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군부대 강연은 돈 안 돼, 빚 때문에 간첩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에요”

  • 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입력2008-10-08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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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점보기 실태 취재하다 취재원으로 소개받아
    • 짙은 화장에 몸에 달라붙는 옷 즐기고 애교 넘치는 말투
    • “북조선 점쟁이가 ‘남쪽에 가면 돈 벌고 이름 날리게 될 것’이라고…”
    • “서방 복 없어 팔자 사나워진 년”
    • 임신시키고 달아난 한국 사업가 찾아 남한행, 알고 보니 유부남
    • “재혼요? 남자는 다 똑같아요. 탈북한 여자라고 쉽게 생각해요”
    • 북한 웰빙식품 중국에서 들여와 팔다 사기당해 큰 빚
    • 일본 법무성 공안조사팀, “원정화 일본 행적, 간첩행위 아니다”
    • 탈북 지식인들 “간첩행위 했는지 몰라도 진짜 간첩은 아니다”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위장탈북 간첩’ 원정화(34)를 강남역 근처 지하 커피숍에서 만난 건 2007년 2월 초순. 당시 기자는 탈북 역술인 취재를 하고 있었다. 원정화는 취재원 중 한 명이었다. 2007년 3월호 ‘신동아’에 게재된 ‘탈북 역술인이 들려주는 북한의 점보기 실태’라는 기사와 관련해서였다.

    기사의 주 내용은 평양에서 당 간부들에게 점을 봐줬다는 탈북자 장모씨 인터뷰였다. 원정화가 북한 점쟁이에 대해 기자에게 들려준 얘기는 기사 앞부분에 짧게 언급됐을 뿐이다. 대부분의 탈북자 기사가 그렇듯 신변 안전을 고려해 그의 이름은 ‘김정희’라는 가명으로 처리했다.

    원정화를 기자에게 소개한 사람은 탈북자의 자립 정착을 도울 목적으로 설립된 특수법인 북한이탈주민후원회에서 일하는 김모(47) 상담팀장. 역시 탈북자인 김 팀장은 북한 출신 역술인을 찾는 기자에게 “몇 달 전 (후원회에) 찾아와 상담했던 여자가 있는데, 북한에서 교화소(교도소) 직원이었다”라면서 “교도관이었으니 점 봐주다가 잡혀온 점쟁이를 많이 만나봤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북한의 점보기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원정화는 기자에게 자신의 전직을 ‘교도관’이라고 소개했다.

    “(저는) 교도소 간수여서 점쟁이를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북한에선 점을 봐주다 들키면 잡혀오거든요.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반국가적인 미신행위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중앙당이나 인민보안성 차원에선 점을 볼 수 있어요. 중앙당 서기실에 ‘특별서기’라는 직제가 있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의 신수를 봐주는 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인민보안성에서도 ‘예심국’이라는 부서에선 신점으로 범죄를 식별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점을 보는 건 허용하지 않아요. 제가 교도관이었을 때 북한 당국은 미신과의 투쟁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펼치고 있었습니다.” (신동아 2007년 3월호 기사 중에서)



    빨간 재킷에 검은 가죽바지

    기자가 만난 원정화는 160cm가 안 되는 작은 키에 깡마른 몸매였다. 상의는 빨간색 재킷을, 하의는 검은색 가죽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긴 생머리를 뒤로 묶은 단정한 스타일이었으며 짙은 화장에 검은 마스카라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북한 교화소 생활을 털어놓던 그는 인터뷰 도중에 대뜸 이렇게 얘기했다.

    “제가 근무하던 감옥에는 용하다는 점쟁이가 많이 잡혀왔어요. 그중 한 점쟁이가 제 과거를 잘 맞히기에 정말 용하다 싶었어요. 하루는 그 점쟁이가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몇 년 후 남쪽으로 가게 된다. 남쪽 가서 이름을 날릴 것이다’라고. 전 그 점쟁이 말대로 몇 년 후 중국으로 탈북했고 남한까지 오게 됐어요.”

