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명예 살인은 왜 근절되지 않는가

  • 김영미│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2-03-20 16:2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명예 살인 당한 나디아의 시집 ‘어두운 꽃’에 담긴 한 구절이다.
    • “나는 우울과 슬픔에 잠긴 채 새장에 갇혀 있다. 내 날개는 접혀 날 수 없다.
    • 나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 아프가니스탄 여인이다.”
    • 여성이 죽어야 가족의 명예가 지켜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 그런데도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 나시르 하뮨 아프가니스탄 고등법원 판사는 “명예 살인은 전통적인 관습이라 법원이 중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2010년 9월 영국 BBC가 공개한 한 동영상에 담긴 끔찍한 장면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영상은 아프가니스탄 북부 쿤두즈 주 물라쿨리 마을에서 한 남녀를 투석으로 처형하는 모습이었다. 25세 젊은 남성 카얌과 19세 여성 시디카가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시디카에게는 집안에서 정혼한 남성이 있었다. 시디카의 가족은 정혼자를 놔두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시디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둘은 사랑을 멈출 수 없었고 마침내 아프가니스탄 동부 쿠나르 주로 도망쳤다. 여기까지는 애틋한 러브 스토리지만 결말은 그렇지 못했다.

    시디카의 가족과 마을의 종교 지도자는 “만약 돌아오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거짓말을 해 두 사람을 마을로 돌아오게 했다. 정식으로 사랑을 허락받고 부부가 되겠다는 이들의 꿈은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무너졌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종교 재판이었다. 연인은 공개 투석형을 선고받았다. ‘연애 행각으로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으므로 더 이상 살려둘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남성 200여 명에게 둘러싸여 어른 주먹 크기의 돌을 맞고 살해됐다. 돌을 던진 사람 중에는 시디카의 아버지와 오빠도 있었다. ‘핏줄이지만 명예를 더럽힌’ 시디카를 처단하는 일에 가족도 앞장선 것이다. 두 사람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랬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주로 10대 여성이 희생자

    카얌과 시디카는 이른바 ‘명예 살인’의 희생자다. 명예 살인은 가족의 명예를 훼손한 이를 가족 구성원이 직접 죽여 실추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명예 살인은 중동과 서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용인받은 행동이다. 명예 살인을 저지르는 구실로는 간통과 자유연애, 복장 불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심하게는 여성이 외간 남자를 슬쩍 쳐다봤다거나 모르는 남자가 여성에게 길을 물어봤다는 이유로 명예 살인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희생자는 주로 혼기를 앞둔 10대 여성이 많다.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 살인을 당하는 기혼 여성도 적지 않다. 앞서 카얌의 경우처럼 상대 남자까지 명예 살인이 적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명예 살인의 주된 희생자는 여성이다. 명예 살인을 용인하는 배경에는 뿌리 깊은 여성차별이 있다. 중동 일부 국가에서는 여성이 집과 직장, 학교를 제외한 곳에 자유롭게 갈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엄격한 이슬람 샤리아(원리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여성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 혹은 남편 같은 보호자를 대동하지 않고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나라들에서 명예 살인이 주로 일어난다.



    2009년 유엔은 인권보고서에서 매년 5000명가량의 여성이 명예 살인이라는 명목으로 희생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1년 후 영국 ‘인디펜던트’는 10개월에 걸친 자체 취재결과를 바탕으로 이보다 4배 많은 2만 명의 여성이 명예 살인으로 죽는다고 보도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여성도 자신의 가족 내 다른 여성에 대한 명예 살인에 동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여성도 ‘가족은 남성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일부 여성은 가족의 명예를 더럽힌 딸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다른 딸 결혼에 문제가 생길까봐 명예 살인을 옹호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있는 인터넷과 위성방송 등을 통해 중동 국가 여성이 다른 세상 여성의 옷차림이나 생활을 엿볼 기회가 많아졌다. 서구의 여성은 부모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남자친구를 사귀고 또 자의로 결혼 상대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항상 남자에 의존해야 하고 마음대로 남편감을 고를 수가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과 인터넷과 방송에서 보는 이상의 괴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종교와 무관한 악습일 뿐

