 그를 즉각 장군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손빈은 신체적 손상을 이유로 사절하고는 고문의 역할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위왕은 결국 그를 군사(軍師)로 임명해 장군인 전기를 돕게 했다. 당시 강대국으로 알려졌던 위(魏)나라 군대의 주력을 두 차례 상대하여 끝내 방연을 패망시켜 명성을 천하에 떨칠 기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그 첫 번째인 ‘계릉의 싸움(桂陵之役)’은 기원전 354년에 개시되고 약 1년 후에 일단락됐다. 그해 가을 방연이 위군의 주력을 인솔하고 북상하여 조(趙)나라 수도 감단(邯鄲)을 포위 공격했다. 조나라는 동맹국인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 위왕이 안보회의를 소집했더니, 구원 문제에서 찬반양론이 엇갈렸다. 반대론은 위험 부담과 준비 부족을 이유로 지금은 출병치 않고 위·조 양국의 공동 피폐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출병론은 동맹의 의리와 국제적 신뢰도를 강조했다. 동맹의 충실성이 국가이익과 직결된다는 주장이었다. 합리적인 차선책으로는 병력을 부분 출동시켜 송(宋)·위(衛)나라 같은 약소국과 협력하여 위나라의 남부 국경을 교란하면서 ‘제2 전선’을 형성해 체면을 세워보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결국 차선책이 채택됐다.

    다음해 가을이 되자 조·위군 양측에 모두 피로의 기색이 엿보였다. 조나라의 구원 요청은 더욱 절실했다. 드디어 제나라가 본격적인 구조작전을 결정했다. 전기가 장군, 손빈이 군사로서 인솔하는 병력은 약 8만명. 이는 방연이 이끄는 적의 주력과 비등한 병력이었다.

    전기의 당초 구상은 감단으로 직행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손빈이 말렸다. 아군이 먼 길을 고생스러운 직선 행군으로 달려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많은 희생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적군의 주력이 매우 황급해서 부랴부랴 서둘러 돌아오도록 적국 내 요충지를 향해 진군하자는 것이다. 행군 중 적당히 매복해 휴식하다가 적 주력이 바삐 도착하는 대로 이를 포착, 섬멸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그러한 진군 목표인 적국 요충지가 바로 평릉(平陵)이다. 적국 수도 대량의 동북방 문호이고 불과 70리 거리다. 난점으로는 아군의 보급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평릉의 수비대가 비교적 강력하고 적군의 병력 증강도 용이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었다. 이 점을 두고 방연은 손빈 측의 작전방침을 검토하면서 이른바 ‘군사를 모르는 놈들’이라고 얕보게 될 것이다. “아군은 적장의 그러한 거만한 오판을 역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아군의 부분 병력만 허장성세로 파견하여 평릉을 거쳐 대량으로 진격케 한다. 한편 아군 주력부대는 은밀히 북상해 계릉에서 대기하다 피로한 적군 주력이 도착하는 대로 이를 격멸한다”는 것이 손빈의 계략이었다.

    그후의 사태 진행은 제군의 작전구상대로 전개됐다. ‘계릉의 싸움’은 제군의 대승과 위군의 참패로 끝났고, 거만한 방연은 포로로 잡혔다. 이 ‘계릉의 싸움’을 흔히 ‘위위구조(圍魏救趙)’ 전략의 승리라고 한다. 아군이 위나라로 진격하여 조나라로 진격했던 위군을 물러나게 한 전법이라는 것이다. 현대 용어로는 ‘우회적 접근(indirect approach)’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리델 하트의 연구는 차후에 언급키로 한다.

    손빈의 병법은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발상이었다. 그는 저서에 ‘모두 다 아는 상투적인 작전방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고 썼다. 일반적인 작전법과 판이한 전법을 구상해야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자면 사령관과 참모장이 우수해야 한다. 그리고 우수한 인재의 등용은 우수한 통치자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라면 나라가 위태롭고 겨레가 고생한다.

