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중국 땅, 북한 노동자 한국인 사장의 불안정한 동거

북·러·중 국경 여행기

  • 김형덕│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 www.facebook.com/atbppc

    입력2014-07-18 16: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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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탈북한 김형덕 씨는 국회 정책보좌관을 거쳐 현재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를 운영한다. 그는 매년 한 차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을 돌며 북한의 경제적 실상을 파악한다. 올해 그의 여정은 중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시작됐다.
    • 최근 북한이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와 경제 협력을 통해 경제 발전의 다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 그가 바라본 북·러·중 국경도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편집자>
    중국 땅, 북한 노동자 한국인 사장의 불안정한 동거

    운남댐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

    북한을 제대로 연구해 올바르게 안내한다는 것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이 결혼이나 자녀 양육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난감한 문제다. 남북관계는 보통의 이웃 국가 관계처럼 자연스럽지 않다. 북한의 체제유지 시스템을 설명하고 근황을 자세히 이해한다는 것은 북한에서 오래 살았거나 수십 년 북한을 연구해온 사람들에게도 난해한 숙제다.

    심지어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 북한에 자유로이 다닌 북한 연구자들조차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기란 어렵다. 북한 정부 차원의 정보 통제, 비밀 유지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남한과 비교해 40년 이상 시대 차이가 있는 북한의 산업 인프라가 그 고충을 더한다. 이들은 그저 중국, 러시아 등에 진출한 북한 노동자들이나 무역일꾼들을 통해 북한의 근황을 유추할 뿐이다. 우리는 심지어 남한의 주요 언론에서 “북한의 권력자가 총살형을 당했다”고 보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북한의 공식 매체에 화려하게 등장한 예를 자주 보지 않았나.

    그렇다고 북한 연구를 멈출 수 없다. 북한에서 태어나 20여 년간 북한을 연구해온 필자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북한 연구의 올바른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최근 북한의 현황을 객관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알리는 것. 판단은 국민 개개인의 몫이다.

    예상외로 쉬운 러시아 입국

    러시아는 북한과 교역을 한다고는 하지만 규모에서 중국보다 많은 편은 아니었다. 북·러 경제 교류는 북한과 맞닿은 국경의 길이만큼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절대적이던 북·중 경제 교류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북한은 러시아와 교류를 확대하려 안간힘을 다한다. 2008년 북·러 철도협정을 체결했고 2011년 8월 러시아 하싼-북한 나선을 오가는 철도가 연결된 것을 통해 북한이 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를 위해 노력함을 알 수 있다. 아마 북한은 특정 국가(중국)와의 경제 교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해 교역 상대를 다변화하려는 것 같다.