    명예 살인은 주로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명예 살인을 이슬람교 전통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명예 살인은 이슬람교가 생기기 전부터 수천 년간 내려온 악습이다. 기원전 1790년에 발행된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간통을 저지른 남녀는 참수시켜 죽인다”고 적혀 있다. 기원전 1075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아시리아 법도 “순결을 잃은 처녀의 아버지는 딸을 처벌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통한 여성을 옹호한 집안의 가족 구성원이 박해받았다는 고대 로마 기록도 있다. 이렇듯 명예 살인은 기원전부터 내려오던 나쁜 전통으로 이슬람교와는 상관이 없다. 단지 덜 문명화한 곳에서 발생하는 악습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명예 살인이 몽매하던 시절의 관습이 아니라 이슬람 정신에 밑바탕을 둔 종교 행위라고 오해하지만 이슬람 경전 코란에 명예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살해해도 된다는 구절은 없다.

    이슬람 가정이 아닌 기독교 가정에서도 명예 살인이 일어난다. 2006년 요르단 암만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의 작은 마을에서 17세 소녀 세이라가 아버지와 오빠에게 살해됐다. 우연히 만난 또래 청년의 차를 얻어 탄 것이 화근이었다. 아침에 세이라와 청년이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본 이웃 주민의 제보로 아버지가 그 같은 일을 알게 됐는데, 저녁에 들어온 세이라에게 아버지가 권총을 겨누었으며 오빠가 총을 6발 쏘았다. 그러곤 그녀의 시신을 마을 앞에 내다버렸다. 청년의 차 한번 얻어 탄 죄로 명예 살인 희생자가 된 것이다. 이 가정은 이슬람교가 아닌 기독교를 믿었다. 필자가 사건 한 달 뒤 방문했을 때 동네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인터뷰에 나섰다. 세이라의 이웃인 하세르 마무드는 “시신이 사흘간 동네 입구에 있었다. 나중에 경찰이 치웠지만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세이라 가족이 선택한 것은 딸의 목숨이 아니라 가족의 명예였다. 외간 남자와 단둘이 차를 타고 다닌 딸을 죽이지 않는다면 세이라의 가족 구성원 모두는 동네에서 따돌림당하는 것은 물론 천대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라를 죽임으로써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그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된다. 기독교도인 세이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명예 살인=이슬람교 악습’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힌두교 국가인 인도에서도 명예 살인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카스트’라는 인도 특유의 문화가 명예 살인을 부추긴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도의 신분제인 카스트는 현재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도 사회에서는 아직도 출신 카스트를 따지는 경우가 많은데, 청춘 남녀들이 다른 카스트의 이성과 결혼을 시도하다 명예 살인으로 희생되는 것이다. 2010년 6월 뉴델리에서 전기고문 끝에 10대 남녀가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죽은 여성의 아버지는 딸이 다른 카스트에 속한 남자와 사귀는 것을 반대했고, 같은 카스트에 속한 부동산중개업자와 딸을 강제로 약혼시켰다. 하지만 불타오르는 젊은 청춘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여성의 가족들은 결국 딸의 남자친구를 집으로 불러 인두와 전기로 고문했으며 딸과 남자친구를 모두 숨지게 했다.

    “길어야 6개월 복역한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매년 900명가량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희생되고 있다. 뉴델리 같은 대도시에서도 명예 살인 관습이 근절되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서는 원로들이 가족 동의 없이 결혼 상대를 직접 고른 커플에 대해 가족으로 하여금 살해토록 하기도 한다. 특히 인도 북부지역의 펀자브 주는 명예 살인이 빈번하기로 유명하다. 명예 살인이 사회문제가 되자 명예 살인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내용의 입법이 인도에서 추진되고 있다. 법무부와 내무부 관계자 등으로 이뤄진 정부의 한 위원회가 현행 형법에 명예 살인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면서 특별법안을 마련했다. 법안에 따르면 가족으로부터 명예 살인 위협을 받는 커플은 피난처를 제공받게 되고 명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강한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이 법안은 입법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겪고 있다. 인도 북부지역의 원로들이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수천 년간 내려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다 명예 살인도 ‘살인’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온 반발이다.