    마릉의 싸움과 방연의 자살

    2000여 년 후에 태어난 현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도 손빈병법을 극구 찬양하면서 그 전법을 활용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예컨대 적군이 우리 근거지로 쳐들어와서 오래도록 주둔하는 경우라면, 아군은 일부 병력만 남겨 대항케 하고, 주력부대는 적군의 후방 근거지인 요충지대를 석권케 한다’(毛澤東, 抗日遊擊戰爭의 戰略問題, 1938. 選集, 제2권)

    계릉의 싸움이 있은 지 2년 후 제·위 양국 관계는 완화됐고 교환조건을 붙여 방연이 송환됐다고 한다. 그러나 약 10년 후 다시 전쟁상태에 접어들었으니 곧 ‘마릉의 싸움(馬陵之役)’이다.

    기원전 342년 위군이 한(韓)나라를 침공했다. 5전5패를 기록하면서 한나라가 긴급구원을 요청해왔다. 제군이 출동하게 되자 역시 전기가 장군, 손빈이 군사(軍師)를 맡았다. 위군 측은 그동안 군사적 실적을 올리면서 재기한 방연이 지휘했으며, 10만 대군임을 호칭했다. 신 태자(申太子)가 동행했는데, 감시를 겸해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다는 취지였다.

    한편 손빈이 책정한 작전방침은 종전과 같은 ‘우회적 접근’이고, 위나라 수도 대량을 향한 진군이었다. 인간이란 누구나 종전에 승리해 재미를 붙인 전법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답습하게 된다. 그 점은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자 한나라를 공격 중이던 위군 주력도 수도 방위를 위해 회군했다. 사령관인 방연의 근성은 원래 그대로 거만하고 추잡했으며 전세(戰勢)를 희망적으로 관측했다. 돌아오면서 적군 동향에 관한 보고를 받아보니, 제군에 도망병이 많고 그 전력이 계속 약화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상은 손빈이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렸고, 또 거짓 조짐을 여기저기 나타냈기 때문이다. ‘희망적 관측’이 많은 적장을 ‘판단착오’에 빠뜨리고 빗나간 행동을 취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일환이다.

    드디어 방연은 제군을 얕보는 동시에 복수심과 공명심에 불탄 나머지 회군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나중엔 방연 자신이 경기병 정예부대와 행군을 같이하면서 치중병과 보병부대를 아득하게 멀리 남겨놓았다.

    한편 손빈은 진군 속도를 늦추다 마릉(馬陵)에 이르자 마침내 정지했다. 지도를 읽고 지형을 쳐다보며 계산하니, 황혼 무렵이면 방연이 쾌속부대와 함께 이곳에 도착할 형세다. 손빈은 매복을 결심했다.

    마릉 일대는 좁은 골짜기에 도로가 구부러졌고 양측에 수목이 우거졌다. 한마디로 매복에 유리했다. 도로변 큰나무의 껍질을 깎아내고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고 썼다. 선발된 궁수들을 충분히 배치하고는 ‘어두워지면 적군이 도착하여 나무에 쓰인 글을 읽고자 불을 밝힐 것이니 그때 집중 사격해 전멸시키라’고 명령해두었다.

    아닌게아니라 방연이 도착하여 큰나무에 쓰인 글을 읽고자 횃불을 밝히니 그것을 신호 삼아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와 무수한 활촉이 방연의 전신에 꽂혔다. 위병이 잇따라 스러지면서 방연에게도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다. 방연은 “저놈이 명성을 천하에 떨치겠구나”란 한마디를 남기고는 자살로 지옥을 향해 떠나고 말았다. 태자 신(申)도 포로로 잡혔다.

    이 ‘마릉지역(馬陵之役)’의 승리를 계기로 제나라는 제후국 가운데 1등 강국으로 부상했다. 한편 위나라는 2등국으로 전락했다. 그동안 서방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동방 진출을 막아온 방파제 구실을 상실한 것이다. 안으로는 인재 등용이 잘못되었고, 밖으로는 지정학에서 말하는 정면(正面) 선택을 그르쳤던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기원전 225년의 일이다.