    올해부터 한·러 비자협정 덕에 비자 없이 러시아를 방문할 수 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채 3시간도 안 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시설이 오래됐지만 아주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불라디보스토크 시내는 공항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공항 안내 데스크에서 관련 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영어로 소통하기가 어려웠다. 안내 데스크에 근무하는 중년의 러시아 여성은 “당신의 영어 발음을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다행히 공항 외부 버스정류소에서 만난 러시아 청년이 능숙한 영어로 자세한 안내를 해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해 고려인 학생이 알려준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아프터바잘)까지 갔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근처 호텔에 투숙하려 하니 비용이 예상 경비를 초과해 난감했다. 시외버스터미널호텔의 일박 투숙비는 2500루블, 한국 돈으로 7만5000원가량이었다. 나는 대체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 호텔 로비에 있는 여행사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3인의 여자 매니저 중 2명이 영어로 나의 질문에 응대했다. 물론 상당히 기본적인 말만 통했다. 나선행 열차가 있는 하싼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싼까지 가는 기차는 없고 버스로 갈 경우에도 최소 6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일단 그라노스키까지 5시간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국경경비대의 허가를 받아야 하싼에 갈수 있다고 했다. 난 일단 다음 날 그라노스키까지만 가기로 계획하고 하싼에 가는 것은 그라노스키에 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녀들의 협력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안내받았다. 게스트하우스 숙박료는 1500루블, 한국돈 45000원이었다. 일반아파트를 개조해 만든 숙소였다. 주인인 올가 아주머니가 투숙비를 선불로 받았고 아침에 체크아웃 시간을 알려주었다. 영어는 거의 오케이, 노밖에 통하질 않았다. 다행히 보디 랭귀지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만난 북한 노동자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과 경도가 같지만 표준시간은 한국보다 2시간 이르다. 워낙 광대한 나라인지라 한 나라에서도 여러 표준시간대를 사용한다. 숙소는 침식에 필요한 침대와 샤워시설 TV 등이 구비되어 있으나 사워용 비누나 샴푸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짐을 풀고 식사하러 나갔다. 마침 인근에 중국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로서는 사막에서 우물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저녁도 맛있게 먹고. 식당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주변의 기초 정보를 안내해주기는 했지만 내가 가려는 하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했다. 내가 한국인이며 북한 연구자이기 때문에 북·러 국경도시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이지 그 누구도 하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튿날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동안, 나는 러시아 변방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관찰했다.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면모는 참으로 다양했다. 러시아를 백인이 주류인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중국인, 이집트인, 흑인, 아랍인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산다. 러시아연방의 공식 통계로는 200여 민족이 산다고 한다. 특히 눈에 띄는 민족이 중국인이다.

    하싼 인근 도시, 그라노스키로 향하는 버스에서 우연히 북한 사람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한 명을 만났다. 그에게 말을 붙였더니 처음에는 북한 사람 특유의 남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며 회피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의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인의 협공으로 북한 남성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옆에 앉은 러시아인 파벨은 한국말을 배우는 러시아인으로 영어를 좀 했다. 평양에서 온 북한 남성은 목수 기술을 가진 건설 노동자라고 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북한 출신 노동자가 2만여 명이고 고향에는 딸과 아들이 있는데 딸은 교원대학에서 공부하고 아들은 경찰(의경)로 복무 중이라고 했다. 그가 러시아에서 버는 월 소득은 2만5000~3만 루블. 일부는 국가에 바치기 때문에 실제 수령액은 그보다 적다고 했다.

    그는 일반 북한 주민이 그러하듯이 김정은에 대해 “위대한 지도자”라고 했다. 난 “북한 인민의 생각은 그러하겠지만 남한은 자유선거로 옹립되지 않은 지도자는 용인할 수 없고, 세습 지도자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어린 지도자가 부모에 의해 지목되어 갑자기 지도자가 되는 그런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의외로 대꾸가 없이 조용했다. 이미 남한의 사정을 다 안다는 듯.

    통상적으로 북한인은 외국에서 활동할 때 혼자 다니기보다는 여러 명이 함께 다니기 때문에 속 깊은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그나마 장시간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대화가 가능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고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는 내가 가는 그라노스키의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렸다.

    북·러 국경도시의 초라함



    하싼으로 가는 길에 만난 도시들은 인구나 면적이 대개 한국의 면단위 도시만큼 작은 규모였다. 북으로 향하는 철로와 도로, 광활한 초원을 볼 수 있었다. 최근 한국의 일부 기업에서 그곳에 와서 농업과 축산업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라노스키에 도착해 택시기사 발리에라를 만나게 됐다. 발리에라는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하는 전문 운전기사이고 자동차 수리소도 운영한다고 했다. 그는 1500루블에 하싼까지 가겠다고 했다. 차량은 일제 닛산 중고 승합차였다. 차량은 낡았지만 차 안이 아주 깨끗이 관리되어 있었다. 그라노스키에서 하싼까지는 거리가 60km 정도밖에 안 되지만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어서 1시간 30분 이상 걸렸다. 중간 중간에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은특유의 원림과 들판이 인상 깊었다.

