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여군, 남자 무용수, 수학교사…엘리트 탈북자를 ‘통일 열쇠’로 쓰자

‘北 전문직’ 탈북자 좌담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4-07-22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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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2만 명 시대. 늘어난 수만큼 탈북자의 면면도 다양하다.
    • 6월 말 탈북자 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2008~2011년에 탈북한 이들은 북한에서 전문직에 종사했던 엘리트들이다.
    • 북한에서의 삶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에 대해 물었다.
    ■ 참석자

    김영진 : 1970년생. 함경북도 청진 출신. 청진 제2사범대학 수학학부 졸업. 수학교사 근무. 2009년 입국, 현재 한겨레고등학교 수학교사 휴직 중

    이소연 : 1975년생. 함경북도 회령 출신. 황해도 4군단 통신결속소 상사 제대, 2006년 탈북, 현재 안보강사 활동 중

    한정민 : 1975년생. 평안남도 안주 출신. 조선인민군협주단 무용수 출신. 2011년 탈북. 현재 경기도 소재 에어컨 설치회사 근무

    * 일부 참가자들의 이름은 가명이다.





    기자 세 분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자 자기소개 해주세요.

    이소연 저는 북한 4군단 사령부에 있었고 10년간 복무했어요. 제대 후 3년 간 고향에서 사회생활 하다가 2008년 남한에 왔습니다. 한국에서 결혼해 작년에 딸을 낳았고, 지금 사이버대 재학 중이며 방송활동, 단체활동 하며 안보강사로 일하고 있어요.

    기자 주로 어디서, 어떤 주제로 강의하시나요?

    이소연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 대상으로 할 때도 있고, 시민단체의초청으로 강의할 때도 있고요.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애국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거죠.

    기자 주로 어떤 얘기를 하세요?

    이소연 남학생들한테는 특히 북한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해줘요. 이렇게 비쩍 마른 사람이 북에서 여군이었다고 하면 재밌어하죠.

    김영진 저는 북한에서 수학교사를 했어요. 2009년 한국에 와 탈북학생들 다니는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다 경기 안성에 있는 한겨레고등학교 교사로 있어요. 현재 휴직 중입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남북한 수학교육 차이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한정민 저는 오기 전까지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근무했고요. 한국무용을 했습니다. 내년에 국민대 대학원 무용과에 진학하려 준비 중인데, 지금은 ‘알바’하고 있어요. 에어컨 설치하는….

    김영진 북한에도 여러 예술단이 있지만, 남자무용수는 별로 없는데. 특히 협주단에서 무용을 했다는 건 정말 특이한 경우 아니에요?

    이소연 그러니까. 아깝다. 왜 계속 그런 활동 안 해요? 예술단 가면 좋을 텐데.

    한정민 저도 그런 활동 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음을 접었죠.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은하수예술단이라고 탈북예술단이 있었는데 안 좋은 일로 해체됐어요. 저도 하고프죠. 하지만 저 혼자는 못하고 한두 명이라도 전문적인 분이 있어야 어떻게든 할 텐데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 취미로 하는 분 같더라고요. 솔직히 북한 예술단이라는 게 뻔하고 배우가 제한돼 있는데다 대부분 모여 살아서 다 알거든요. 근데 여기서 ‘나 북한에서 예술단 했다’는 분들 대부분 본 기억이 없어요. 만수대, 평양예술단에서 왔다고 하는데 정말 본 기억이 없어요.

    기자 그분들 경력이 거짓이라는 건가요?

    한정민 (웃음) 아마 북한 분 중에 경력을 속이는 분이 있나봐요. 이왕 같은 무용이라도 우리(남한)랑 북한이랑 차이가 있을 테니 문화교류 측면에서 한국무용을 더 연구하려 대학원 가려고 했는데 학력 인정 과정이 복잡하더라고요. 대학에서 어떤 교수한테 강의 들었는지, 매 학년 강의 내용을 다 적어 내라고 하고 통일부 장관이랑 교육부 장관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걸 몰라서 지원 기간을 놓쳐버렸어요. 내년에 가야지요.

