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결정적인 시기 왜 한국군은 무력해지는가

대청해전 승리 질책한 이명박

  • 이정훈│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4-07-22 1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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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군은 많은 훈련을 하고 최고 수준의 무기를 갖췄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무력(無力)’해진다. ‘자주국방’ 구호가 무색하게 위기에 처하면 미군에 매달린다.
    • 그리고 다시 자주국방을 하는 척하다가 유사한 사건을 당하면, 무력한 대응을 하고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결정적인 시기 왜 한국군은 무력해지는가

    천안함 사건 후인 2010년 5월 4일, 처음으로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주재한 이명박 대통령.

    기자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2권(‘천안함 정치학’, ‘천안함 루머를 벗긴다’), 연평도 사건에 대해서는 1권(‘연평도 통일론’)의 책을 내며 두 사건을 추적해왔다. 그럼에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북한 수뇌부의 도발 준비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 권부(權府)에 대한 취재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접근해갈 수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요직에 있던 이들이 조금씩 입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식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기에 익명으로 처리해 다큐멘터리식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신동아’ 2012년 12월호와 2013년 4월호, 2014년 3월호 등에 쓴 기사가 그것들이다. 이런 취재를 통해 품게 된 화두가 ‘왜 한국군은 약한가?’였다.

    천안함 사건 후 정부는 국제민관군합동조사단의 조사를 통해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이 CHT-02D 어뢰를 쏴 천안함을 격침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감사원을 동원해서는 ‘어느 부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감사원은 작전 전문가 집단이 아닌데 어떻게 작전을 조사하게 하느냐”는 반발이 많았지만, 어쨌든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국가 지도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 당일 청와대 측은 “북한과의 연계성이 확실치 않다”고 주장했다. 군에서는 ‘북한이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고, 그에 대한 보고가 빗발쳤는데, 왜 청와대는 다른 판단을 한 것일까. 이 판단이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없었다.

    이것을 알아보지 않고는 ‘결정적인 시기 한국군이 무력해지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최근 기자는 이 화두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천안함 사건 당시 요직에 있었던 그로부터 익명을 전제로 숨은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다.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때 군 통수권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 국민은 ‘국방의 목표’와 육·해·공군의 목표, 각 부대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로 시작되는 국방의 목표는 ‘국방백서’에 나와 있다. 이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각 군은 자기 목표를 설정한다. 군에 갔다 온 이라면 훈련병 시절 ‘육군의 목표’ 등을 외우지 못해 얼차려 받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일선 부대들은 그 연장선에 있기에, ‘전선 사수(死守)’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이 목표들과 가끔 심각하게 충돌하는 것이 ‘정권의 목표’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제1의 목표로 정한 정권이라면 군에 “MDL(군사분계선)과 NLL(북방한계선)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주문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의 정치 상황을 예의주시하기에 그 틈을 노린다. 틈을 만들기 위해 정상회담에 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국방의 목표 vs 정권의 목표

    서해 NLL에는 지뢰나 철책 같은 장애가 없으니 침투하기 쉽다. 그 때문에 NLL 방어를 책임진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 작전사령부 및 2함대사령부는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 복잡한 사고가 허점으로 작용해, 결정적인 시기 한국군은 무력해지는 것이다.

    국민은 ‘북한 배가 NLL을 넘어오지 못하게 우리 해군이 철저히 지킨다’고 믿고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 배는 수시로 넘어오고 있다. 서해 5도 가운데 포병 부대가 주둔할 정도로 큰 섬은 백령도와 연평도뿐이다. 반면 북한은 황해도 전 해안에 포대를 배치할 수 있다. 이러한 인민군 화력을 두 섬 사이에 투입되는 해군 함정이 상대한다.

    함포는 함정 크기에 제약을 받지만, 육상 포는 그렇지 않으니, 우리 함정은 항상 화력 열세에 놓이게 된다. NLL 바로 밑에서 작전하고 있으면 한 방에 ‘수장(水葬)’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합참은 적 포탄이 도달하기 힘든 NLL 남쪽 4~5해리쯤(일부 구간은 2~3해리, 1해리=1852m) ‘합참통제선’을 설정해놓고, 평시에는 그곳까지만 북상하게 한다.

    그러니 북한 함정과 어선은 물론이고 중국 어선도 동서(東西)로 항해할 때는 무시로 NLL을 넘나든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침로(針路)를 남쪽으로 잡아 내려오는 것이 있으면, 도발로 판단해 고속정을 합참통제선 이북으로 출동시킨다. 그리고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하는데 그래도 침로를 돌리지 않으면 함대사령관의 허락을 받아 격파사격을 한다.