    하싼은 북·중 국경도시들에 비하면 아주 작고 초라하다. 군인 가족과 일부 농부 외엔 거주자가 없는 작은 규모의 도시다. 최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중국인, 러시아인은 하싼은 국경도시기 때문에 그라노스키에서 사전에 접근 허가를 받아야만 갈 수 있다고들 했다. 그들의 우려와는 달리 하싼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하싼역은 한국의 작은 시골역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싼까지 철로 상태는 양호했으나 단선에 전기선로망은 갖춰지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조용하고 삼엄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하싼 방문은 싱겁게 종료됐다.

    중국 땅, 북한 노동자 한국인 사장의 불안정한 동거

    운봉댐에서 노는 북한 어린이.

    다음 날 나는 러·중 국경도시인 훈춘(琿春)으로 향했다. 러중 국경이라고 해봐야 한국의 DMZ(비무장지대)와는 사뭇 달라 그저 이웃 마을에 나들이 가는 기분이다. 버스로 중국세관에 도착했으나 입국에 문제가 생겼다. 통상적으로 한국인 관광객은 속초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자루비노 항에 온 후 선상비자를 받거나, 초청자 측의 요청 서류를 통해 중국 입국 비자를 발급받는다고 했다. 나처럼 개인으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있던 나는 마침 훈춘에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지인을 떠올렸다. 그가 중국 측 여행사 직원을 대동하고 세관에 온 덕에 나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훈춘에는 한국의 포항, 속초시청을 비롯해 현대물류, 포스코 등 여러 기관과 기업에서 현지사무소를 두고 북한의 개방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훈춘 지역에서 중국기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북한 인력의 규모는 작년과 유사한 수준이라고 했다. 중국, 북한 모두 교역 관계에서 숨고르기를 하는 듯 보였다.

    북한 중년 여성 노동자의 설움

    훈춘 바로 옆 도시 투먼(圖們) 지역에서 북한 노동자를 500명 정도 고용한 한국인 기업가를 만났다. 투먼은 북한 인력만을 활용해 공단을 운영하는 ‘조선공업원’이 있는 도시다. 그는 법률상 기업 대표는 아니지만 중국인을 내세우고 뒤에서 실질적인 경영을 한다. 현행 남북경제교류 법률상 한국 기업은 북한 인력을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없다. 따라서 법인대표는 중국인을 내세우고 사실상의 자금 운용이나 사업은 한국인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북한 노동력을 활용해 기업을 운영하더라도 중국이나 제3국을 우회해 운영하는 셈이다.

    투먼에서 북한 인력을 오래전부터 고용해온 한 사업가에게 물었다. “중국 노동자도 많은데 하필 왜 북한 인력인가?”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익을 주니까.” 통일을 위한다거나,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돕는다는 명분이 아니었다. “북한 인력을 활용하는 게 이득이 되는가?”라고 묻자 “북한 인력은 북한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관리해주기 때문에 근로안정성이 있고, 초기 훈련기만 지나면 노동생산성도 아주 좋다”고 답했다. 말도 통해 작업지시나 기술전수 등도 용이하단다. 북한 근로자들의 애환을 물었다. 가장 큰 애환은 향수병이라고 했다. 사업가의 말이다. 일단 중국에 오면 한 3년간은 귀국을 못한단다. 1년에 2번 가능하지만 비용 때문에 대부분 귀국을 하지 않는단다.

    “젊은 남녀는 알게 모르게 연애를 하지만 중년 아주머니들은 그마저 못해 힘들어한다. 북한을 떠나면 길게 수년간 남편을 못 만나기 때문이다. 30~40대 중년 기혼 여성들은 한국인이나 조선족 관리인들에게 걸쭉한 성적 농담도 건넨다.”

    탈북자가 줄고 있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 언제 들어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부에서 조사한다고 할까봐 들어가기 싫다”고 답했다. 나는 “한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국정원도 과거처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다루진 못할 것”이라며 오히려 정부를 옹호했다.