    기자는 2007년 초여름까지 원정화를 세번 만났다. 첫 번째는 취재원으로였고, 두 번째는 일자리를 찾고 있는 또래 여성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세 번째는 그가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특이했던 건 처음 만날 때만 휴대전화로 만날 장소와 위치를 확인했을 뿐, 나머지 두 번은 따로 연락을 하지 않고 미리 얘기된 약속 날짜와 장소에서 만난 것이다. 모두 강남역 근처 식당이거나 카페였다.

    그는 유독 강남역 근처를 좋아했다. 그는 “강남이 움직이기 편하다”라면서 “산본에서 딸과 둘이 살고 있다”고 자신의 거처를 알려줬다. 그와의 대화에서 아직까지 뚜렷하게 기억하는 건 “열심히 돈 벌어서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싶다”는 걸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돈 욕심 많아 보이는 30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살다가 자본주의 나라로 와서는 돈의 위력을 절실히 느꼈나 보다 싶었다. 기자는 원정화란 여자에게서 특별한 낌새를 채지는 못했다. 더욱이 간첩이라고는….

    그로부터 1년6개월이 흐른 지난 8월,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위장 탈북자 이중간첩 원정화’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기자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가 간첩이었다니. 순간 배신감보다는 몇 가지 의혹이 뇌리를 스쳤다.

    원정화가 정말 간첩일까. 만약 그가 간첩이라면 그토록 어설프게 행동했던 건 다 연기였단 말인가. 그가 자신을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닌가. 혹시 간첩이고자 하는 건 아닐까.

    과자, 사탕 훔치다 교화소 복역

    8월27일 수사당국이 발표한 원정화의 혐의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원정화는 특수부대 훈련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북한 보위부로부터 남한 침투 명령을 받고 조선족으로 위장해 국내로 잠입, 이후 한국의 경찰관과 결혼한 뒤 같은 해 11월 국정원에 탈북자로 위장 자수했다. 그는 정착지원금을 받은 후 자신의 거주지인 수원 인근 군부대에서 안보교육활동을 하면서 군 장교들을 접촉해 탈북자 명단과 군부대 시설을 촬영한 사진, 군사지도, 무기정보, 군 관련 서류 등을 입수해 중국에 있는 북한 보위국 간부에게 전달했다. 또한 장교들을 성로비로 포섭해 이들로부터 입수한 군사기밀을 e메일을 통해 북한에 빼돌렸다. 또한 중국에서 탈북자 100여 명과 한국인 사업가 7명을 납치했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거주지를 파악하거나 정보기관 요원 두 명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원정화의 혐의내용을 적은 공소장에는 그의 출신성분과 범죄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74년 함경북도 청진시 부령구역 고무산2동에서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원정화의 생부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으로 원정화가 태어나던 해에 남한 침투 도중 피살되었다. 남편이 죽고 2년 후, 어머니 최모(60)씨는 김모(63·구속)씨와 재혼해 남매 둘을 더 낳았다.

    원정화는 돌격대와 특수부대에서 제대한 후 백화점에 취직했는데, 과자와 사탕 등을 훔치다 적발돼 1993년 6월부터 2년간 교화소에서 복역하다 김정일 특사로 풀려났다. 이어 청진에서 장사를 하다 1996년 12월쯤 친구와 함께 아연을 훔치다 단속반에 체포됐고, 친척의 도움으로 석방된 뒤 중국으로 도피해 2년 동안 친척집 등지를 전전했다. 이 과정에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지만 성격 차이로 결별했고 아이도 낙태했다.

    이후 원정화는 중국에서 가짜 달러를 판매, 외화벌이 업무를 했다. 100달러 한 장에 중국돈 200위안(약 3만원)씩 받았다. 외화벌이를 위해 북한에 있는 가족과 연결됐다. 중국에 파견근무 중인 여동생이 하얼빈에 전달하기 위한 가짜 달러를 보위부 직원한테 받는 길에 동행하기도 했다.