    따라서 서해상 남북 충돌은 항상 NLL 남쪽과 합참통제선 사이에서 일어난다.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이 그러했다. 육군은 이러한 상황을 잘 모른다. 해·공군과 함께 작전하는 합참에 온 후 이를 처음 아는 경우가 많다. 기자에게 비화를 털어놓은 사람도 육군이었다.

    우리 군 질책하는 MB의 전화

    합참에 처음 근무하게 된 그는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NLL이 수시로 뚫린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가 “왜 북한 함정의 NLL 월선(越線)을 보고만 있느냐”고 묻자, 해군 측은 이와 같은 설명에다 “남북관계의 경색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는 후자에 집중해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니 ‘군인 짓’에 충실하자. 정치적인 것은 고려하지 말자”며 제대로 방어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난 2009년 10월 23일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정부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이어 11월 10일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제1연평해전은 우리가 대승한 전투이지만, 우리 쪽에서도 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덴만 여명작전도 성공작이지만, 인질로 잡혔던 석해균 선장 등이 총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었다. 제2연평해전에서는 우리 고속정이 침몰하고 6명이 전사했다.

    대청해전은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은 완전 승리였다. 그런데도 대접을 받지 못한다. 세 작전에 대해서는 기념비까지 세우게 됐지만, 대청해전의 경우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나흘 뒤인 11월 13일부터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한 3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비밀접촉설’에서 찾아야 한다. 그 무렵 이명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던 이 요인의 말이다.

    “승리에 대해 칭찬해주실 줄 알았는데, 대통령은 그 승리로 인해 3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화까지 낸 것은 아니지만,‘왜 그렇게 강하게 대응했느냐’며 매우 서운해했다. 말씀을 다 한 다음에도 미진한 감정이 남았는지, 계속 혀를 차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전화 통화라 직접 얼굴을 뵐 수는 없었지만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수 있음을 무척 안타까워하는 느낌이었다.”

    국방의 목표와 정권의 목표가 정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그때가 군 지휘관으로서는 가장 힘들다. 그는 ‘자기의 길’을 선택했다. 그해 말 작전사급 부대와 화상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지휘관들에게 “적은 반드시 보복한다. 적은 수상이 아닌 바다 밑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으니 대비하라”라는 요지의 지시를 내렸다.

    그에 대해 해군 관계자들은 “서해는 수심이 낮고 물이 탁해, 잠수함을 이용한 공격은 하기 어렵다. 서해에서 잠수함정은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했다. 북한은 남포 앞바다의 비파곶에 로미오와 상어급 등 공격 잠수함을 배치한 기지를 갖고 있다. 그는 그 사실을 거론하며 “서해에서 잠수함 작전이 어렵다면 왜 북한은 비파곶에 공격잠수함 기지를 운용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키리졸브 연습이 끝나는 2010년 3월 말 적의 잠수함 공격에 대한 대비를 잘 하는지 검열하겠다”는 말로 회의를 마쳤다.

    wishful thinking에 빠진 대통령

    그리고 운명의 2010년 3월 26일이 다가왔다. 그날 합참은 육군 교육사에서 국군 역사상 처음으로 3군 참모총장을 참석시킨 가운데 합동성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해·공군은 합동성 강화를 육군이 해·공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을 만들려는 것으로 보기에, 합동성의 ‘합’자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그런 회의를 열게 됐으니 많은 관심이 육군 교육사로 쏠렸다.

    같은 날 합참에서는 적 잠수함 공격에 대한 대비 태세를 알아보기 위한 검열단의 예비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백령도 서남방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즉시 ‘어뢰를 맞은 것 같다’와 ‘1977년 백령도 해역에 설치한 우리의 MK-6 육상조종 기뢰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양론이 나왔다. 다수 의견은 어뢰 쪽이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기뢰는 육상에 있는 조작반에서부터 도선(導線)이 연결돼 있어 조작반을 조작해야 폭발한다. 그런데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이 계속 불안을 호소했기에 그후 대부분을 회수했다. 위치가 바뀌어 찾지 못한 기뢰에 대해서는 조작반과 육상에 있는 도선을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조작반과 도선이 없으면 이 기뢰는 터질 수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반대로 기울었다. 이 요인의 말을 옮겨본다.

