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어른들을 위한 리뷰

소설의 승자가 최명길이면 영화의 승자는 김상헌이다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 ‘남한산성’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7-10-2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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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적으로 한 번은 희극적으로.

    첫 문장은 헤겔이 한 말이다. 두 번째 문장은 마르크스가 덧붙인 말이다. 프랑스 혁명군주 나폴레옹과 그의 조카를 자처하며 절대왕정을 꿈꾼 나폴레옹 3세를 비교하면서 한 말이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도 이와 같은 예를 여럿 찾을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아비(태조)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형제를 도륙해가며 절대왕권을 구축한 태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인 아비(세종)의 유언을 짓밟고 형제는 물론 조카까지 죽인 세조라는 열등한 클론으로 반복된다. 태종이 성군 세종의 시대를 준비했다면 세조는 그보다 살짝 열등한 클론 성종의 시대를 연다. 이 성종 역시 또 다른 클론을 낳게 되니 바로 숙종이다. 성종이 낯짝만 보고 마누라 삼은 여인을 질투가 심하다고 사약을 먹여 죽여버린 폐비 윤씨 사건은 숙종의 희빈 장씨 사건으로 되풀이된다.

    이런 조선왕조의 가장 유명한 데칼코마니는 아마도 연산군과 광해군일 것이다. 조선 임금 중 유이(唯二)하게 묘호를 받지 못해 폭군의 대명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은 ‘탈주의 정치’를 펼치다 막판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반정(反正)의 기치를 들고 나선 신하들 손에 의해 제거됐다는 점을 제외하면 많이 다르다. 연산이 르상티망(원한)의 정치로 질주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이라면 광해는 사대주의와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선 정치의 덫에 걸린 불운한 군주였다.

    최악의 닮은꼴은 선조와 인조다. 국제정세를 오판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양대 병란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위기 대처 능력이 최악인 ‘못난이 군주’라는 점에서 그렇다. 심지어 임진왜란이 6년 뒤 정유재란으로 반복됐듯이 병자호란은 그보다 9년 앞서 벌어진 정묘호란의 재판이었다.



    둘 다 정통성이 약하다는 콤플렉스가 강했다는 점도 닮았다.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조선왕조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란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특히 임란 와중에 백성을 버리고 명으로 내빼려한 열등감으로 인해 이순신과 곽재우 같은 임란의 전쟁영웅을 질시했을 뿐 아니라 역모의 덫을 놓기 일쑤였다. 그 손자인 인조 역시 열등감의 화신이었다. 삼촌인 광해군의 왕좌를 뺏을 때 내세운 친명배금(親明排金)의 기치가 병자호란 이후 휴지 조각이 돼버리자 언제 옥좌를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에 전전긍긍했다.



    비극적 선조, 희극적 인조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군자를 표방했지만 이기적 욕망에 충실한 소인이란 공통점도 지닌다. 똑같이 정비를 둘씩 뒀는데 선조가 50세, 인조가 43세 때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장가간 두 번째 왕비의 나이가 각각 18세와 16세였다. 여기엔 회춘에 대한 욕망도 컸지만 모두 자신이 책봉한 세자를 증오한 나머지 늦장가를 가서라도 원자를 낳아 왕좌에 앉히려는 정치적 노욕도 작동했다.

    이는 나란히 패륜의 비극을 초래했다. 선조의 세자였던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후 겨우 여덟 살밖에 안 된 배다른 동생(영창대군)을 죽이고 새어머니(인목대비)를 유폐한다. 인조는 그 자신이 스스로 패륜을 저지른다. 사실상 자기 대신 청에 볼모로 끌려갔다 9년 만에 돌아온 장남(소현세자)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모자라 며느리 강빈을 사약을 먹여 죽였고, 손자 셋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린다.

    집권 초 사림의 인재를 대거 기용하며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찬사까지 들었던 선조의 실패에선 비극의 냄새가 풍긴다. 하지만 재위 내내 ‘우물 안 개구리’식 블랙코미디로 일관한 인조의 실패에 대해선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은 이 ‘희대의 못난이 클론’을 겨냥한 양날의 검이다. ‘칼의 노래’는 주인공 이순신이 충성을 바친 선조가 얼마나 의심이 많고 변덕스러운 군주였는지 절절히 노래한다. ‘남한산성’은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이 치열한 쟁론을 펼치며 지키려 한 인조가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군주였는지 그의 언행을 담은 기록을 통해 고발한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의 메시지는 동일하다. 이순신이 칼로써, 김상헌과 최명길이 말로써 지키려 한 종묘사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그들이 지켜내려 한 것은 그 허망한 종묘사직이 아니라 이 땅의 민초 아닌가.


    영화가 놓친 10%

    11일의 추석 연휴 기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는 소설의 다성(多聲) 구조를 카메라에 충실히 담아냈다. 47일간 나라의 운명이 갇힌 남한산성을 무대 삼아 무수한 에피소드를 압축하는 데 성공했다.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는 등장인물에 카메라를 골고루 가져대며.

    현실주의자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이상주의자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조(박해일),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지만 패배를 막을 수 없는 군인 이시백(박희순), 민초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천민 출신으로 출세욕과 복수심에 불타는 청의 역관 정명수(조우진), 그리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어린 계집 같은 조선의 봄’을 상징하는 나루(조아인)까지. 이야기 전개를 11개 장으로 나누고, 그 무대가 되는 남한산성의 풍광을 실감 있게 표현하고, 스펙터클하게 재현한 전투 장면과 사카모토 류이치의 웅장하면서도 애틋한 음악으로 긴장감을 한껏 부여한 덕분이다.