    2001년 9월 북한의 보위부로부터 “(남한에 가서) 미군 기지를 카메라로 찍어오고 남조선신문에 실리는 조국에 대한 사설을 모아 가져오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고, 조선족 여성으로 위장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당시 중국에서 동거한 한국인 사업가 조모씨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보위부 요원들은 “한국에 가서 교도관 생활을 했고 아이의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라”고 주의시키면서 자살용 독약 6알과 공작금 1만달러 등을 건넸다.’

    점쟁이, “남쪽 가면 재운(財運) 터진다”

    기자는 지난해 원정화와 만나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사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사연이나 푸념이 많았기 때문. 그는 북한에서 절도 혐의로 교도소(교화소)에 두 차례 수감되었던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을 ‘전직 교도관’이라고 거짓 소개했지만 여자로서 살아온 이야기는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내가) 서방 복이 지지리도 없어서 팔자가 사나워진 년”이라고 한탄했다. 그가 털어놓은 사연은 여자들이 삼삼오오 앉아 수다로 풀어놓을 법한 평범한 팔자타령이었다.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8월27일 수원지검에서 공개한 원정화 간첩행위 증거물들.

    ▼ 교도관 하면서 점쟁이한테 “탈북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그렇게 물으면 큰일 나죠. 그냥 내가 ‘죽을 운이냐 살 운이냐’ ‘이동수(移動數)가 있냐’ 뭐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점쟁이는 저에게 ‘(이동수가) 있다’면서 ‘살 운’이라고 했어요. ‘남쪽에 가면 재운이 터져 돈을 벌고 행복해진다’라고 했어요. 북한 주민들은 음력으로 9일과 29일을 길일로 믿거든요. 제게 ‘운 좋은 해와 달’을 말해주었는데, 잘 기억해뒀어요.”

    ▼ 교도관 생활은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저만큼 기구한 인생도 없을 거예요. 제가 살던 곳은 함경도 청진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시집을 두 번 갔어요. 우리 어머니도 저처럼 임신한 채로 버림받았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소 좋아했던 어떤 분과 재혼을 했습니다. 제 밑의 동생 둘은 새아버지의 자식이지요. 제가 공부에 뜻이 있었다면 대학에 들어가 출세를 했을 텐데, 전 공부를 싫어했습니다. 또 어머니 모르게 새아버지가 저를 자꾸 괴롭혔어요. 아버지가 제 입을 막으려고 교화소에 일하게 했어요. 북한의 교도소로는 정치범수용소와 교화소, 노동교양소가 있습니다. 교화소는 1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이 수감되는 곳인데, 제가 있던 19호 관리소는 수용자가 5000명가량 있었어요. 거기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어요. 수용자 직업도 다양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거기서 북한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 탈북은 언제 하셨어요?

    “10년 전 중국으로 먼저 했어요.”

    ▼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온 건가요?

    “남자만 아니었다면 올 일이 없었어요. 중국에서 남한 사업가를 알게 되었어요. 저한테 잘해주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어요. 제가 임신을 하자 기뻐하면서 한국에 갔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에 가서 결혼준비도 해야 하고 집도 얻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간 후 소식이 없는 거예요. 전 눈물로 밤을 지새웠어요. 그러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한국에 들어가서 찾아봐야겠다고. 조선족으로 위장해 일단 한국에 들어왔어요. 아기를 낳더라도 한국에 가서 남편 옆에서 낳고 싶었거든요. 들어와 보니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어요. 절 버리고 도망간 거였어요.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할 상황이었지요. 그 직후 탈북자로 자수했어요.”

    ▼ 지금 혼자 살고 있나요?

    “지금은 혼자예요. 여기 와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고개를 저으면서) 남자는 다 똑같아요. 여자를 노리개로 생각해요. 이용해 먹으려고 하고요.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탈북한 여자라고 저를 쉽게 생각해요.”