    2005년 아프가니스탄 서부도시 헤라트에서는 사랑을 모티프로 한 시집을 냈다는 이유로 여류 시인 라디아 안주만(당시 25세)이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 시는 문학계에서 호평을 받았으나 시인은 죄인이 된 것이다. 그녀의 남편과 가족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으로서 공개적으로 ‘사랑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을 낸 라디아로 인해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여겼다. ‘남녀간 사랑’ 같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간통과 거의 동급으로 파악한 것이다. 결국 남편에 의해 라디아는 명예 살인됐다. 당시 취재차 방문한 헤라트 경찰서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남편은 두 달 동안 감옥에 있다 재판을 받은 뒤 초범이라는 이유로 풀려났다고 했다. 아프가니스탄 법정은 명예 살인에 관대하다. 헤라트 고등법원에서 만난 나시르 하뮨 판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명예 살인은 전통적인 관습이라 법원이 중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필자가 “만약 라디아의 남편이 두 번째 아내도 명예 살인하면 얼마나 복역을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길어야 6개월이다. 20년 판사 생활에 6개월이 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법원은 명예 살인과 일반 살인을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하뮨 판사는 “죽은 사람이 간통을 했다든지 가족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행위를 했다는 것을 피고인이 증언하면 법원에서는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이의 증언을 참고한다는 판사의 말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듯 아프가니스탄에서 명예 살인은 법의 관대함을 등에 업고 대를 잇고 있다. 죽은 라디아의 시집 ‘어두운 꽃(Dark flower)’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 있다.

    “나는 우울과 슬픔에 잠긴 채 새장에 갇혀 있다. 내 날개는 접혀 날 수 없다. 나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 아프가니스탄 여인이다.”

    요르단은 중동에서 개방적인 나라로 손꼽힌다. 여성도 투표할 권리가 있으며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다. 캠퍼스에서 여대생이 마음껏 활보하고 다닐 만큼 성차별이 상대적으로 적다. 아프가니스탄에 비하면 문명국 같은 이 나라도 명예 살인에 대한 처벌이 6개월 이하 징역형이다. 요르단 형법 340조는 ‘아내나 여자형제 또는 친척 여성이 간음하는 현장을 목격해 살해했을 경우에는 면죄 또는 감형을 받는다’고 규정한다. 1999년부터 법률 개정 시도가 끊이지 않지만, 개정안이 아직도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딸과 아내를 살인하더라도 명예 살인이라고 증언하면 곧 풀려난다. 이처럼 법이 명예 살인에 관대하다보니 악습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요르단, 시리아, 모로코는 현재 법적으로 명예 살인에 관대하다. 파키스탄, 터키, 이집트 등은 법으로는 엄히 처벌하게 돼 있지만 실제로는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의 조선 시대에도 명예 살인 비슷한 게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훼손한 여성에게 자결을 권유하지 않았던가.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도 20세기 후반까지 남편이 간통한 부인을 살인하는 관습이 일부지만 남아 있었다. 명예 살인이 일어나는 나라는 한국의 조선 왕조 때 같은 세상을 사는 셈이다.

    미녀 앵커의 죽음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이슬람 국가마다 여성이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 샤리아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이 가장 엄격하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히잡, 니캅, 부르카, 차도르.