    여군, 남자 무용수, 수학교사…엘리트 탈북자를 ‘통일 열쇠’로 쓰자

    6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회의실에서 북한 전문직 탈북자 3인 좌담회가 열렸다. 한정민 씨, 이소연 씨, 김유림 기자, 김영진 씨(왼쪽부터). 한씨와 김씨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학업 막는 ‘만 35세’라는 벽

    김영진 북한에서 4년제 대학 교육 받았다는 걸 인정받으려면 그 대학이 어디 있는지, 건물 구조며 과목이며 매 학년 코스를 다 적어내야 해요.

    기자 세 분 다 한국에 오신 후 다시 공부하고 싶었죠?

    이소연 저는 1975년생이에요. 2008년 8월 남한에 왔으니 넉 달 후면 만 35세가 되는데, 정부에서 탈북자 대학 입학 및 학비 지원은 만 35세까지예요. 9월에 “나 대학 가고 싶어요” 했더니 이미 늦었다는 거예요. 너무 안타깝더라고. 하나원에서 이런 내용을 알려주거나 멘토가 있었으면 9월 가을학기에 맞춰서 빨리 입학원서 내고 했을 텐데….

    김영진 저는 남한 왔을 때 만 39세였어요. 하나원에서 “어차피 주간대는 못 간다. 35세가 커트라인이다. 사이버대나 다녀라”고 했어요. 사이버대가 뭔지 몰랐거든요. 그냥 서울대, 연세대처럼 이름이 사이버인 줄 알았죠.

    나는 그때까지 선생님 아닌 직업은 해본 적도 없지만 하나원에서 나온 다음에 정말 갖은 고생을 했어요. 자동차 부품 조립하는 것부터 온갖 허드렛일은 다…. 그런 아르바이트도 인터넷 할 줄 모르니 알음알음 수소문해서 찾아갔죠. 쉬운 길도 뺑 돌아갔어요. 제가 하나원 있을 때 탈북자 150명 중 대학 나온 사람 딱 두 명이었어요. 고학력자는 특성에 맞게 교육하거나 삶의 방향을 알려주면 좋은데 아쉽죠.

    이소연 탈북자 중에도 고학력이고 자기 특성 살리고 싶은 사람 있는데 무조건 무시하는 거예요. 제가 하나원에서 뭘 배웠냐면, 한복 만드는 사람 와서 “여기 취직해라” 하고, 미싱 하는 사람 와서 “미싱 해라” 하고…. 탈북자 정착 사례 발표하는데 한 아줌마는 자기 한국남자랑 연애하는 얘기하고, 한 아줌마는 교회 다니라는 소리만 하고…. 그때 느낀 게, 우리는 여기서 그냥 최하층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한복 만드는 데서 한 달에 120만 원 준다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탈북자들은 혹하는데, 사실 한국에서 살려면 120만 원으로 턱도 없잖아요.

    김영진 하나원 생활이 우리한테 도움은 되지만 개인의 성향과 특성에 맞는 세부 교육과정이 있으면 좋겠어요.

    한정민 저도 만 36세에 와서 학업 지원 못 받았어요. 나 하나 때문에 법을 바꿀 수 없다지만, 그때 제가 통일부 직원한테 들은 얘기로는 탈북자 중 서울대에 추천 입학한 학생이 70명인데 그중 딱 두 명 졸업했대요. 나랏돈으로 관리 안 되는 애들 서울대 보내고 반대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 못 하고…. 이건 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커밍아웃’ 안 하는 탈북 청소년

    김영진 북에서 수학교사였고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2009년 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다니며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땄어요. 일반 대학교 사범대 수학교육과 들어가면 되지만 주간대는 스스로 부담해야 하니까. 대학원도 저는 사실 교육대학원 수학과 다니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현재 북한대학원대학교 다녀요. 우리는 ‘북한’자가 붙으면 왠지 자신감이 생기니까요. 지금 남북한 수학교육 차이로 논문 쓰는데, 아직 연구가 거의 없는 분야예요.

