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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날, 허균이 남긴 미래 책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최후의 날, 허균이 남긴 미래 책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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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한양 이화방 골목길을 이리저리 쓸며 구르던 가을, 그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낯선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이화방 구석에 자리 잡은 허균의 외손 이필진의 집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목표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대문을 반쯤 연 하인이 빠끔히 얼굴만 내밀고 손님에게 물었다.

“야심한 시각에 뉘신지요? 보시다시피 부유한 형편이 아닌지라 묵어가실 집이 필요하시다면 다른 델 알아보십쇼.”

하인을 지긋이 노려보던 사내가 낮게 깔리는 중저음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 성균관 직강 백세출이라 한다. 백 직강이 왔다 전하거라.”



화들짝 놀란 하인이 문을 활짝 열어 세출을 안으로 들이고는 안채를 향해 뛰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하인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어서 드시지요. 서재로 모시겠습니다요.”

서재로 들어선 세출은 자신을 맞으려 일어선 필진을 향해 성큼 다가가 가볍게 끌어안았다. 둘은 그런 자세로 잠시 서 있었다. 이윽고 필진이 몸을 뒤로 물리며 입을 뗐다.

“직강이 되셨군요. 경하드립니다. 어서 좌정하시지요.”

상석에 앉은 세출이 땅 밑에서 울려오는 듯한 굵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어디 성균관을 박차고 나가 다른 살길은 발견했느냐?”

필진이 목멘 음성으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역적의 외손 주제에 무슨 좋은 길이 있겠습니까? 벼슬길 포기한 순간 다 포기한 셈입니다.”

필진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몰아쉰 세출이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과거를 포기한 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문제는 차차 논의하기로 하고, 실은 다른 문제로 널 찾았다.”

“무슨 일이시온지?”

“네 외조부 허균 선생 문집 말이다. 그 원고를 봤으면 싶다.”

사라진 원고

허균이 반역의 수괴로 몰려 처형당하자 그의 가문은 멸문의 화를 면치 못했다. 집과 토지는 물론 가노들까지 몰수돼 정권 실세들에게 분배됐다. 증거도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속히 처결된 이 희대의 역모 사건은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지만, 여전히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두 사람이 있었다. 허균 처형을 부추기고 심지어 은밀히 교사한 정권 실세 이이첨과 이 무리한 처형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인 광해군이다.

허균과 어릴 적 친구이던 이이첨은 광해군을 쥐락펴락하던 대북 정권의 수장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접근해 빌붙은 허균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만큼 이용해 먹다가 상대의 위세가 점점 자신을 위협할 기미를 보이자 음험한 숙청의 칼을 빼들었다. 광해군은 이이첨이 꾸민 이 모략의 실체를 충분히 눈치챘음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이이첨 편에 서버렸다.

이이첨과 광해군은 허균이 처형되기 오래전 스스로 완성해 자신의 집에 보관했다는 문집 원고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원고는 감쪽같이 사라져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문집의 명칭이 ‘성소부부고’라는 것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건만 이상하게도 실물을 본 사람이 없었다. 허균이 죽기 전 은밀히 감췄다 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충분한 심리를 건너뛰면서까지 급히 집행한 처형이 못내 찝찝했고 그 전말이 당사자인 허균의 손에 의해 기록돼 먼 훗날 세상에 밝혀질까 노심초사했다. 이이첨 역시 뒤미처 허균의 고백록이 세상에 등장해 역으로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상황을 염려해야 했다. 두 사람은 서인들이 주동이 돼 일으킨 반정으로 몰락하기 직전까지 허균 문집을 추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성소부부고

“성소부부고는 제 손에 없습니다.”

필진이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세출의 얼굴을 흘낏 노려봤다.

“이미 지난 왕 때의 일이다. 이젠 솔직히 털어놓아도 된다! 허균 선생께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기는 선비가 더 많은 걸 너도 알지 않느냐?”

눈을 내리깔고 오래 망설이던 필진이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천지 사이의 한 괴물이었다 여기는 자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사람에겐 공과 과가 있게 마련이지요. 외조부께선 공은 축소되고 과만 부풀려진 경우라 하겠습니다.”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영창대군을 제거하려 하셨던 건 어떠하냐? 비록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이용당하셨다 해도 그건 지나친 처사였다.”

“똑같은 의론을 일으켰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중 누가 역적 취급을 당했습니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고변과 소문만으로 조정 중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인 사례가 어느 나라에 있었습니까?”

메마른 바람이 들이치는 창가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출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처형의 시말은 나 역시 잘은 모른다. 혼군이었던 광해군의 사냥개 노릇을 하셨던 게 화근이었겠지. 이미 이이첨이라는 큰 사냥개가 있는데 또 다른 사냥개가 더 필요하진 않았을 게다. 아무튼 세상은 바뀌었고 너도 슬슬 과거 준비를 해도 된다.”

“과거는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외조부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돼 역적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는 한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모욕당할 일은 없습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외조부의 복권을 위해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실록청에 제대로 남은 기록이 없는 마당에 성소부부고는 정말 귀한 사료가 될 것이다.”