    “대통령 처지에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적 어뢰가 천안함을 격침했다고 하면 정상회담을 추진해온 그로서는 큰 위기에 직면한다. 피로골절로 부러졌다고 하면, ‘같은 연수(年數)의 초계함이 작전 중인데 왜 천안함만 부러지는가’라는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수하지 못한 기뢰가 터졌다고 한다면 큰 부담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도 다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대가 대통령을, 국가를 책임진 사람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wishful thinking(소망적 사고)’ 쪽으로 유도했다고 본다.”

    얼마 후 청와대에서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기에, 외교안보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그는 대통령에게 MK-6 기뢰가 폭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5월 15일 두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천안함 사건 후 처음으로 북한 함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한 번 내려왔다 물러나더니 다시 넘는 식으로 NLL을 침범한 것이었다. 화상회의로 실시간 보고를 받은 그는 다시 넘어온다고 했을 때 격파사격을 지시했다.

    “같은 배가 다시 넘어오는 것은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더구나 그때는 천안함에서 많은 시신을 인양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의 적개심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다. 우리의 격파사격에 북한이 대응한다면,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하지 못한 보복까지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화상회의장에 국방부 고위관계자가 들어오더니, ‘지금 뭐 하는 거야. 모두 원위치!’를 지시했다. 결국 해군은 다시 넘어온 그 배를 향해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해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때 화상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요 지휘관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정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좋게 넘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겠는가.”

    변죽만 울리다 주저앉는 우리 군

    그날 백령도의 사건 현장을 긁고 있던 쌍끌이 어선이 CHT-02D 어뢰의 잔해를 끌어올렸다. 이로써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제야 대통령은 생각을 바꾸고 5월 24일 전쟁기념관에서 북한을 제재하겠다는(5·24조치) 연설을 했다. 이어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6년 만에 대북심리전을 재개한다”는 선언을 했다.

    북한은 심리전을 재개하면 격파사격을 하겠다고 반발했지만, 합참은 심리전용 확성기를 설치하고 이를 운용할 부대를 위한 지하진지를 구축해나갔다. 북한이 격파사격을 해오면 바로 북한 GP를 공격하기 위해 GOP 부대에 토 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 야전포병에 “북한이 공격해왔는데 한참 뒤 대응하면 우리가 새로운 도발을 했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으니, 10분 안에 초탄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월 21일 부산항을 방문한 미 해군의 조지워싱턴 항모가 25일부터 28일까지 전투단을 이끌고 동해에서 우리 해군과 ‘불굴의 의지 작전’을 하게 되었다. 미 항모가 참여한 훈련을 하면 북한은 강하게 반발하니, 합참은 그때를 심리전 재개 시기로 잡았다. 그리고 정부의 승인을 요구했는데 허락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은 변죽만 울리다가 또다시 돈좌(頓挫)하게 된 것인데, 이것만큼 힘 빠지는 것도 없다. 그의 말이다.

    “천안함 사건은 기습을 당한 것이지만, 연평도 사건은 대낮에 당한 명백한 도발이다. 그런데도 현장 부대만 대응하고 전군은 가만히 있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후 우리 군이 준비한 많은 전략이 돈좌되는 것을 보고, 지휘관들은 ‘정치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모 지휘관이 ‘참모 가운데 한 명이라도 대응하자고 했으면 결행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모든 지휘관과 참모가 청와대 눈치를 보고 있으니 우리 군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다.”

    대통령도 군사훈련에 참여하라

    그는 결정적인 시기 국군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권이라는 아주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우리 군은 ‘허상(虛像)’ 위에서 훈련한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보복이나 반격작전을 승인했다고 보고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통령은 그 작전을 승인해주지 않으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대통령이 승인해줄 것으로 치고 하는 ‘했다 치고 작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시 군사훈련에서 배제되는 것이 큰 문제다. 키리졸브 등 큰 훈련에 참가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유사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지 않고 남북정상회담 같은 허황된 목표만 내세우니, 우리 군은 무력한 대응으로 이어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안보는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자본(SOC)인데 대통령이 경제에만 더 주목하는 것도 큰 문제다. ‘경제가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면 대통령은 어떠한 결심도 하지 못한다. 정치와 경제에 발목이 잡히는 이 틀을 깨지 못하면 한국군은 좋은 무기가 있어도 결정적인 시기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도 안되지만 결정적 시기에 정치도 군에 마구 개입하면 안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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