    다음 날 나는 옌지(延吉)로 향했다. 옌지에서 오랜 중국인 친구의 별장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의 이야기로는 옌볜으로 오는 탈북자가 크게 줄어들었고 그나마 있는 소수 탈북자도 외진 농촌 지역에서 몰래 숨어 지낸다고 했다. 자신의 친구도 북한 사람을 1만 위안(한화 200만 원가량)을 주고 데려와 산골짜기 인삼밭을 지키는 인력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저녁에 룽징(龍井)에서 이도백화(二道白河) 가는 기차를 탔다. 다음 날 바로 창바이(長白)현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가는 길에 우연히 중국인 친구를 알게 됐다. 그 친구는 지린성 우쑹현 만장(漫江)진에 위치한 장백산자연보호개발구에서 근무하는, 일종의 공무원이었다. 그는 2012년 무렵 한국 연세대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다고 했고,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의 소개로 그가 일하는 단위(회사)에서 운영하는 ‘만강호텔’에서 묵을 수 있었다.

    호텔에 묵는 동안 인근 마을의 중국인 가정을 방문하게 됐다. 슈퍼를 운영하는 가정이었는데,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에 몹시 반갑게 대해주었고, 저녁식사를 함께하기를 청했다. 얼결에 중국인 일반 가정에서 식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10여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탈북자가 꽤 많았고, 이곳을 경유해 옌볜 지역이나 기타 대도시로 가는 일이 흔했다고 했다. 요즘은 탈북자가 거의 없단다.

    다음 날 3시간여 동안 버스를 탄 끝에 창바이현에 도착했다. 북한의 양강도 보천군, 혜산시가 바라보이는 대표적인 밀수·탈북의 도시다. 압록강 수심이 위치에 따라서는 무릎에도 닿지 않는 곳이 많다. 창바이는 망원경이 아니더라도 북한 측 주민의 생활상을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는 북·중 국경 중 몇 안 되는 지역이다. 작년에 비해 건물이 많이 들어서고 건물 벽의 칠(페인트) 색깔이 많이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사람들의 옷차림도 밝고 다양해진 느낌이 들었다. 오후에 바로 압록강 하류를 따라가는 버스를 타고 린장(臨江)으로 향했다.

    중국 땅, 북한 노동자 한국인 사장의 불안정한 동거

    북한의 ‘싼우칭녠둥광(3월5일청년광산)’에 설치된 선전판.

    가는 길에 북한 도시 모습을 계속 살폈다. 김정숙군과 김형직군도 과거보다 외형적으로 많이 밝아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골짜기마다 세워진 선전 간판이 모두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는 간판 문구가 ‘위대한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였는데 지금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로 바뀐 것이다. 린장에서 만난 중국인 왕예디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창바이현에서 압록강변에 사는 중국인 일가족 살인 사건이 있었다고 했고, 이를 두고 국경지역의 대다수 중국인은 북한인의 소행으로 본다고 했다. 공안에서 각 숙박업소에 보낸 통지서도 함께 보여주었다.

    화려한 북한 광산

    다시 북·중 국경을 따라가는 도중에 놀랄 만한 마을을 발견했다. 여태까지 북·중 국경에서는 보지 못한 그런 광경이었다. 린장의 맞은편 북한지역은 자강도 중강군으로 그리 큰 도시가 아니다. 그럼에도 새롭게 공장과 마을을 북한 특유의 방식으로 가지런히 지어놓아 잘 관리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말로 ‘싼우칭녠둥광(3월5일청년광산)’이다.

