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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5年, 소나기에 흠뻑 젖은 한국 민주주의

[신기욱의 밖에서 본 한반도] 文과 트럼프 역주행, 윤석열과 바이든 키우다

  •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문재인 5年, 소나기에 흠뻑 젖은 한국 민주주의

  • ● 韓美 민주주의 퇴보 결과물
    ● 자유주의 학습 못한 운동권 세력
    ● ‘적폐청산’은 선명한 포퓰리즘
    ● 진영 팬덤, 한국적 ‘정체성 정치’
    ● 尹, 강골검사·反페미·反中 이미지 벗어야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역사사회학, 정치사회학, 국제관계 분야 세계적 석학이다. 한미동맹, 동북아 역사, 남북관계 등에 대한 정책 과제를 수행해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도 지명도가 높다. 미국 및 유럽 유수 언론이 즐겨 인용하는 ‘한반도 전문가’로 꼽힌다. ‘신동아’는 이번 호부터 새 연재 ‘신기욱의 밖에서 본 한반도’를 시작한다. 안에서 보는 시각에 갇힌 한반도론이 바깥으로 확장되는 지적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 2019년 9월 23일(현지 시간)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 뉴욕 인터콘티넨털 바클리 호텔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갖기 전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뉴욕=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 2019년 9월 23일(현지 시간)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 뉴욕 인터콘티넨털 바클리 호텔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갖기 전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뉴욕=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해외에서 고국의 대선과 정권 인수 과정을 보는 마음은 다소 착잡하다. 곧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지만 희망과 기대로 마음이 설레기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더구나 2022년의 한국과 2020년 미국의 상황은 너무나 흡사해 놀랍기까지 하다. 미국 민주주의가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기를 거치며 퇴보했다면, 한국 민주주의 역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후퇴해 왔다. 그 결과가 대선과 정권 인수 과정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윤석열호(號)는 과연 한국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최근 10년간 진행돼 온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비교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새로 닻을 올리는 윤석열호의 역사적 사명을 외부의 시각에서 논하려 한다.

2020년 미국과 2022년 한국

트럼프 대 반(反)트럼프 대립 구도로 치러진 2020년 미국 대선처럼, 한국 대선도 현 집권 세력과 반대 세력 간 극한 대치 속에 치러졌다. 애초부터 정책 비전이나 이슈가 논의될 공간은 없었다. 야당의 연합전선이 힘겹게 신승한 점도 비슷하다. 조 바이든이나 윤석열이 야당 후보가 된 것은 새로운 비전이나 리더로서 매력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들이 정권교체의 최적임자였기 때문이다. 한미 대선에서 공히 극한 네거티브 켐페인이 기승을 부렸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보다는 현 정부를 심판하는 데 초점이 모였다. 트럼프가 단임에 그쳤듯 더불어민주당은 5년 만에 보수 야당인 국민의힘에 정권을 넘겨줬다.

두 번째는 선거 초반 낙승이 예상되던 트럼프가 패배한 것처럼 한국의 여당 역시 역전패한 점이다. 2020년 초만 해도 트럼프의 재선은 무난해 보였다. 반면 당시 야당이던 미국 민주당은 후보가 난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급작스레 들이닥친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해 불리한 정치 환경이 조성됐고, 바이든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운 야당 연합군에 정권을 내줬다. 한국의 여당인 민주당은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 등 연이은 승리로 손쉽게 정권을 재창출할 것으로 보였다. 일각에서는 ‘20년 집권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부동산 등 민생 정책의 실패와 ‘내로남불’로 대표되는 도덕적 해이 등으로 민심이 이반하면서 거센 정권교체의 바람을 극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바람의 주역이 자신들이 임명한 검찰총장 출신의 후보였다는 점에서 여당이 받은 충격은 더 클 것이다.