    필자가 만나본 명예 살인 가해자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2005년 아프가니스탄 방송 ‘톨로 TV’의 샤리마 레자위라는 여성 앵커가 명예 살인으로 죽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효리’라고 할 만큼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이 여성 앵커는 얼굴을 드러내고 남성 앵커와 단둘이 방송에 나온다는 이유로 오빠에게 명예 살인 당했다. 당시 카불 시내에 있던 샤리마의 집에서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샤리마의 오빠는 생각보다 엘리트였다. 카불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연합군의 공식 통역으로 일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여동생을 죽인 살인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샤리마는 나의 세 누이 중 가장 아름답고 영리했다. 공부도 대학까지 마쳤고 영어도 유창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여성 운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샤리마가 자랑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런데도 여동생을 죽인 까닭은 뭘까? 그는 “샤리마는 방송국에 취직한 후 너무 유명해졌다. 우리 부모님이나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샤리마에게 운전과 영어를 가르쳐준 사람도 바로 나다. 하지만 유명해지면서 샤리마가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쁜 소문이 돌았다. 히잡(이슬람식 머리쓰개)을 짧게 쓰고 나온 날이면 샤리마가 창녀라는 소문이 나고, 방송에 함께 출연하는 남자를 자동차에 태우고 다닌다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사람들이 아버지와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 집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가족을 몰살한다는 협박도 해왔다. 샤리마 밑에 있는 두 여동생의 혼삿길도 막혔다. 사람들은 우리가 샤리마를 죽이고 가족의 명예를 회복할 것을 원했다”라고 말했다. 죽던 날, 그녀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려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한 뒤 막 방문을 나서는 길이었다.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샤리마의 오빠는 두 발의 총알을 그녀 머리에 쏘았다. 샤리마의 부모도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렇게 아프가니스탄의 유명 앵커는 목숨을 잃었다. “샤리마가 죽었다는 것을 알자 이웃들이 다시 우리 가족에게 친절해졌다. 친척 한 사람은 우리를 찾아와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그렇게 우리 집안의 명예가 회복됐다. 가족들은 샤리마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희생함으로써 가족 모두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고 오빠는 덧붙였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냐는 질문에 샤리마의 아버지는 “전혀 없다. 가족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샤리마도 우리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샤리마의 아버지와 오빠는 한 달 남짓 경찰서에 구금됐다가 재판 절차 없이 석방됐다. 이 사건을 처리한 샤다흐라는 이름의 경찰관은 “샤리마의 죽음은 명백한 명예 살인이다. 큰 죄가 아니다.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런 부분까지 개입할 수는 없다. 구금 당시에도 그들은 필요하면 경찰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우리 또한 그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카불 시내에서 무작위로 시민들에게 샤리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전자제품을 파는 오마르는 “당연히 죽어야 했다. 내가 오빠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산부인과 여성 의사 막그답도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게 문제다. 외간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마주하고 방송에 나온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행위다. 샤리마의 죽음은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대답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명예 살인은 범죄가 아니고 그저 관습이다.

    캐나다, 독일에서의 명예 살인

    선진국에서도 이따금 명예 살인이 일어난다. 올해 1월 29일 캐나다에서 2009년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이 뒤늦게 드러났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이민자 모하마드 샤피아(58)와 부인인 투바 마호마드 야흐야(42), 아들 하메드(21)가 2009년 세 딸과 샤피아의 첫째 부인을 살해한 것. 큰딸인 자이납(당시 19세)과 둘째 딸 사하르(당시 17세)가 아버지 허락 없이 남자친구를 사귀었으며, 셋째 딸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고, 인터넷을 즐기는 것이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 킹스턴 인근 운하에서 피살자들을 자동차에 태운 후 다른 자동차로 밀어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캐나다 검찰은 수사기록을 토대로 샤피아가 둘째 부인, 아들과 공모해 이들을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벗어나는 행동으로 가족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명예 살인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 사건을 맡은 로버트 마랭거 판사는 “왜곡된 명예 관념에 따라 무고한 4명의 여성을 무참하게 살해했다”며 “문명사회가 그러한 명예를 인정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가해자들은 1급 살인죄로 가석방이 안 되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2007년 캐나다로 이주했다. 몸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캐나다 시민으로 살았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2002년 이후 현재까지 명예 살인이 13건 발생했다. CNN은 “엄격한 가부장적 관습에 익숙한 이슬람 국가 이민자들이 자유로운 서방 세계에서 가치관 충돌 등의 혼란을 겪어 가족 파괴로 이어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캐나다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명예 살인이 이따금 발생한다. 2008년 5월 함부르크에서는 16세의 아프가니스탄 출신 독일 소녀가 친오빠에게 시내 한가운데에서 처참하게 명예 살인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사건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줬다. 시사잡지 ‘슈피겔’은 이 사건을 스페셜 리포트로 다뤘다. 비극의 주인공은 모살 오바이디라는 이름의 여자다. 모살은 세 살 때 독일로 이민 왔다. 그녀의 기억에 모국 아프가니스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살은 부모가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라는 것을 빼면 평범한 독일 소녀였다. 머리를 염색하고, 짧은 치마를 입는 그녀가 아버지와 오빠의 눈에는 가족의 수치로 여겨졌다. 모살은 아버지와 오빠의 폭행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한 모살이 청소년보호센터로 피신한 적도 있다. 살인이 벌어지기 4일 전엔 구타로 인해 이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자신이 평범한 독일 소녀라고 믿었던 모살은 가족의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베를린으로 도망가려 기차역으로 향하던 중 오빠가 휘두른 칼에 무참히 살해된 것이다.