    “군인이나 경찰이 좋아요”

    ▼ 재혼을 생각해보진 않았나요?

    “저보다 먼저 탈북한 아는 여자 분이 결혼정보회사 직원으로 있어요. 그 여자를 통해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자를 몇 명 소개받고 있어요. 한국에선 ‘공무원이 안정적이다’라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큰 사업을 해야 돈이 되지, 공무원들 중에도 거지가 많은 것 같아요.”

    ▼ 어떤 남자가 이상형이에요? 재혼을 하셔야죠.

    “전 군인이나 경찰이 좋아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교화소에 있어서 그런지 얘기가 잘 통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너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라서 싫어요. 군인들이 정에 약하고 여자 위할 줄 알고 기분도 낼 줄 알고 멋지잖아요. 이젠 실패하면 안 되는데….”

    ▼ 지금 뭘 해서 먹고 살아요?

    “무역업을 해요. 북한 물건을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가져와 파는 겁니다. 수산업 쪽이에요. 저를 임신시킨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마음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요즘 저는 너무 힘들어요. 한국까지 와서 버림받자 앞이 캄캄했어요. 딸까지 책임져야 하는데,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중국에 사는 친척들 중에는 북한에 있는 아버지와 연결돼 무역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미워도 가족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저도 그 일에 연결됐어요. 남한에선 웰빙식품을 비싼 값에 먹는데 북한에는 웰빙식품이 천지에 깔려 있어요. 북한에서 잡히는 수산물을 중국을 통해 받는 거죠. 무역업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떤 여자한테 속아 큰 빚을 지게 되었어요. ‘물건을 팔아준다’기에 믿고 넘겼는데, 돈을 한 푼도 못 받았어요.”

    ▼ 작년(2006년 10월) 가을 북한이탈주민후원회를 찾아가 개인회생의 방법과 직장에 대해 문의했다고 들었어요.

    “그랬어요. 중국에선 돈 안 보내준다고 노발대발하고 있는데, 전 길이 없었어요. 당장 딸하고 먹고살 일이 캄캄했어요. 물건 판 돈을 안 보내주니 친척들도 빚을 졌지요. 한번 신용을 잃으니 더는 물건을 보내주지 않더라고요. 돈 좀 있고 잘사는 남자와 결혼해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죽을 지경이에요.”

    ▼ 부대에 강연하러 다닌다면서요?

    “아휴, 그건 돈이 안 돼요. 한 번 가면 10만원, 20만원 줍니다. 차비밖에 안 되고 딸 탁아비용도 안 나와요. 먹고사는 게 문제예요. 경찰가족이라고 했나요? 여기 남한의 경찰은 북한에 대해 너무 몰라요. 너무 잘못 알고 있더라고요. 제가 잘 아는 보안과 직원들에게 북한에 대해 얘기해주면 다들 정말인가 싶어서 눈이 둥그레져요. 남한 경찰의 북한정보가 너무 약하던데, 경찰서에서 강연할 수 있도록 선을 대주실래요? 전 돈 때문이라도 뭐든지 해야 해요. 간첩질이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북한에도 상식 있다”

    원정화에 대한 기자의 정확한 기억은 여기까지다. 세 차례 만났지만, 하소연 내용이 지극히 사적인 얘기로 비슷비슷했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배신당한 것에 대해 한이 맺힌 그는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작고 깡말라서 다부져 보이긴 해도 수사기관 발표와 달리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다. 옷 입는 스타일로 봐서 눈에 띄는 원색을 좋아하는 듯했다. 만날 때마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나왔다. 상의와 하의 다 그랬다. 언뜻 매우 깔끔하고 도도해 보이는 30대 여성이었다.

    당시 국내에선 맨얼굴 같은 생얼 화장법이 유행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싶었다. 꼭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볼 터치까지 곁들이는 등 완벽한 화장법을 선보였다.

    음성은 가는 허스키였지만 빠른 말투 때문인지 카랑카랑하게 들렸고, 목소리 덕에 매몰차고 당차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마음씨 고운 여자였다.

