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시장에 진출한 국산 애니메이션 ‘빠삐에 친구’와 ‘다이노맘’(왼쪽부터).
2월 초 열린 대통령과 경제인 간의 간담회 자리. 양지혜 ㈜캐릭터플랜 대표는 대통령을 향해 문화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고충을 호소했다. “다들 좋은 얘기만 하는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나 싶어 목소리가 떨리고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래도 할 말을 하고 나니 홀가분하다”는 그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업계의 스타 제작자다. 1995년 캐릭터플랜을 세운 뒤 ‘망치’ 등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빠삐에 친구’는 2006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애니메이션 우수파일럿 제작지원 사업 선정을 시작으로 2007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스타프로젝트 당선, 2008년 대한민국애니메이션대상 대통령상 수상, 2010년 서울시·EBS 공동주최 애니프론티어 당선 등 큰 상을 휩쓸었다. 2008년 6월부터 EBS와 프랑스 France5 채널을 통해 방송되며 대중적인 인기도 얻었다. 양 대표가 간담회 자리에 참석한 것은 문화 콘텐츠 제작자로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10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 악성 채무자다. 양 대표는 “방송용 애니메이션의 경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바로 수익이 생기는 게 아니다. 캐릭터 판매 등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투자자는 당장 돈을 갚으라고 압박한다. 애초에 3년 만기로 채권을 발행했으니 이제 갚으라는 거다. 만기보장수익률 9%도 매 3개월 복리로 꼬박꼬박 부과한다. 이자는 나날이 늘고, 조정의 여지도 없다. 좋은 콘텐츠가 태어나 세상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나는 빚에 쫓긴다. 정부 자금이 들어간 펀드가 이럴 수 있나. 내가 사채를 빌려 쓴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며 고개를 떨궜다. 목소리가 떨렸다.
“빌릴 때는 급했구먼”
“대통령께서 제 말씀을 듣더니 웃으시며 ‘빌릴 때는 급했구먼’ 하시더군요. 정확한 말씀이에요. 빌릴 때 급했던 거죠.”
2008년의 일이다. 프랑스 애니메이션 제작사 문스쿱과 ‘빠삐에 친구’ 공동 제작 계약을 맺은 양 대표는 양국 교육방송 채널의 편성까지 확정한 뒤에도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각종 공모전에서 우수 콘텐츠로 선정되고 지원금도 받았지만,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에 선뜻 제작비를 대는 투자자는 찾기 어려웠다. 그때 한 벤처 캐피털이 손을 내밀었다. 모태펀드 문화계정이 출자한 보스톤영상콘텐츠전문투자조합(이하 보스톤조합)이다.
모태펀드는 ‘펀드에 대한 펀드(Fund of Funds)’로, 2005년 정부가 벤처 투자 활성화를 위해 조성한 정책자금을 가리키는 말. 고위험 산업에 대한 일반 투자자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민간 창업투자사가 만든 투자조합(자식펀드)에 자금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이 중 문화계정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산업진흥 및 경쟁력 있는 콘텐츠 육성·개발을 목적으로 출자한 것이다. 이 자금을 받은 조합은 콘텐츠 제작사 지원 및 프로젝트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보스톤조합도 결성금액 187억 원 중 모태펀드 출자액이 51억 원에 달하는 자식펀드다. 양 대표는 “‘빠삐에 친구’를 방송하기로 한 EBS도 이 펀드에 출자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투자를 받으면 우리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스톤조합이 제시한 투자 조건은 예상과 달랐다. 콘텐츠 제작으로 인한 이익과 손실을 투자자가 제작사와 함께 부담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신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요구했다. BW는 미리 약정한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으로, 투자자는 원금과 만기보장수익률에 근거한 이자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 주식 가격이 오를 경우 그에 대한 이득도 얻을 수 있다. 물론 경영 실적이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의 BW에 투자하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양 대표는 “보스톤조합이 채권의 만기보장수익률을 연 9%로 하고, 상환만기일을 어길 경우 부담해야 하는 연체이자율을 연 25%로 한 것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