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적으로는 1950년대에 음악적 신동들이 세계 연주 무대에 데뷔한 데 이어, 60년대에는 한국 출신의 창작예술가들도 비로소 세계에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문학에서는 리처드 김(김은국)의 영문 소설 ‘순교자’가 미국과 유럽의 독서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다른 한편에선 그에 훨씬 앞서 미술과 음악세계를 크로스오버하는 아방가르드 백남준의 도발적인 행위예술이 미국과 유럽, 대서양 양안을 오가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응로(李應魯·1904~1989)와 윤이상(尹伊桑·1917~1995)은 이러한 1960년대에 저마다 안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의 예술가로 유럽에서 대성한 선구자들이다. 불행히도 이들이 유럽에서 한 활동은 1960년대 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사건’으로 갑자기 중단되고 만다. 물론 두 사람은 그 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풀려나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돌아가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어떤 면에서 이 ‘사건’은 예술의 문밖에 있는 일반인에게까지 두 예술가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두 예술가의 존재를 지나치게 ‘정치화’하고, 더러는 ‘신화화’하는 경향까지 낳은 듯도 싶다. 나는 두 예술가가 정치적 사건에 말려들기 이전에 순전(純全)한 예술가로서 만났고, 그들의 존재와 유럽에서의 활약상을 1960년대 초부터 신문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국내에 알려왔던 사람이다.
나는 두 사람 모두 좋은 정치가가 아니라 좋은 예술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거나 관여했다면 그것은 매우 서툰 풋내기의 그것이었다고 본다. 아래 글은 1960년대 그 ‘사건’이 터지기 이전에 정치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두 예술가의 일상적인 모습을 내 사사로운 추억을 더듬어 증언해보고자 한 것이다.
▼ ‘서예 화가’ 이응로
1961년 가을 고암(顧菴) 이응로 화백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당시 나는 서독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적어둔 내 글에는 고암과 해후한 배경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군무도
과연 파리에 내가 갑자기 내던져진 첫날은 축제일의 미아(迷兒)처럼 고독과 초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묘망(渺茫)한 대도시 파리는 도대체 ‘일별(一瞥)의 대상’은 아니다. 파리는 그를 보려는 사람을 집어삼키고 만다. 이 끝없는 파리의 하늘밑에서 뜻밖에 이응로 화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었다.”(한국일보, 1961년 11월5일자)
나는 그때 지하철을 타기 위해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하던 참이었다. 그때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중늙은이가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를 보더니 “혹시 한국 분이 아니셔?”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예” 하는 대답에 무척이나 안심이 된 듯 중늙은이는 “아이 반갑구려, 나 이응로란 사람이오” 하고 자기소개부터 해왔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응로 선생님을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어허, 나를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