세 번째는 대선 직후 새 정부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선거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정부 출범 직전 조지아주에서 상원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격전 끝에 민주당이 2석 모두 석권하면서 하원에 이어 상원을 장악해 힘겹게 정국 운영의 동력을 확보했다. 한국에서도 새 정부가 들어선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인 6월 1일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는 신승했지만 국회에서는 여소야대 상황에 처해 있다. 이에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새 정부의 국정 운영 동력 확보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네 번째는 선거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못하거나 정권 인수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점이다. 트럼프는 소송전을 전개하며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극렬 지지자들이 무력으로 의사당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한국에선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깨끗하게 승복했다. 이에 한국이 미국보다 낫다는 안도감과 희망을 가졌지만 대통령 집무실 이전, 추경 예산, 주요직 임명 등 중요 사안마다 신구 권력이 충돌하며 정권 인수가 매끄럽지 못한 점은 미국과 엇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법치주의라는 미명 아래 민주적 정신과 규범을 저버린 점이다. 트럼프가 그간의 정치적 관행을 무시하고 선거 직전에 대법관 임명을 강행한 것처럼, 문재인 역시 정권 이양기에 감사위원 등 주요 직책을 임명하려 했다. 청와대의 항변처럼 아직은 현직 대통령에게 법적으로 임명제청권이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적 규범이나 관행에 비춰보면 차기 대통령에게 권한을 이양하거나 최소한 동의를 구한 후 임명제청 절차를 거치는 게 맞다.

한국 민주주의의 쇠락(Democracy Decay)

대선과 정권 인수 과정에서 나타난 혼란은 일시적 현상이나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한미 모두 지난 수년간 진행돼 온 민주주의 퇴보의 결과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는 지식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다.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프랜시스 후쿠야마 (Francis Fukuyama) 등 필자가 재직하는 스탠퍼드대 동료 교수들도 적극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필자 역시 그간 한국 민주주의의 역행에 대해 심각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20년 4월호 ‘신동아’ 기고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가랑비에 옷 젖듯’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해 7월 미국 ‘민주주의 저널(Journal of Democracy)’에서 출간된 논문에서는 이러한 한국의 상황을 ‘민주주의의 쇠락(Democratic Decay)’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바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에서 선도적으로 민주화를 이끌어온 한국은 2010년대 이후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식 권위주의’로 후퇴했고, 결국 대통령 탄핵과 정부의 불명예 퇴진이라는 결과에 직면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식 권위주의’라는 낡은 모델은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시민사회와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2016년에서 2017년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는 이러한 긴장관계의 분수령을 이뤘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이 촛불집회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그것은 ‘국가 대 시민사회의 대결 구도’의 표출이었다. 즉 정치사회 내 정당들 간의 대결 구도라기보다 정치사회를 포함한 ‘국가 대 시민사회의 대결 구도’였다. 당시 촛불집회를 통해 한국의 시민사회는 권위주의 국가를 다시 한번 거부하고 퇴출시킨 셈이다.

문제는 촛불집회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의 통치였다. 스스로를 촛불혁명 정부라고 자부했던 문재인 정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민주주의와 다시 긴장을 이뤘고, 결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 이번 대선과 정권 인수 과정에서 나타난 퇴행적 모습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 쇠락을 가져온 다음의 세 가지 연관된 이슈를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자세한 논의는 필자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편집한 책 ‘Korean Democracy in Crisis: Threats of Illiberalism, Populism, and Polarization’ 참조할 것).

먼저 자유주의의 빈곤이다. 필자가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라는 저서에서 논의한 대로 한국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식민지와 분단을 겪으며 과도한 민족주의를 경험했다. 집단의 논리와 단결의 힘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의 힘에 밀려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반공주의나 문재인 정부의 국수주의적 반일주의 모두 매우 강한 흡인력을 가진 민족주의에 기댄 바가 크다.

한국이 1980년대 말 이후 법치적 민주주의를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과거의 권위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확립했다고 하긴 어렵다. 정치학자 야샤 뭉크(Yascha Mounk)가 ‘국민과 민주주의(People vs. Democracy)’라는 저서에서 지적했듯 법치주의(rule of law)가 반드시 자유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법치주의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해도, 민주주의 정신과 규범(democratic norm)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하버드대의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랏(Daniel Ziblatt)이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저서에서 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어도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선출된 지도자에 의해 민주적 규범이나 정신이 훼손되면 민주주의는 서서히 고사한다.