처형 전날

처형되기 전날, 의금부 옥사에 누워 있던 허균을 총 세 명이 면회했다. 첫 방문자는 이이첨이 보낸 심부름꾼인 가노 물금이었다. 물금은 포졸들을 멀찌감치 물리고 이렇게 속삭였다.

“다음과 같이 전하라 하셨습니다. 내일 인정전에서 왕이 자비를 베풀 예정이다. 무고한 역모죄는 증좌도 없으니 사면될 것이다. 대신 허황된 말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죄는 벗어나기 어려우니 변방에 위리안치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돌아오게 될 터이니 염려 마라. 이상입니다.”

이첨의 가노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허균이 천천히 물었다.

“어디로 위리안치 된다는 얘기는 없었느냐?”

난처한 표정이 된 물금이 어개를 으쓱대더니 대답했다.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창덕궁에서 국문하는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역모의 죄상이 모호하니 더 진행할 이유가 없다 하셨습니다.”

물금이 떠나고 난 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허균 앞으로 두 번째 방문자가 나타났다. 자식처럼 아끼던 노비 돌이였다. 돌이는 말없이 흐느끼며 상처에 바를 연고를 건넸다. 연고를 옥사 바닥에 팽개친 허균이 말했다.

“이 따위가 뭐가 중하더냐? 어디 이이첨이 주변 소식은 가져왔느냐? 도대체 놈의 꿍꿍이가 뭐라더냐?”

목소리를 잔뜩 낮춘 돌이가 허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이첨 그 작자가 골이 잔뜩 나 있답니다. 그 집안 노비들이 하는 얘깁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영감님을 해코지하려 든다더군요.”

“그건 나도 안다. 당장 내일 날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드는지 그게 알고 싶은 거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아야 반격 시점을 잡지.”

마른 침을 삼킨 돌이가 목소리를 더 낮춰 대답했다.

“내일 인정전 국문장에서 어떤 결정이 날지는 임금님만 아신답니다. 이이첨이 그자는 영감님을 중상모략한 자들과 틀림없이 한패입니다. 어떤 말도 믿지 마십시오. 한데, 임금님 생각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다를까?”

“이이첨을 견제하려면 영감님이 꼭 필요하지 않으실까요? 이이첨이 영감님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유도 임금님께서 총애를 영감님께로 옮길까 봐 겁이 나서 그러는 겁니다. 이번 고비만 잘 넘기십시오! 이이첨에게 복수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미완의 원고

마침내 성소부부고를 받아든 세출이 원고를 순서에 따라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도 성화를 하셔서 보여드리기는 합니다만, 출간 시점은 제 손으로 정합니다. 그 점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인 세출이 열심히 원고를 넘겨나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 마침내 원고 검토를 마친 그가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고는 이게 전부인가?”

떨떠름한 눈빛이 된 필진이 대답했다.

“뭐가 불만이십니까? 외조부께서 위기에 처하셨을 때 저희 집으로 은밀히 옮겨졌던 원고 그대로입니다. 더 보태거나 뺀 건 없습니다.”

원고를 주인에게 돌려주며 세출이 팔짱을 꼈다. 깊은 한숨을 몰아쉰 그가 마침내 입을 뗐다.

“이건 미완의 원고다. 허균 선생 말년의 저작들 대부분이 누락돼 있어. 자네가 지니고 있는 이 원고, 실은 이이첨과 광해군도 한때 손에 넣었었다.”

놀란 표정이 된 필진이 급히 물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이게 유일한 필사본입니다. 다른 별본이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크게 고개를 끄덕인 세출이 특유의 저음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다. 적어도 셋 이상의 동일한 정사본이 존재했었다. 이 원고를 제외한 나머지 두 별본을 광해군과 이이첨이도 입수했었지.”

“입수해서요? 어찌했습니까?”

“한 부는 태워버리고 나머지 한 부는 내각 서고에 숨겨뒀었다. 그러다 반정이 일어났고 미처 원고를 없앨 틈도 없이 둘 다 목숨을 잃었지.”

“직강께서 그걸 서고에서 발견하셨군요?”

세출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견한 건 내가 아니다.”

“그럼 누굽니까?”

“바로 지금의 임금님이시다!”

인조의 독대

성균관 박사 백세출이 직강으로 승진한 다음 날, 예고도 없이 임금의 호출이 떨어졌다. 창덕궁에 들어선 세출은 그제야 자신이 임금과 독대한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커다란 의문을 품은 채 인정전 안으로 들어선 그는 창백한 초승달처럼 여윈 젊은 왕을 마주했다.

“백 직강을 부른 이유를 이제 말하겠소. 하지만 그전에 허심탄회하게 내 본심을 드러내려 하오.”

세출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임금이 말을 이었다.

“부덕한 내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지 여러 해가 지났소. 그러나 민심은 아직 모이지 않았고 후금은 나를 반역자라 부르며 쳐들어오겠다며 겁박하고 있소, 위태로운 상황이오.”