    기자에게는 교도소에서 배웠다는 체질분석법을 일러주면서 “토끼고기를 먹으면 임신이 잘될 거다”라고 귀띔하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이제와 얘기지만, “빚 때문에 간첩질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던 그의 푸념이 자꾸 뇌리를 스친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던 걸까.

    원정화가 구속된 후 그의 간첩 활동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북한 내 경력과 행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대남공작시스템에 비춰볼 때 경력이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북한에서 금성정치군사대학과 군 무력부 정찰국 등 고위부서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몇몇 지식층 탈북자를 수소문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원정화의 경력에 대해 “분명한 날조”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반박은 조목조목 논리적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이하 김대)을 졸업한 후 철학교수를 지냈다는 현모씨의 얘기다.

    “북한에도 상식이 있어요. (원정화의) 친아버지는 남한 침투 도중 피살되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대남침투 요원이 임무수행 도중 피살되면 그의 가족을 ‘혁명가 가족(출신성분 규정에서 최상위인 ‘11과 대상’)’으로 규정합니다. 남편이 혁명사업을 했으면 국가가 살도록 돌봐줍니다. 주택에서 직장, 자녀대학까지 다 보장해줘요. 재혼을 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1970년대는 북한이 대남공작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기라 대남공작을 하다가 남편이 죽으면 그 뜻을 기린다고 아내가 재가하는 것조차 수치로 여겼습니다. 자녀가 아들인 경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딸인 경우 강반석유자녀학원에 입학시켜 국가에서 키워줘요. 그 시절 대남공작원 미망인들은 자식이 잘되는 걸 낙으로 여기면서 여생을 독수공방했습니다. 그런데 원정화의 경력을 보면 강반석유자녀학원을 다닌 적도 없지 않습니까.”

    “돈벌이 목적 자발성 간첩”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군 무력부 정찰국에 잠시 근무하다가 탈북한 뒤 현재 일본의 D대학 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오모(47)씨는 원정화의 경력이 날조라는 걸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간첩 원정화가 대남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진술도 믿기 어렵습니다. 1989년 6월, 청진시 남향고등중학교로 전학해 5학년을 다니다가 본격적인 공작원의 길로 들어섰다고 진술했지 않습니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 의해 발탁돼 공작원 양성학교인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사로청은 북한 전역에서 9명(남 5명, 여 4명)만 선발했어요. (원정화는) ‘출신성분과 학업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고 밝혔지만 큰 오류가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에서 직접 대상을 선발하고 추천해 특수교육을 시키는 북한 최고의 정보엘리트대학입니다. 사로청과 같은 사회단체에서 추천을 받아 학생을 입학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대상자 선발, 신원조회, 인물심사 등 모든 입학과정은 중앙당에서 직접 실시하며 입학 사실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집니다.”

    오 교수는 흥분한 채 말을 이어갔다.

    “(원정화가 받았다는) 특수훈련 내용도 실제와 맞지 않아요. 그의 진술에 따르면 특수훈련 내용이 독침 뿌리기, 표창 던지기, 오각별 던지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군 특수부대에서는 표창이나 오각별과 같은 호신용 무기를 쓰지 않아요. 따라서 이러한 훈련을 시키지도 받지도 않는 겁니다. 또 ‘특수훈련 기간에 남한말씨를 배웠다’는 원정화의 진술도 사실과 다른 것 같아요. 어려서 남한말씨까지 교육을 받았다는 간첩 원정화가 하나원에서 사투리가 교정 안 돼 지적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원 동기생들은 그가 남한말을 배우는 데 매우 힘들어했고 전형적인 함경북도 사투리를 썼다고 증언하더군요.”

