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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⑧

꿈꾸는 절간 운주사 가는 길

전라도 화순

  • 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꿈꾸는 절간 운주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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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중략)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무진기행’(김승옥 작)의 ‘무진’, ‘삼포 가는 길’(황석영 작)의 ‘삼포’ 등 작가들은 가상의 지명들마저 잘도 지어낸다. 둘레의 풍경까지 그럴싸하게 그려놓아 남녘 길을 걷다보면 금세라도 무진이며 삼포에 닿을 것만 같다. 사평역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가상의 땅에 있는 가상의 역이지만 사평역은 강원도 산골에서, 충청도 강기슭에서 쉬 마주할 수 있을 듯한 살갑고 고단한 정취를 풍긴다.

창밖으로 눈송이가 분분히 떨어지는 겨울밤, 톱밥난로 하나가 간신히 냉기를 지우고 있는 대합실 나무의자에는 막차를 기다리는, 가난한 손님들이 졸며, 기침을 하며 앉아 있다. 이들 모두는 벌써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시에서 그려지는 사평역은 우리 삶의 바다에 떠 있는 부표 같은 존재론적 공간인데 지금도 내 이웃은 물론 나 스스로 어느 한때 이곳에서 탄식하고 한숨 쉬며 남몰래 눈물을 흘린 기억들을 더듬어 새겨주는 회억의 공간으로 환치돼 있다.

시를 거느린 간이역

이 시가 담고 있는 내면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보여주는 것이 임철우의 단편소설 ‘사평역’이다. 소설에 이르면, 비로소 난로에 톱밥을 넣는 이는 늙은 역장이며 기침을 하는 이는 아들의 부축을 받아 대처의 병원으로 가고자 하는 농사꾼이다. 대합실의 모두가 각각의 성명과 과거를 지닌 개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밖에도 대합실에는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사내가 있는가 하면 운동권 학생도 있다. 이들 개인이 가진 스산한 삶의 양상들은 대합실 한 공간에 밀집되었다가 바깥으로 분리 확산된다. 시와 소설의 언어가 여하히 다른지를 알아보고자 할 때 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만큼 유익하고 재미있는 경우는 드물다.

허구의 리얼리티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현실의 사평역을 찾아 길을 떠난다. 전라도 나주의 남평역이 그곳이다. 광주에서 세 정거장, 통일호 열차로 40분 남짓 걸리는 그곳의 역은 파란 함석지붕에 성냥갑 같은 모양을 한 전형적인 간이역이다. 봄날 하오, 인적 드문 역의 뜰에는 환한 햇살만 가득하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굳이 이 먼 데를 찾아와서 목조 역 건물 곁으로 소나무들이 한가롭게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추억을 만들고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남평역 자체가 문화의 한 명소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필자 또한 화순 운주사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역인데 내친김에 ‘드들강’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며 강바람을 쐬고 싶다.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를, 이곳 사람들은 드들강이라고 부르는데 역에서 차로 1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다. 소박한 풍경이 정겹고 강가 음식점의 물고기 맛이 유혹적이지만 갈 길이 멀어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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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우송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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