    리델 하트의 가르침

    손빈의 작전은 계릉의 싸움과 마릉의 싸움에 걸쳐 공통적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헤아리게 한다.

    ①적군 주력을 향해 직행하거나 정면공격을 시도하지 않는다.

    ②적 주력이 방치할 수 없는 요충지를 향해 진군하여 적 주력이 부랴부랴 달려오게 한다.

    ③우리가 바라는 때와 장소에서 싸움이 벌어지도록 유도한다. 그러자면 적장에게 어떤 이익이나 유혹을 던져주어 판단착오를 일으키도록 만든다.

    이러한 전법은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발상을 연상시킨다. 충무공은 왜적의 주력을 향해 직행하거나 정면충돌을 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지한 조정이 왜군을 대한해협에서 정면공격으로 막아내라고 명령할 때 일선지휘관으로서 맹목적으로 복종하지는 않았다. 조정이 충무공을 파면하고 후임자로 임명한 원균의 경우도 내심 정면충돌을 원치 않았으나, 벼슬과 감투에 집착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맹종하다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상황과 관련하여, ‘20세기 최고의 군사평론가’라고 지목되는 영국의 언론인 출신 리델 하트(Basil Liddell Hart, 1895∼1970)는 그의 명저 ‘전략론’(Strategy, 1967)에서 ‘우회적 접근’ 또는 ‘간접적 어프로치(indirect approach)’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저서 서두에 중국의 ‘손자병법’을 인용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통해 ‘전략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간접적 어프로치의 운용 및 발전의 기록’이라고 썼다. 군사뿐 아니라 정치와 경영 내지 연애에 걸쳐 이 원칙의 적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한다.

    적군 또는 대상의 정면을 향한 직선 운동이란, 상대방의 대응준비와 물리적·심리적 저항력을 강화해주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게 마련이다.

    한편 적군 전선의 측면을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향하는 운동은 행군 도중의 저항을 회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장의 심리를 교란 혹은 당혹으로 이끌 수 있다. 즉 ‘판단착오’를 유발할 수 있는 반면에 아군은 효과적인 다음 포석을 강구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는 주도권 확보에 유리하다. 장군이라면 보통 사람 이상으로 배후의 위협적 동향에 대해 매우 민감하며 적장도 마찬가지여서 아군의 계략에 빠져든다.

    하기야 적장의 두뇌회전이 빠르다면 신속한 배치 변경, 또는 정면 변경이 형성되기 때문에 아군의 우회적 접근도 결국 ‘직접적 어프로치’나 마찬가지 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태의 발생을 예방하려면, 교란적인 행진에 앞서 다른 운동 또는 복수의 운동이 필요하다. 물리적 방법으로는 적의 병력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는 고안이 있을 수 있다. 심리적 방법은 사실이 아닌 인상을 주거나 허위의식 등으로 적장의 판단착오를 유발해 기습하는 것을 들 수 있다(손빈의 전법에서 관찰한 바와 같다).

    여기서도 장군의 성격 문제가 제기된다. 거만하거나 경솔하지 말아야 한다. 속단의 함정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집요하거나 고집쟁이여도 안 된다. 사물과 현상은 유동적이며 정세 및 상황은 변화 내지 전화의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장군은 어렵지 않게 변경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획을 가져야 한다. 한 가지를 포기해도 다른 것이 있다는 준비가 필요하다.

    ‘우회적 접근’이 주는 교훈
    朴東雲
    ● 1921년 평북 신의주 출생
    ●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 한국일보 논설위원, 샘터사 편집위원 역임
    ● 現 북한연구소 이사
    ● 저서 : ‘통치술’ ‘민족사상론’ ‘정치병법’ 등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 미소 짓는 법이다(리델 하트의 ‘전략론’ 중에서). 리델 하트의 그와 같은 ‘우회적 접근’ 또는 ‘곡선적 사고’ 전략은 발상의 기조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손빈병법을 상기시킨다. 정치가인 마오쩌둥의 격찬도 참고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법에 깃들인 역사적 교훈을 명기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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