    “정신분열증 말 많은 여자”

    원정화의 경력에 대한 의혹은 이뿐 아니다. 북한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국가안전보위부 직원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했다는 안모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국가보위부는 북한 최고의 반탐(방첩)기관입니다. 그런 보위부가 원정화에게 ‘남측의 중요 대북 정보요원인 김모, 이모씨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것도 북한 국가보위부의 사명에 비추어볼 때 타당성이 적어요. 원정화는 절도범으로 교화소에 수감돼 있던 여자였어요. 상식적으로 고등학교 중퇴인 여자에게 ‘남한 가서 공작활동 하라’고 했겠습니까. 한국 내에서 대북정보요원을 암살하는 매우 중요한 작전을 이런 서푼짜리 간첩에게 맡길 리가 없어요.

    감옥에 있는 사람은 당직자가 보증을 서야 풀려날 수 있는데,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절도범으로 두 번이나 들어간 여자를 도 보위부에서 누가 보증했을까요. 혹여 모르지요. 아버지가 진짜 간첩이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겠죠. 아버지가 정말 보위부 사람이었다면 딸을 보증해 꺼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원정화의 학력과 범죄 경력을 봤을 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겼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국가보위부의 주된 업무는 국내 반탐과 해외 반탐입니다. 간첩의 대남직파 같은 직접적인 대남공작활동은 중앙당 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의 영역이거든요. 원정화가 아버지 영향으로 보위부의 끄나풀 노릇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평소 빚에 쫓겼고 돈만 벌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여자라고 들었습니다. ‘군 동향이나 사진을 CD에 담아 전달했다’고 진술했는데, 우스워요. 북한 보위부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렇지, 공작원의 정보를 e메일로 받거나 CD로 전달받을 만큼 어설프지 않습니다. 모르긴 해도 원정화는 북한 보위부 직원에게 정보를 전달하면 돈이라도 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자발성 간첩’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진짜 간첩인 아버지가 딸에게 간첩질을 시켰던가요.”

    탈북 지식인 다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입학’이라는 원정화의 경력에 기막혀 했다.

    “(원정화가) 15세에 김정일의 신임을 받는 전투요원만 다니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3년 뒤 수료했다고 진술했더군요. 또 18세에 정찰국 특수부대에 들어가 훈련 중 부상을 당해 감정제대(의병제대)한 뒤 고향의 공장 노동자로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됩니다. 북한에서 그런 경력을 거쳤다면 당연히 노동당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원정화는 입당 심의조차 받은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 경력이면 노동자가 아니라 최소한 군당이나 군 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북한 도·시·군 당위원회에는 전역한 장교를 적절한 위치에서 간부로 일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전담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화점에 근무했고, 사탕을 훔쳐요? 말도 안 됩니다.” (평양에서 고등중학교 교사생활을 했다는 이모씨)

    그들의 ‘이유 있는’ 지적은 끝이 없었다.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시절 최우등 표창을 자주 받았고, 1988년 함북 부령군에 있는 고등중학교 4학년 때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주는 ‘이중영예 붉은 기 휘장’을 받았다고 했어요. 너무도 치졸한 거짓말입니다. 고등중학교 4학년이면 16세입니다. 그런데 앞의 진술에선 이미 ‘15세에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선발돼 입학했다’고 했습니다. 나이 계산이 조금 틀린다 치더라도 그가 공부를 잘해 받았다는 ‘이중영예 붉은 기 휘장’은 개인에게 주는 표창이 아닙니다. 우수한 학급과 학교 전체에 주는 집체표창입니다. 학급 학생 모두가 이 휘장을 달게 돼요. 또 ‘이중영예 붉은 기 휘장’이란 건 없고 ‘영예 붉은 기 휘장’을 두 개 다는 겁니다.”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원정화의 여권.

    하나원에서 원정화를 겪은 동기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원정화의 하나원 동기라는 탈북자 박모씨는 “(원정화가) 간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원에서는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던 말 많은 여자였다”라고 전했다. 박씨는 2002년 입국해 하나원을 20기로 수료했다.