미국도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적 규범의 핵심인 상호존중(mutual tolerance)과 권력의 절제(forbearance)가 이뤄지지 않으면 형식적 법치주의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 관용과 타협보다 증오와 대립의 정치가 앞서고, 권력 행사가 균형이 아닌 남용으로 미끄러지면 민주주의의 쇠락은 필연적 결과가 된다.

한국의 경우 불행하게도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진보적 정치학자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의 중추를 이룬 이들은 독재정권과 싸워 민주화를 쟁취하는 데는 공헌을 했지만, 자유주의를 학습하거나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 상호존중과 관용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규범과 정신을 내재화하지 못했다. 또 다수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했다.

한국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과거 운동권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삼기보다는 여전히 과거 독재정권과 싸우듯이 대하고 대립과 분열의 정치를 했다고 일갈했다.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진보적 시민사회는 권력 감시기구라는 본연의 모습을 버리고 청와대와 내각에 포진하며 권력의 파이프라인이 됐지만 부동산, 소득주도성장, 탈(脫)원전 등 정책 시행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그럼에도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하며 철 지난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야당을 비롯한 반대 세력을 구악으로 규정했다.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하기는커녕 외려 퇴행시켰다. 한국의 정치는 진영논리에 따라 선과 악의 진흙탕 싸움터로 변질됐다. 그 결과는 이번 대선에서 무한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정치의 포퓰리즘화는 민주주의 부패를 가져온 또 다른 중요한 요소다. 세계 곳곳에서 표출되는 21세기 포퓰리즘은 그 이전의 인기영합적 포퓰리즘과는 성격이 다르다. 프린스턴대의 정치이론가인 뮬러(Jan-Werner Müller)는 21세기 포퓰리즘의 특징을 반(反)엘리트주의와 반(反)다원주의로 규정했다. 쉽게 말해 기득권을 공격하는 것이 반엘리트주의라면, 다른 세력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것이 반다원주의다. 반엘리트주의는 다시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로, 반다원주의는 상대 정치세력의 악마화로 나타난다. 여기에 정보사회의 진전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포퓰리스트 리더와 지지자들 간의 직접 소통을 가능케 한 ‘직거래주의’ 또한 21세기 포퓰리즘의 주요 특징이다. ‘트럼프주의’는 이런 21세기 포퓰리즘의 대표 사례다.

적폐청산의 유산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스트적 성격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 것은 ‘적폐청산’이다. 적폐란 ‘앙시앙 레짐’을 뜻한다. 낡은 질서는 당연히 도태돼야 한다. 부패하고 불법을 저질렀다면 처벌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안에서 낡은 질서와 새로운 질서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또 독일의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한 ‘자기제한성(self-limitation)’을 가져야 했다. 낡은 질서를 해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제는 추진하되 가급적 빨리 마무리한 뒤 새로운 사회통합을 추구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전방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됐고, 이 과정에서 다원적 자유민주주의를 위축시켰다.

이번 대선은 이러한 정치사회 환경 속에서 치러졌다. 진보적 사회학자인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주장처럼 이번 대선은 민주화 시대 이후 처음으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가 아닌 신구 기득권 간 싸움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했다. 타협과 협치를 중시하는 전통적 의미의 민주주의 지도자보다, 여의도 정치 문법과 거리가 멀고 반(反)기득권 세력과 싸우는 아웃사이더 ‘스트롱맨’을 선호했다.

스트롱맨은 대화와 조정의 정치력보다 결단과 추진의 실행력을 중시한다. 이재명, 윤석열이 여당과 제1야당의 후보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상대방을 ‘낡은’ 기득권 세력 또는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라고 공격했고, 상대방과의 공존을 거부했다.