    기자 남북한 수학교육 체계가 많이 다르죠?

    김영진 다르죠. 일단 발음이 달라요. 북한은 러시아식이고 남한은 미국식이에요. 삼각함수의 경우 남한은 ‘사인(sin), 코사인(cos), 탄젠트(tan)’지만 북한은 ‘씨너스, 코시네스, 땅게스’해요. 남한에서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지만 북한에서는 세평방정리라고 해요. 수학은 용어가 개념이에요. 교사인 나도 힘든데 탈북 청소년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도 수학은 제일 비정치적인 과목이니까 따라갈 수 있지만 다른 과목은 정말 힘들 거예요.

    한정민 한글 못 쓰는 애도 많아요. 제가 여기 와서 대안학교에서 근무한 적 있는데 탈북한 지 15년 된, 서른 다 된 애들이 아직도 철자법을 모르더라고요.

    이소연 그런 애들은 잡아놓고 가르쳐야 되는데 ‘스무 살 넘었다’며 놔두는 것도 참 문제예요. 스무 살 넘었어도 책임감을 갖고 인간 만들어야 되지 않나?

    김영진 제가 가르친 애들 중에 중국에서 태어난 탈북자 2세가 있었어요. 중국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모국어가 중국어예요. 일반 학교 가서 알림장도 못 써오고 교우관계는 더 엉망이에요. 두면 둘수록 삐뚤어지기만 하죠. 제가 그런 애들 수학 가르친다고 중국어로 수학 공부를 했어요. 수학 내용 모두 그림으로 다시 그려서 가르치고….

    이소연 강의 하러 다니다보면 학교당 한두 명씩 탈북 청소년이 있어요. 교사도, 학생도 숨기더라고요. 애들이 북한에서 왔다는 말 안 하고, 엄마는 절대 학교 못 오게 한대. 북에서 왔다는 게 일종의 ‘커밍아웃’인 거예요. 엄마를 숨기고 살려니 애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김영진 애들은 말투를 고쳐도 엄마가 오면 딱 티가 나니까…. 사춘기 아이들은 정말 예민하잖아요. 근데 적응 잘하는 탈북 청소년도 있어요. 학생회장도 해요. 그런 애들은 먼저 커밍아웃해요. 한국 교사들도 어려운 게 저애가 탈북자인 걸 아는데 혜택 주려고 하면 애들이 “저 탈북자 아니에요, 여기서 태어났어요” 해버리니….

    한정민 근데 저도 그랬어요. 한국에 와서 3개월 만에 여수박람회에서 조선족들이랑 같이 일하게 됐는데 거기 누가 “탈북자라고 하면 시끄러우니까 그냥 조선족이라 해라”고 했어요. 그랬는데 사람들이 “말씨가 딱 평양 말툰데?” 알아보더라고요. 제가 “강원도에서 살았다”고 했더니 거기 땅값이 얼마냐고 묻네요. 그래서 “에라이” 하고 “북한에서 왔수다” 했더니 편해지더라고요. 저는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닌데 다들 알아봐요. 가끔 신기해서 “오케 아셨지요?” 하고 되묻기도 해요.

    기자 정말 다른 두 분에 비해 한정민 씨는 여전히 평양 말투가 강하네요.

    김영진 그만큼 평양 말씨에 자부심이 있는 거죠.

    기자 북한에서 예술교육을 받는 건 특권이죠?

    한정민 네. 열두 살에 뽑혀서 평성예술대학 들어갔어요. 고향에서 어머니한테 아코디언을 배웠는데, 예술대학 간부가 저를 딱 뽑아서 시험 보라고 한 거예요. 대학 방학 기간에 교사들이 학생들 사는 지방에 다니면서 신입생을 뽑으러 다녀요. 그때 저는 아코디언으로 기악과 시험 봤는데 제가 지나가는 걸 무용교원이 보고 “얘는 기악보다 무용이 좋겠다”해서 무용으로 붙었죠. 북한에서도 남자 무용수는 귀하니까 남보다 빨리 평양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저도 무용했어요.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정리해고

    여군, 남자 무용수, 수학교사…엘리트 탈북자를 ‘통일 열쇠’로 쓰자

    4월 평양에서 공연한 북한의 한 예술단.