    “글쎄요. 원정화가 간첩이었다고요? 아무리 북한에서 철저하게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수준에 걸맞은 인격이나 의식수준을 보여줬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원에 있을 때 교육생들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자주 싸워 물의를 빚었어요. 늘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녀가 왜 그렇게 싸웠는지…”

    최근 간첩혐의로 구속 기소된 원정화의 아버지 김동순으로부터 평소 원정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는 탈북자 이모씨는 “원정화가 간첩이었다는데, 정말 의심스럽다”면서 “보도에 따르면 의붓아버지 김동순한테 공작금도 풍부하게 받았다는데, 왜 그토록 돈에 시달렸는지 모르겠다”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계부 김동순이 몇 년 전 한국에 나와서 손녀(원정화의 딸)를 돌봐준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아는 탈북자 한 분이 김동순과 절친합니다. 그런데 (김동순이) 딸이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리더라는 겁니다. 한국까지 와서 사기당해서 망했다고요. (김동순은) ‘간나이 새끼가 한국에서 팔아먹고 살겠다고 해서 북한 농수산물을 내려 보내줬더니, 어느 허접한 년한테 사기를 당해 나까지 빚지게 했다’면서 노발대발했대요. 또 딸이 돈을 안 갚는다고 만날 때마다 딸을 욕했대요. 전화로 딸과 돈 문제로 싸우는 걸 여러 차례 봤답니다. 수사기관 발표대로 원정화가 아버지한테 공작금을 넉넉히 받았다면, 부녀가 왜 그렇게 싸웠는지 의문입니다. 같은 탈북자 앞에서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김동순은 북한에서 지령을 받고 원정화에게 자금지원 등을 한 혐의(국가보안법상 편의제공)로 구속 기소됐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김동순은 2003년 12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중국에서 10억원 상당의 냉동문어, 고사리, 그림 등 9억6000만원어치 공작 물품을 딸에게 제공하고, 2005년 1월 중국산 상황버섯 원산지를 북한으로 허위증명해주는 대가로 북한 보위부 공작원에게 4800달러를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최근 2년간 원정화에게 매달 50만~300만원의 생활비를 보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동순은 1945년 인천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월북했으며 평양미술대학 조각과를 나와 1975년 6월 왕재산대기념비(일명 빨치산 공적비)와 혁명박물관 건설 공사 등으로 공적을 쌓아 국기훈장(2급)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선 클럽에 나가

    합동수사본부 발표에 따르면 원정화는 구속되기 직전까지 한국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에 자주 드나들며 조총련과 접촉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법무성 공안조사부 직원이 탈북자인 일본의 D대학 오 교수에게 전한 수사결과는 이와 다르다. 오 교수의 말이다.

    “법무성 공안조사청에 근무하는 제자가 있어요. 제가 원정화 사건에 대해 물어보자 ‘그렇지 않아도 원정화 사건을 조사하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조사 결과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9월 초순에 말해주더군요. 일본은 최근 출입국 제도가 바뀌어 입국자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고 지문을 찍습니다. 공안조사국에서 원정화 사건이 터지자 사진을 찾아 조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생각 밖의 얘기를 하더군요.

    일본 센다이시에는 일본인과 결혼해 사는 탈북 여성이 100명이 넘습니다. 원정화가 올 봄 센다이시에 와서 일본 남자 7명과 선을 봤다고 해요. 밤에는 클럽에 나가 일을 했답니다. 일본의 클럽은 2차까지 가는 곳이거든요. 일을 아주 잘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는군요. (원정화는) 딱 2개월을 채우고 한국에 돌아간 걸로 확인되었답니다. 무비자 방문이었기 때문에 3개월밖에 있을 수 없었지요. 3개월을 다 채우면 다음번 입국이 거부되므로 2개월 만에 출국한 거죠. (일본 공안 조사부에선) ‘원정화가 조총련을 만나거나 간첩행위를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간첩이라면 몸 함부로 놀리지 않아”

    탈북 지식인들은 “원정화의 행동은 분명한 간첩활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보위부에서 임무를 받아 치밀하게 움직인 간첩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보위부가 돈에 시달리는 탈북자를 접선해 ‘탈북 망명자 연락처를 찾아보라’고 꼬드깁니다. (원정화가) 정부가 발표한 대로 ‘가급 보호자’였다면, 국정원에서 모를 리 없어요. 탈북자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심사를 받는 곳이 통합심사소예요. 대성공사라고 하지요.