진보의 팬덤정치, 보수의 젠더정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 차원의 화두는 불평등, 다시 말해 경제적 양극화의 강화였다. IMF(국제통화기금)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모두 경제적 양극화 해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경제적 양극화 못지않게 주목할 대목은 정치적 양극화다. 경제적 양극화와 동전의 다른 면을 이루는 정치적 양극화에 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앞서 지적한 자유주의의 빈곤과 포퓰리즘의 부상은 정치적 양극화를 촉진했다. ‘문빠(문재인 대통령의 열성 지지 그룹)’와 태극기 부대, 서초동 대 광화문 집회로 나타난 극렬한 대립은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의 ‘뉴 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 간, 집단 간 상호 불신이 커지고 흑백논리와 진영논리가 득세하며 곳곳에서 민주주의 후퇴의 징후가 나타났다. 구동존이(求同存異)나 ‘Agree to disagree’라는 다원적 규범은 사라지고 오직 내편과 네 편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자유주의와 포퓰리즘에 내재한 반다원주의와 반엘리트주의의 결과, 정치사회는 공통의 정서와 신념으로 무장한 진영이 벌이는 권력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전쟁터로 전환된다. 승자독식의 막강한 대통령제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 정권 재창출이냐 정권교체냐의 프레임의 강도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진영 전쟁은 헌터(James Hunter)가 개념화한 ‘문화전쟁’이나 후쿠야마가 지적한 ‘정체성의 정치’로 구현된다. 헌터는 ‘결정적 이슈들(hot button issues)’, 예컨대 낙태·정교 분리·동성애·총기 소지 등을 쟁점으로 미국 사회가 둘로 나뉘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문화전쟁의 원인이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불평등에 대한 경제·사회 정책, 소수자에 대한 사회·문화적 포용, 승자독식이냐 합의주의냐의 정치제도 간 차이가 그 양상과 강도를 결정한다.

이러한 문화전쟁은 ‘정체성의 정치’로 나타나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발산한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사유·감정·이념을 뜻한다. 종교, 인종, 민족, 젠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훼손되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기존 제도정치를 대체하고 있다. 이는 21세기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를 고려할 때에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정치적 팬덤주의’를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21세기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는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신념이 중요하다. 정치·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관적 신념은 경제적 이익 못지않게 시민들의 사고와 행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도 문화전쟁이나 정체성 정치의 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진보진영의 팬덤정치, 보수진영의 젠더정치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진영 간 팬덤은 노사모-문빠-개딸이나 박사모-태극기부대-이대남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관용과 공존, 타협의 지대는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이번 대선의 성패가 0.73%포인트라는 간발의 차이로 갈린 점은 양극화된 한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권 연장이냐 교체냐를 놓고 한국 사회는 완전히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 것처럼 보였고, 양극화의 심화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5년 전,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부, 앞의 말은 틀렸지만 뒤의 말은 맞았다. 한국은 한 번도 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그 결과로 가랑비에 젖어가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 대선 동안 소나기에 흠뻑 젖었다. 어쩌면 거대한 태풍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트롱맨 이미지 尹, 개선 필요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이 3월 2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만찬 회동을 하기 위해 녹지원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이 3월 28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만찬 회동을 하기 위해 녹지원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여당이 상·하원을 장악한 바이든에 비해 윤석열은 훨씬 더 열악한 조건에서 임기를 시작하게 됐다. 여소야대의 국회는 물론 진보적 시민단체, 노동계 등의 ‘거리 정치’와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정치 베테랑인 바이든에 비해 윤석열의 정치력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적어도 해외에 비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윤석열의 이미지도 아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그는 강골검사, 반(反)페미, 반(反)중국으로 투영되고 있다. 바이든과 같은 전통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멀다. 스트롱맨의 이미지가 후보가 되는 데는 도움이 됐는지 몰라도 민주사회를 운영해 나가는 정치지도자로선 바람직하지 않다. 윤석열이 국제사회에서 리더로 활약하기 위해선 이미지 개선은 물론 이를 뒷받침할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우선 윤석열은 정치 기반이 취약할 뿐 아니라 해외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지난여름 정치에 뛰어든 후 선거 과정을 거치며 빠르게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검찰총장의 모습이 더 어울릴 때도 많다.