    김영진 이런 사람은 천재예요. 12세부터 특수교육을 받은 거잖아요. 저희 오빠는 열두 살에 외대에 갔어요.

    기자 협주단에 얼마나 계셨죠?

    한정민 8년. 그중 4년은 공군사령부 소속이었고요. 한국으로 치면 국방부 소속 예술단이었던 거예요. 공연 활동도 많이 했죠. 대부분 평양에 거주하면서…. 근데 2008년 ‘정리해고’됐어요.

    기자 왜요?

    한정민 인민무력부에서 사무실에 ‘군부 5명 중 3명 자르라’ ‘과장들도 직무 맡으라’고 지시가 내려왔어요. 그전까지 과장들은 별도 업무가 없었거든요. 왜냐 했더니 그때 김정일이 지방에 시찰 나갔다가 한 군사를 불러 세웠대요. 근데 그 군사가 겉옷은 겨우 빌려서 챙겨 입었는데 팬티를 못 입은 거지. 김정일이 충격을 받은 거죠. 그때 사령부 산하 군인을 30% 축소하면 한두 군단 입힐 피복이 생긴다는 계산을 했나봐요. 저희는 전투는 안 해도 1년에 최소 군복 두 벌씩은 나왔거든요. 그래서 김정일이 불필요한 사람들 자르라고 하니까 먼저 북한군 공군합창단이 해체됐고, 저희 협주단도 1000명 중 700명이 잘렸죠. 사실 협주단 정도 오려면 대부분 ‘백’이 있거든요. 근데도 다 잘렸으니 얼마나 사정이 안 좋았는지 알 만하죠.

    이소연 그러고 고향으로 간 거예요?

    한정민 고향에 갔는데, 정말 놀랐어요. 저는 평양에서 있었으니 몰랐는데 우선 물을 못 먹겠는 거예요. 2년 동안 음식도 국수랑 두부만 먹었어요. 고향의 삶이 정말 비참하더라고요. 제가 세상 물정을 모르니 장사하는 친구들 2년 정도 따라다니며 온 동네 다녔는데, 평양에서 멀어질수록 삶이 장난 아니게 비참하더라고. 평안도에서 평북도 딱 건너가는데 “이게 어떻게 사람 사는 거냐” 했어요. 어디 가정집 화장실 갔는데 휴지가 없는 거예요. 봤더니 변소 옆에 강냉이 껍질이 담겨 있어요. 휴지도 없는 거야. 충격이지. 거기 사람들이 나를 평양에서 왔다고 대우하면서 자기 집 방 안에 앉으라고 하는데, 정말 앉기가 싫더라고. 나는 선전하는 대로만 알고 우리 평양은 잘 먹으니 지방도 점점 나아지는 줄 알았지, 그런 현실을 전혀 몰랐어요.

    김영진 평양은 다른 나라예요. 지방이랑은 전혀 달라요.

    이소연 최근 남한에 온 57세 할머니가 있는데 70대로 보여요. 먼저 탈북한 딸이 모셔왔는데 오는 내내 “남조선 안기부에서 순진한 딸한테 돈을 줘서 나를 미국놈 땅에 끌고 간다”며 통곡했대요. 지금 방송에서 많은 탈북자가 “북한에 한류 다 들어갔다” “북한사람들 다 깨어 있다”고 하지만 전혀 아니에요. 평양을 제외한 지역들, 아직도 김정은 보면서 “수령님이 환생하셨다” 하는 사람이 70%는 될걸요.