    기자가 보기에 영화는 원작에 80%가량 충실하다. 나머지 20% 중 10%는 놓쳐서 안 될 것을 놓쳤다고 한다면 10%는 원작의 한계를 뚫은 영화만의 예술적 성취다.

    놓친 10%는 바로 앞에서 말한 인조의 비루함 내지 절망적 희극성이다. 소설 속 인조는 명분과 실리,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치명적 결정장애에 시달리는 지도자다. 인조는 임진왜란 때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을 명이 새로 세워줬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론과 주자학적 중화주의 이념의 무동을 타고 왕위에 올라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호랑이(청) 등에 올라타기엔 역부족이라 온통 가시밭길만 걷게 되자 이를 모두 신하들 탓으로 돌리기 바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인조 역을 맡은 박해일은 우유부단하다기보다는 진중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명분(김상헌)과 현실(최명길)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번민하는 군주다. 그래서 마땅히 인조의 몫이 돼야 할 현실인식 부족과 판단착오, 책임회피는 영의정 김류(송영창)를 필두로 한 다른 신하들 몫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압도적 카리스마를 지닌 홍타이지의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 희화화될 경우 극적 긴장감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인조의 변명에 포섭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는 김류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란 점에서 두 사람이 공동운명체였다는 점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듯 병법의 기본도 몰라 군병을 사지로 몰아넣는 김류에게 전시 총사령관 체찰사 직위를 맡긴 사람이 바로 인조다. 둘째는 병자호란이 그 전초전 격인 정묘호란 발생 9년 뒤에 발발했다는 점이다.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한 뒤 복수혈전에 착수하기까지 걸린 세월이 10년이었음을 감안할 때 실로 무색해지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소설을 뛰어넘은 10%

    원작의 한계를 뛰어넘은 10%는 바로 김상헌의 재창조다. 대부분의 관객은 소설을 통해 익히 알려진 최명길과 김상헌의 가파른 말의 대결을 영상으로 마주하면서 짜릿함을 느꼈을 것이다. 최명길 역의 이병헌은 간곡한 눈빛과 호소력 짙은 음성으로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 외로이 만고의 역적이란 지탄까지 감내하려는 대장부의 모습을 그려냈다. 김상헌 역의 김윤석은 꺾일지언정 결코 굽히지 않는 선비 정신을 뜨거운 숯을 품은 차가운 얼음 연기로 펼쳐냈다.

    둘의 대결이 아무리 팽팽했다 해도 당시로선 최명길의 선택 외에 길이 없었음을 안다. 그런데 그 둘의 말과 사유가 칼춤을 추며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지점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이후는 스포일러 포함)

    김상헌의 입에서 “한 나라의 국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시려 하옵니까”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신은 차마 그런 임금을 받들지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라고까지 말한다.

    김상헌의 입에서 나온 적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발언이다. 사서는 물론 소설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초역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김상헌의 진가는 최명길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대목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렇게 목숨을 보존해 무엇 하려냐는 김상헌의 질문에 최명길은 “백성과 함께 새로운 날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자 김상헌은 “진정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말이오. 그것이 이 성안에서 내가 깨달은 것이오”라고 반박한다. 한마디로 조선왕조가 한계에 이르렀다면 차라리 깨끗이 멸망하는 게 낫다는 자기초월적 깨달음의 경지를 열어젖힌다. 이를 통해 김상헌은 비로소 최명길의 진정한 맞수로 떠오른다.

    이런 설정은 초반부 김상헌이 남한산성까지 길 안내를 맡은 뱃사공을 칼로 베면서까지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던 장면과 그 뱃사공의 어린 손녀딸(소설에선 딸)인 나루가 남한산성에 찾아들자 심한 죄의식을 느끼는 장면과 공명하면서 깊은 울림을 빚어낸다. 미천한 신분의 서날쇠를 통해 민초의 지혜와 자생력을 깨치게 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심층적 성찰에 도달한 김상헌은 삼전도의 치욕이 벌어지는 순간 뱃사공을 벤 그 칼로 자신을 베어낸다.

    역사적 사실과도 다르고 소설에도 없는 내용이다. 실제의 김상헌은 삼전도의 치욕 때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았고 훗날 청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 최명길과 다시 조우한다.

    이를 역사 왜곡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소설이 열어젖힌 심연 속으로 한발 더 깊숙이 들어가 일궈낸 예술적 성취라 해야 마땅하다. 역사와 소설 아래 잠자고 있던 무의식과도 같은 진실을 섬뜩한 방식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진정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 수명을 다하고 명멸할 때다. 그 순간 순교를 통해 찬란히 소멸할 때 불사조처럼 부활할 길이 비로소 열린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는 이후 최명길을 비루하다 지탄하고 김상헌을 올곧다 상찬하면서도 이 도저한 깨달음엔 이르지 못했다. 공허한 언변의 세계를 맴돌 뿐 진정한 실천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했다. ‘삼전도의 치욕’ 이후 280년간 지속된 조선이 ‘허깨비의 나라’로 전락한 이유도 거기에 숨어 있지 않을까. 임박한 북핵 위협 앞에서 대한민국 역시 공허한 언변의 세계에만 침잠해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영화가 열어놓은 역사의 심연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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