    모살의 가족은 독일로 이주한 지 13년이 넘도록 왜 독일문화에 적응하지 못했을까?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민자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모살의 아버지 굴람 모하메드 오바이디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그-21 전투기를 조종하던 엘리트 장교이자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친소련 세력이 붕괴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가족을 이끌고 독일로 망명했다. 독일에서 새로운 인생을 계획했으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엘리트 조종사였다고 하더라도 독일에서 구할 수 있는 직업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버스 운전기사를 거쳐 현재는 중고 버스 판매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명색이 미그기 조종사가 상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심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슈피겔은 “독일 이민 후 손상된 자존심 때문에 굴람 모하메드가 5명의 자녀와 아내에게 점점 더 권위적이 됐으며, 가족의 명예에 매달렸다”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모살의 아버지는 더욱더 가족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함부르크에는 2만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이민자가 살고 있지만 이들과 모살의 가족은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모살 가족의 고립감은 더욱 컸다. 아프가니스탄 이민자 사회는 1978년 아프가니스탄 왕조가 붕괴하고 공산당 정부가 수립된 후 망명 온 왕당파, 1989년 이후 탈레반에게 쫓겨난 공산주의자,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유입된 이들이 뒤섞여 있다. 과거의 원수가 한 마을에 이웃하며 사는 꼴이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축소판이라 불릴 만큼 복잡한 이민자 사회가 모살의 아버지를 외롭게 했던 것이다. 슈피겔은 이들 가족이 이민자 사회에 부적응하면서 폐쇄적으로 변해갔으며 그 결과로 명예 살인이라는 극단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이라크인’ 아버지, ‘미국인’딸을 죽이다

    캐나다 독일뿐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등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명예 살인의 대부분이 이민자 가정에서 발생한다. 물론 선진국에서는 살인 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처벌한다. 명예 살인을 한 당사자들은 이런 법 집행에 불만을 나타낸다. 모국에서는 당연한 명예 살인이 왜 이 나라에서는 중죄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앞에 언급한 캐나다 명예 살인의 피고인 부부는 법정에서 끝까지 자신들은 살인자가 아니며 선고가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벌어진 이라크 이민자의 명예 살인 사건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라크 이민자 파렐 하산 알마네키(50)는 2009년 10월 딸 누르 알마네키(20)를 자신의 자동차로 밟았다. 딸은 2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척추수술까지 받았지만 누르는 같은 해 11월 2일 사망했다. 하산은 1990년대 중반 이라크에서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교외로 가족과 함께 이민 와 20여 년을 미국 시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라크인’ 아버지와 ‘미국인’ 딸은 사사건건 의견대립으로 불화를 겪었다. 아버지는 누르가 열일곱 살일 때 이라크로 돌아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딸은 정략결혼을 거부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평범한 미국인으로 성장한 누르에게 정략결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열아홉 살 때 누르는 독립해 자신의 아파트로 이사했으며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의 부모는 집에 돌아올 것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런 누르를 부모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검찰은 법원에 낸 소장에서 “조사결과 피고는 누르가 이라크의 전통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며 “그의 눈에 그녀는 너무 서구화됐으며 가족에게 불명예스러운 존재였다”고 밝혔다. 결국 하산은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그 역시 자신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미국의 법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변호사도 그가 재판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의 딸이 가문의 수치로 여겨져 명예 살인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인데 왜 미국에선 이를 살인죄로 처벌하는지 하산 처지에서는 당최 납득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미국 워싱턴 주에 사는 팔레스타인 이민자 가정의 아이다(18)는 자신이 미국인임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 팔레스타인은 그저 부모가 살았던 나라일 뿐이다. 그런 아이다는 올해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미국 동부에 가려 했다. 학교 성적도 뛰어나 명문대 진학이 가능했다. 하지만 부모가 반대했다. 다 큰 딸이 시집도 가기 전에 외지로 떠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다는 부모의 고집대로 집 근처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아이다의 친척이 소개한 남자와 빠른 속도로 혼담이 오고간 것. 아이다는 미국인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팔레스타인 헤브론에 있는 사촌과 결혼하라는 요구였다. 아이다는 “이 상황이 말이 되느냐. 요즘 세상에 얼굴도 모르는 사촌과 정략결혼이라니. 나는 미국인인데 왜 팔레스타인 전통을 따라야하는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말도 모르고 히잡은 써본 적도 없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친구와 동부로 도망가고 싶지만 아버지에게 잡히면 나는 죽을 것”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이처럼 서구 사회에서 살더라도 이민자 가정은 명예 살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영국인 신부 구하기 작전