    한정민 남북 개방이 되면 평양은 빨리 변할 거예요. 나도 국경까지 오면서 보니까 지방은 정말 비참해요. 함경북도 분들한테 “자네들 굶어 죽는 원인이 있구먼” 했어요. 오히려 당성이 더 강하고, 당 총정치국장 한 번 본 걸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이소연 제가 종종 통화하는, 브로커 노릇 하는 북한사람이 있는데 제가 장마당이나 당 지시사항에 대해 물어보잖아요? 그럼 “그런 말은 절대 못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이래요. 자기는 브로커 짓 하고 돈은 빼돌려도 장군님 배반은 못 한다는 거예요. 남한에서는 통일의 방법을 얘기하면서 “북한 내부의 반란이 왜 안 일어나냐?”고 묻는 사람들 있는데, 제 생각엔 북한 내에 반란은 절대 안 일어날 거예요.

    대학 300만 원, 탱크부대 60만 원

    기자 그럼 통일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이소연 그나마 다행인 건 주민 중 깨어 있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거예요. 시장경제도 확대되고. 깨어 있는 주민을 이용하거나 탈북자 가족 이용해서 밑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켜야 돼요. 아주 작은 예산이라도 지속적으로 투입하면서 북한 내 시장민주주의를 지방까지 확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한정민 북한 곳곳에 사는 사람들한테 한국의 실상을 알려야 해요. 평양 사람들도 지방의 비참한 현실을 알아야 하고…. 지금은 너무 폐쇄적이라서 뜻을 모으기 쉽지 않아요.

    기자 요즘 북한 소식도 많이 들으시나요?

    한정민 점점 시장경제 이런 게 확대되나 봐요. 지금은 돈이면 다 돼요. 대학 가는 것도 돈이 다 매겨져 있어요.

    이소연 얼마 전에 들었는데 OO대학 가려면 300만 원 내라 했다네.

    한정민 한국 돈 300만 원? 나 올 때만 해도 김일성종합대학이 300만 원이었는데.

    기자 300만 원을 어디에 내요?

    이소연 교사들이 브로커 짓을 해요. 대학 교원이나 학교 교사들. 저 북한에 있을 때도 졸업하려면 교사집에 쌀이나 조미료 이런 걸 배낭에 넣어 갖다줬어요. ‘OO대학 졸업장 따려면 교원한테 3만 원 갖다줘야 한다’ 이렇게 돈이 다 정해져 있고.

    김영진 1980년대만 해도 아무리 돈이 있어도 공부 못하면 대학 못 갔어요. 학교별로 성적을 공지하고 전체 등수를 보여주기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있는 애들이 한정됐고, 5대 종합대학부터 순서대로 갈 수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무조건 돈이죠.

    한정민 근데 제가 북에서 아는 애 공부하는 걸 봤는데 수준이 엄청 높던데. 구구단도 19단인가까지 외우고.

    김영진 전반적인 학력은 올라갔죠. 조선 민족이 공부는 잘하잖아요. 근데 북한은 사교육이 없기 때문에 도토리 키 재기예요. 결국 돈 있는 애들이 가는 거예요.

    한정민 요즘은 사교육도 해요. 공립학교 교사들이 중국어나 영어 가르치고. 군대도 돈이 다 정해져 있잖아요.

    이소연 그렇죠. 땅크부대(탱크부대) 가려면 60만 원 내라고 한다더라고.

    기자 왜, 거기가 좋은 데예요?

    이소연 거기 가면 영양실조 안 걸린다고….

    김영진 옛날에는 3군단이 비쌌어요. 장성택 남동생 장성일이 군단장이었잖아요. 거기가 영양실조 제일 안 걸리는 데라고. 미군 급식이 공급돼서.

    한정민 뭣이든지 평양 가까운 데가 제일 나아요.

    탈북자의 배신감?

    기자 여러분처럼 북한에서 전문직에 종사했던 사람이 한국에 와 특기를 살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김영진 북한에서 교사를 하다가 한국에서 교사하는 사람, 수천 명 중에 10명도 안 될 거예요. 2010년부터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예비교사아카데미라는 걸 열어 탈북 교사를 한국 교사로 만들려고 노력하긴 해요. 하지만 학력 인증받기도 어렵고 채용할 학교 찾기는 더 어렵죠.