    북·중 국경 도시를 비교해보면 중국은 대체로 거대하고 화려한 대신 북한은 소박해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곳은 정반대로 북한 쪽이 더 화려하고 밝은 모습이었다. 북한은 왜 중국 작은 시골마을 건너편에 신도시를 건설한 걸까. 린장시는 인구 18만의 큰 도시이기 때문에 림강시 맞은편에 바로 그런 신도시를 건설하더라도 빛을 보기 어려운 점을 감안한 북한 측의 결정이 아닐까. 이번 여행의 새로운 발견이다. 북한의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도 이 광산에 대해 김정일-김정은 시대의 성과로 내세우며 적극 홍보하는 점을 볼 때 그 나름의 실제적 성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택시를 타고 압록강 하류로 진행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압록강변을 따라가는 강변길이 수리 중이어서 산길을 돌아가야 한단다. 린장에서 함께 온 중국 택시기사가 자신은 산길을 모른다며 여기서 그만 가겠다고 한다. 목적지 지안시까지는 아직 200km를 더 가야 하는데. 이 지역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린장에서 데려온 운전기사를 돌려보냈다.

    지역 택시기사와 함께 산길을 계속 달려서 지안까지 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산길이 마치 터널이 뚫리기 전의 한계령과 아주 흡사했다. 산꼭대기에 화전민과 광산민이 여럿 살고 있고 지나가는 차량을 일일이 검사했다. 그곳은 주로 금광을 채굴하는 지역이라고 했다.

    3시간을 달려서 지안(集安)시 근처 운봉(雲峰)댐에 도착했다. 운봉댐은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발전소로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다행히 난 택시기사의 재치 있는 협력으로 중국인 관광객으로 둔갑한 채 문표를 사서 운봉댐 상판에 올라갈 수 있었다. 운봉댐 상판은 북·중 공동으로 운영하지만 상판을 걸어 북한 측 초소(상판 끝) 20m 앞까지 갈수 있다. 몇 걸음만 더 내 디디면 사실상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는 셈이다. 다리로 이어진 북·중 국경도시 어디에도 이런 방식의 관광을 허용하는 곳은 없다. 댐 중간 중간에 북한 근로자들을 만나 대화도 가능하다.

    운봉댐의 위태로운 대화

    대화 말미에 그들은 담배나 돈을 건네주기를 요청한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잔돈과 담배는 자연스럽게 북한 노동자들의 몫이 된다. 그들과 대화해본 적 있다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일급은 중국돈 1위안 수준. 주 6일 근무인 북한 근로 상황으로 미루어 그들의 월 급여는 중국돈 25위안, 4000원 정도인 셈이다.

    내가 “한국인을 보았느냐”고 묻자 북한 노동자들은 “못 보았다”고 답했다. 이어 “일이 힘드냐?”고 물으니 “일없시오(괜찮다)” 했다. 한국이라고 말하는데 한국이라고 대꾸하는 걸 봐서는 남한의 소식을 전혀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보통 북한에서 한국은 공식적으로 남조선이라고 한다.

    길지는 않지만 짜릿한 대화와 만남을 뒤로하고 우린 지안시로 돌아왔다. 지안시는 북한 자강도 만포시와 연결된 도시로, 지난해에 교역 확대를 위해 신대교를 건설했다. 중국이 자본과 자재를, 북한이 인력을 대서 불과 몇 달 만에 왕복 2차선 대교를 건설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직 개통을 하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 관계가 마냥 확대일로에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중국 땅, 북한 노동자 한국인 사장의 불안정한 동거
    김형덕

    1974년 북한 자강도 희천 출생

    1993년 탈북,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국회 정책비서관, 대성그룹 기획팀 근무

    現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


    중국과 북한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한·미·일의 줄기찬 요구에도 교역을 확대해왔는데, 올해부터는 침체기에 접어든 듯 보인다. 북한은 북한대로 중국에 지나친,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경제적 의존이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중국 역시 북한의 성장이 자신들의 국익에 마냥 부합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 듯하다. 이처럼 중국과 북한,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얽혀 국경도시에는 정중동(靜中動)의 변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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