    거짓말탐지기가 돌아가는 밀실에서 북한에서의 학력, 경력에 대해 질문 받습니다. (국정원에선) 탈북자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요. (탈북자가) ‘함흥에서 무슨 고등중학교 선생으로 근무했다’라고 하면 이를 반드시 확인합니다. 정말 함흥에서 고등중학교 선생 한 명이 사라진 사실이 있는지를 몇 시간 만에 알아내는 거예요. 우리나라 국정원이 얼마나 정확한데요. 오죽하면 심사를 받은 탈북자들이 ‘북한에도 한국에서 북파한 간첩이 있나 보다’라고 했겠어요.

    (심사소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원정화의 하나원 20기 동기들은 그를 지식인이라고 기억하지 않아요. 간첩활동을 위해 입을 닫았다고 해도 배움의 정도는 표가 나는 법입니다. 군부대 강연은 지식층이 아니라도 가능해요. 학력, 경력과 관계없이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어지간하면 다닐 수 있거든요.

    강연 내용은 뻔합니다.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군부대에 도착하면 부대정문에서 정훈장교를 만나 강연장까지 곧장 가게 됩니다. 강연장 대기실에서 잠깐 커피를 마시며 한숨 돌릴 뿐이지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을 시간이 없어요. 사진기를 들고 들어갈 수도 없고요. (탈북자들은) 강연을 하기 위해 북한 관련 비디오와 CD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100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관계는 절대 말라”

    원정화가 간첩행위를 한 건 맞아요. 하지만 제대로 된 간첩이라면 몸을 그렇게 함부로 놀리지 않았을 겁니다. 평소 그는 결혼을 못해 안달 난 여자처럼 행동했다고 들었습니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돈 많은 사람과 재혼하려고 발버둥을 쳤다는 거죠. 진짜 첩보원이라면 돈에 궁하지 않고 몸도 정갈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특히 그의 상대는 혼자 지내는 장교들이었어요. 군부대 마당발을 통해 여자에 약할 수밖에 없는 젊은 장교에게 꼬리친 겁니다. 젊은 장교들, 할머니가 지나가도 쳐다본다고 하잖아요. 위관급 장교가 군 기밀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북한에선 위관급 장교가 국가기밀의 10분의 1도 모릅니다. 수사기관 발표로는 원정화가 남한 측 정보요원들에게 북한 정보를 넘겨주는 ‘이중간첩’ 노릇을 했다는데, 대간첩이라면 지조가 있어야죠. 북한에서 남파된 똑똑한 대간첩은 절대로 그런 일 안 할 겁니다.

    원정화가 간첩행위를 한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똑똑하고 대단한 간첩은 아닌 것 같아요. 앞뒤 안 맞는 경력 진술에 해답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큰 간첩 행세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얼쭉이(모자라고 어설픈)인 게 분명합니다.”

    원정화가 여러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것과 관련해 북한의 전직 교수 현모씨는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국가보위부에서 여자 공작원을 교육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게 있어요. 바로 성관계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마음 주고 뭐 주고 다 주더라도 몸은 주면 안 된다고. 몸을 주면 마음이 약해지고 정이 생겨 임무수행에 차질을 빚게 된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원정화의 복잡한 성관계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정말 북에서 지령을 받고 남파된 공작원이라면 그럴 수가 없죠.”

    탈북 지식인들의 견해는 거의 일치한다. 원정화가 (먹고살기 위해 정보를 팔고 사는) ‘간첩행위’를 했는지는 몰라도 진짜 간첩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원정화는 9월10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간첩혐의를 순순히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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