    이소연 정말, 한정민 씨처럼 예술 하는 사람이 에어컨 설치한다니, 너무 아까워요.

    한정민 괜찮아요. 이것도 다 과정이니까. 아무 나라나 적응하려면 가장 밑에서부터 살아야 돼요. 북한에서 온 사람들 중에 “나는 불쌍하다” “나는 북한에서 어렵게 살았으니 여기서 마음대로 해야 한다” 하는 사람들 있어요. 한국 정부는 그냥 집 주면 끝이에요. 그 이상은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다음부터 우리가 알아서 살아야지.

    이소연 탈북자들 마음이 다 일그러져 있어요. 처음 하나원에서 심리치료를 하는데 안 우는 사람 없어요. 마음에 응어리가 있으니까. 근데 심리치료 한두 번 하고 사회에 나와서 각자 살라니 정말 어렵죠. 사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돈이 있어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요. 탈북자가 처음 한국 오면 여기가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하고, 뭐든 다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탈북 청소년도, 한국 교사가 말 사근사근하면서 이해해주는 것 같다가 수업 끝나고 ‘빠이빠이’ 하면 혼란에 빠져요. 배신감도 느끼고. 근데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얼마 전 만난 한 탈북자는 “자기가 직업이 생기면서 정부가 주는 탈북자 생계비 40만 원이 날아갔다”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한민국 온 거 후회한다”고 하기에 제가 “누가 시켜서 온 게 아니라 스스로 온 거 아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답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이랑 이명박 대통령이 오라고 해서 왔다” 이러고 있어요. “왜 이 사회가 나를 보듬어주지 않냐”며 불만을 표출하는데, 정말 답답하죠. 그래서 뭐 도움이 되겠어요.

    기자 그런데 탈북자들 중 경력을 속인다거나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요.

    이소연 대표적인 사례가 탈북 간첩 원정화 씨잖아요. 잘 모르는데, 방송하는 걸 봤어요. 그분 나름대로 그걸로 생계를 이어가는지 몰라도 아주 말마다 부풀려져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탈북 과정에서 보위부에 잡혀갔다는 수준일 것 같은데, 그 사람 말을 믿는 사람들이 더 이상해요.

    탈북자 방송 출연 논란

    김영진 제가 2008년 한국에 왔을 때 원정화 간첩 사건 터졌어요. 거기 직원이 제가 고학력자라고 따로 불러 원정화 약력을 보여주며 “이게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사실 북한은 뻔하기 때문에 딱 보면 알아요. 제가 “세 살짜리도 안다. 이거 아니다”라고 했죠. 그러고 김현희 씨 약력을 보여주기에 “이건 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간첩으로 나오더라고요.

    이소연 저도 방송 출연을 하는데 TV조선 작가들한테 얘기했어요. “이 사람 출연시키면 안 된다”고. 근데도 계속 종편에서 출연시키는 거예요. 결국 시청률 올리기 위한 목적이죠.

    기자 그래도 채널A 탈북자 집단 인터뷰 프로그램인 ‘이제 만나러 갑시다(이만갑)’의 경우 화제가 됐는데요.

    이소연 북한은 폐쇄적 사회이기 때문에 지역별로 경험한 편차가 달라요. 그런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냥 ‘북한의 실상’이라며 뭉뚱그려 보여주니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만갑’ 통해 탈북자를 이해하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모습 보여주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고….

    김영진 다양한 사람을 보듬는 게 필요해요. 나중에 통일이 되면 우리가 겪었던 문제를 수천만 북한사람들이 모두 겪을 거 아니에요. 남한이 탈북자를 포용하는 연습을 하면서 통일 한국을 준비해야겠죠.

    한정민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 잘 적응한 일종의 ‘엘리트 탈북자’를 활용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시행착오를 겪었고 해결 방법을 체득했으니까 나중에 북한사람들한테 그 방법을 전달하기도 훨씬 쉽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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