그는 부패 청산과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검사로 인기를 얻었고 대통령이 됐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선 최고 지도자의 쾌도난마식 결정이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만 해도 비협조적인 청와대가 못 마땅해도 여론을 수렴하고 현 정권의 지원을 얻는 노력을 충분히 했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 국정을 수행하는 데 거대 야당과 진보적 시민사회의 막강한 견제와 거센 도전을 감수하려면 여론 수렴, 정치적 협상, 조정과 타협, 권력 사용을 절제할 줄 아는 정치적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임명직 관료인 검사와 선출직 정치인인 대통령은 그 역할과 임무가 다르다.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법치주의에 터를 잡되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과 권력의 절제 등 민주주의 정신과 규범에 대한 깊은 성찰과 강한 실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신(新)적폐청산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내를 갖고 국민과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 구동존이의 자세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만약 일부에서 우려하듯 새 정부 출범으로 기존의 ‘운동권 공화국’이 ‘검찰 공화국’으로 변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하고 말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반(反)페미니스트 이미지에서도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여성가족부 해체를 공약하는 등 젊은 남성들의 표를 얻겠다는 젠더 전략은 여성표의 이탈을 가져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외려 윤석열의 ‘반페미’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윤석열 측에선 민주당과 진보언론의 프레임이라 항변할지 모르지만 해외에서 보는 시각은 그렇지 않다. 실례로 프랑스 유력 통신사인 AFP는 한국 대선 직후 올린 첫 기사에서 윤 당선인을 “반페미 정치 신인”으로 규정했다. 많은 국제 언론도 비슷한 논조를 이어갔다. 글로벌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나 성정체성 문제는 매우 민감한 이슈다. 반페미 이미지가 고착화할 경우 글로벌 리더로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데 큰 제약이 된다.

마지막으로 국수주의적 반(反)중국의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조선족의 한복 착용이 논란이 됐을 때 반중국 정서에 편승한 것이나 당선이 되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더 배치하겠다고 한 강경 발언 등은 신중하지 못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반미 정서를 자극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이로 인해 노무현 정부 초기 한미관계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토착왜구’ 운운하며 반일 감정을 정치에 이용한 것처럼 윤석열 정부가 반중 정서를 정치에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져선 안 된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관계가 최악에 빠진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국민 정서가 중요하고 중국이 못마땅한 점이 많다 해도 국익 차원에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한다. 윤석열이 강조하는 실용주의가 외교·안보 분야에도 적용돼야 한다.

해외서도 韓 민주주의 지켜본다!

2020년 미국의 바이든처럼 2022년 한국의 윤석열은 사회적 분열과 정치적 갈등을 치유할 숙제를 부여받았지만 정권 인수 과정에서부터 구 권력과의 파열음이 커지며 집권 초 허니문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집권 초 70%대의 지지율을 구가하던 전임 정부들과는 달리 윤석열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도 50%에 못 미치고 있다.

이는 트럼프의 재집권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 정책 모두 고전하는 바이든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집권 2년째를 맞는 그의 지지율은 40%에 머물며 트럼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최저치다. 이대로 가면 11월 중간선거에서 패할 가능성이 크고, 바이든의 실패가 트럼프를 다시 백악관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윤석열의 당선이 정권교체를 가져왔지만 반드시 한국 보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실패는 좌파 정부의 부활을 가져올 수 있다. 윤석열의 역사적 사명이 크다.

이번 대선은 해외 언론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필자가 인터뷰한 외신만 해도 유럽의 유수한 중도·리버럴 잡지인 독일 ‘슈피겔’, 영국 ‘뉴 스테이츠먼’과 ‘가디언’, 스웨덴의 공영방송 등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 대선과 관련한 특집 분석 기사를 냈다. 서구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이 주의 깊게 본 점은 현 정부에서 임명된 검찰총장 출신의 야당 후보 당선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부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위협에 처해 있는데, 동아시아 민주화의 선도국이던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조금씩 적셔가던 가랑비는 대선과 권력 이양 과정에서 거친 소나기로 변했다. 윤석열호가 그동안 훼손돼 온 한국 민주주의를 악성 호우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 해외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필자의 ‘신동아’ 연재는 영어로도 번역해 해외에 널리 알리려 한다. 이를 통해 국내외 지식인들 간에 주요 담론과 이슈를 놓고 건설적 토론과 논쟁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기욱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



신동아 2022년 5월호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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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5年, 소나기에 흠뻑 젖은 한국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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