    영국에선 최근 유명한 여배우가 명예 살인될 뻔했다. ‘해리포터’ 시리즈 4탄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여주인공 엠마 왓슨의 친구 ‘파드마 파틸’로 나온 여배우 아프샨 아자드(24)는 강제 정혼을 거부하고 이교도인 힌두교 남성과 사귄다는 이유로 감금된 채 아버지와 오빠로부터 명예 살인 협박을 당했다. 그녀의 가족은 이슬람교를 믿는 방글라데시 이민 가정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야프샨을 강제로 방글라데시로 데리고 가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아프샨은 감금된 곳에서 탈출한 뒤 경찰에 구조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아프샨의 아버지, 아불 아자드(56)와 오빠 아슈라프(30)를 살인협박 혐의로 체포했다.

    이렇듯 비록 몸은 서구 사회에 살더라도 자식 결혼은 모국에서 치르려는 이민자 가정의 관습 탓에 ‘구조대’가 결성되기도 한다. 강제 결혼의 마수에 걸려드는 파키스탄계 영국인 여성이 해마다 수백 명씩 발생하자 이슬라마바드 주재 영국 대사관은 직원 4명으로 편성된 ‘영국인 신부 구조대’를 가동하고 있다. 구조대는 강제 결혼으로 신음하는 영국 여성을 파키스탄 시골 마을에서 구해내 영국행 비행기에 태우는 임무를 맡고 있다. 영국 식민지였던 터라 영국으로 이주한 파키스탄인이 많아 강제 결혼 피해자는 주로 영국 여성이지만 북유럽이나 미국의 파키스탄계 이민 2세들도 있다. 런던에 사는 파키스탄계 이민 2세 수잔은 2005년 2월 “사촌언니 결혼식에 다녀오라”는 아버지 말에 혼자 파키스탄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5주 동안 친척집에 머물다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촌언니의 결혼식은 열리지 않았고 친척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수잔을 붙잡았다. 4개월쯤 지나자 비로소 신부는 사촌언니가 아니라 바로 수잔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런던의 아버지와 파키스탄의 친척들이 사전에 신랑감을 정해놓고 그녀를 파키스탄으로 유인한 것이다. 결혼을 남녀가 아닌 가문과 가문의 만남으로 여기는 파키스탄의 전통적 정혼 풍습은 머나먼 영국 땅에 살던 그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친척들과 가족들은 만약 이 결혼을 거부한다면 수잔에게 돌아오는 것은 명예 살인뿐이라고 위협했다. 실제로 삼촌은 그녀에게 권총까지 겨누었다.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정혼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수잔은 청바지와 서구식 옷 대신 전통 의상을 입고 하루 종일 요리와 청소를 해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남자 사촌들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작은 마을에서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명예 살인이 여전히 자행되는 파키스탄 전통 마을에서 수잔의 탈출 시도는 끔찍한 결과를 나을 소지가 컸다.

    수잔은 가까스로 런던의 남자친구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렸고, 남자친구의 신고를 받은 런던의 인권단체는 이슬라마바드의 영국대사관에 수잔의 위치와 연락처를 통보했다. 구조대는 며칠간 그녀의 위치를 추적하고 마을 상황을 살핀 뒤 D데이를 정했다. ‘영국인 신부 구하기 작전’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구조대장인 존 터너 영사는 파키스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무장한 현지 경찰을 대동하고 수잔이 사는 마을로 출동했다. 구조대가 SUV 차량을 그녀의 집 주변에 세우자 미리 연락을 받은 수잔이 도망치듯 집에서 달려 나와 차에 몸을 실었다. 터너 영사는 “가부장적인 파키스탄 전통 사회에선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는 풍습이 남아 있다”며 “영국과 파키스탄 사이의 문화 차이로 애꿎은 여성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된 여성은 통상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옮겨져 한동안 파키스탄 여성단체의 보호를 받으며 지낸다. 그러곤 대사관이 발급한 여권과 비행기표를 받아들고 영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조돼 영국에 돌아간 뒤에도 여성들의 위험은 계속된다. 영국의 부모가 가문에 수치를 안겨준 ‘구조된 딸’을 명예 살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해마다 10명 넘는 여성이 명예 살인으로 희생되기에 안심할 수 없다.

    심리전 수단으로 활용된 강간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북아프리카, 중동의 민주화 시위는 역설적으로 명예 살인을 부채질했다. 지난해 민주화 시위로 친카다피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한창이던 리비아에서 친카다피군이 세 자매를 집단 강간하자, 이를 지켜본 그녀들의 아버지가 명예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세 딸을 살해했다. 세 아이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각각 15세, 17세, 18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은 지난해 6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내과의사 인권보장협회가 리비아 미스라타 지역에 조사관을 보내 입수한 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보고서는 리비아는 인구의 97%가 무슬림이기에 친카다피군은 강간을 심리전 수단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강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를 이유로 아버지에게 명예 살인된 세 자매는 전쟁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다.

    이집트에서도 시위에 참석한 여성에 대한 명예 살인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시위 참가 여성은 수치심을 자극하는 경찰의 진압 방법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살해되는 여성이 적지 않은 이집트에서 처녀성 검사나 성추행이 여성 시위대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경찰은 여성 시위대를 끌어낼 때 일부러 속살이 드러나도록 상의를 집중적으로 잡아당긴다. 카이로에서 활동하는 여성단체 관계자 모나는 “시위 중 브래지어 등이 노출된 여성이 명예 살인 위협을 받곤 한다”고 전했다.

    국제사회에서 명예 살인이 주목받게 된 계기로 작용한 사진이 한 장 있다.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에 코와 귀가 잘린 젊은 여성 얼굴이 실렸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19세 소녀 비비 아이샤로 열두 살 나이에 집안 빚을 갚기 위해 남편 집안에 팔려갔다. 아이샤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다 붙잡혔다. 남편을 버리고 도주한 아이샤는 다행히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코와 귀가 잘려나갔다. 잔혹한 행동을 한 남편과 이를 수수방관하는 아프가니스탄 사회에 비난이 쏟아졌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명예 살인에 대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나바네템 필레이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명예 살인을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극단적인 증세라고 규정하면서 “가장 흔한 폭력의 근원은 가정 내에서 시작된다. 명예 살인은 학대의 극단적 형태 중 하나다. 일부 국가의 사법 체계에서 명예 살인을 처벌하지 않아 문제가 더욱 악화한다”고 말했다. ‘타임’이 표지에 실은 아이샤 사진 덕분에 국제사회가 분노하면서 명예 살인이 자행되는 일부 국가에선 제도적으로 이를 막으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라져야 마땅한 악습인 명예 살인을 근절하려면 처벌과 윤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독일 베를린 시는 2006년부터 7~10학년의 모든 학생에게 윤리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베를린 시가 윤리를 필수과목으로 정한 것엔 2005년 발생한 명예 살인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쿠르드족 이민자 청년이 대낮 베를린 시내에서 이슬람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을 쏴 여동생을 살해했다. 강제로 결혼했다 이혼한 여동생은 자립하려고 직업교육을 받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이뤄진 설문조사에서 무슬림 학생 상당수가 명예 살인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답했다. 베를린 시는 명예 살인은 인권을 유린하는 악습이면서 범죄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성이 죽어야 가족의 명예가 지켜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가족의 한 부속품으로서 여성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