잠시 숨을 고른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외세 문제야 어쩔 수 없더라도, 폭군이자 암군이었던 광해의 흔적만은 깨끗이 지우고 싶소.”

잔뜩 긴장한 세출이 비로소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전하의 뜻은 잘 알겠나이다. 소신이 할 일을 하교하여 주소서.”

용상 앞으로 몸을 잔뜩 기울인 왕이 다소 경박한 어투로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이이첨이 이끌던 대북파 무리들이 여전히 조정에 암약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난 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거요. 불안하고 또 불안하오. 그래서 이이첨 주변을 샅샅이 뒤져 화근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싶소.”

“등극하실 때 이미 일망타진하시지 않았사옵니까?”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은 왕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아니요! 그건 모를 일이오! 이이첨 그놈이 어떤 놈이오? 거대한 이무기 같은 귀물 아니오? 그놈을 따르던 그 수많은 악귀를 어찌 다 가려 없앨 수 있었다 장담하오? 필시 잔당들이 있을 거요. 그래서 승정원과 내각 서고 기록을 이 잡듯이 뒤져 협력했던 자들 명단을 새로 뽑고 있소.”

세출은 멍한 표정으로 임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 직강! 그래서 말인데, 역도 허균의 문집을 서고에서 발견했소. 이이첨 무리가 별고에 숨겨뒀더이다. 한데, 한데 말이요.”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이까?”

“아무리 살펴도 옥사 전후를 기록한 내용이 없소! 내 알아보니 허균은 죽기 직전까지 문집을 계속 증보하고 있었다 하오. 그렇다면 필시 이이첨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렇긴 하옵니다.”

“그렇지 않소? 역도로 몰려 죽기 전에 허균이 이이첨과 관련해 남긴 기록이 반드시 어디 있을 거란 말이요! 그걸 찾으시오. 마침 외손 이필진을 백 직강이 가르쳤다 들었소. 잘 구슬려서 제대로 된 성소부부고를 받아 내게 가져오시오!”

살생부가 될 문집

허탈한 표정이 된 필진이 공허한 눈빛으로 물었다.

“제 외조부 문집이 살생부가 되는 겁니까?”

씁쓸한 미소를 띤 세출이 꺼져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스승으로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지금의 임금 마음도 헤아려 보거라. 내우외환에 몸둘 바를 몰라 하고 계시다. 난 신하로서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뿐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필진이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임금의 마음 헤아릴 여유가 제겐 없습니다. 그리고 외조부께서 남기신 다른 원고가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제게 전해지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 누구?”

필진은 성소부부고를 펼쳐 들고 훌훌 장들을 넘겼다. 마침내 한 지점에서 멈춘 그가 원고를 세출 눈앞에 들이댔다. 해당 장 우측에 ‘엄처사전’이라 쓰여 있었다. 세출이 물었다.

“엄처사가 누군가?”

“강릉의 선비입니다. 엄충정이라 불린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나?”

“엄충정은 외조부를 따르던 강릉 선비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외조부 태어나신 곳이 외가인 강릉 아닙니까?”

“그건 잘 알지.”

“그래서인지 강릉에 애착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벼슬이 끊기거나 휴가를 얻으시면 반드시 강릉으로 내려가 그곳 선비들과 교유하셨던 걸로 압니다. 심지어 갑진년엔 경포 옆에 거대한 도서관을 지으셨지요.”

“도서관을?”

“네. 강릉 지역 유생들을 위해 수만 권의 책을 그곳으로 옮겨 보관하셨습니다. 명에서 들여온 최신 서적도 모두 그곳 수장고에 비치해 두셨습니다. 지역 교육기관 역할도 했던 겁니다. 호수 옆에 별장처럼 지었다 하여 호서장서각이라 불렸지요.”

“지금도 있나?”

“남아 있을 턱이 있습니까? 모조리 철거되고 귀중한 책도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엄충정이 그곳 관리자였나?”

“그렇습니다. 벼슬도 포기한 채 장서각을 관리하던 충직한 서책지기이자 책벌레였지요.”

한참 침묵에 잠겼던 세출이 초조한 어투로 물었다.

“말년의 원고까지 포함된 온전한 문집이 존재했다면 엄충정에게 건네졌겠군? 그렇지?”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전이 지어졌으니 엄충정이는 이미 죽었겠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직강께서 찾으시는 그 책은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 겁니다.”

세 번째 방문자

허균이 감금된 의금부 옥사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젊은 사내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를 발견한 허균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어찌 이리 절묘하게 때를 맞춰 나타났느냐? 참으로 신묘하구나!”

손을 옥사 안으로 집어넣어 피투성이가 된 허균의 팔을 부여잡은 상대는 조용히 목 놓아 울었다. 그런 그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보인 허균이 다시 입을 뗐다.
“뭘 그리 슬퍼하느냐? 게다가 난 당장 죽진 않을 몸이다. 임금께 이이첨의 간교함을 알려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젊은이가 슬픔과 안심이 기이하게 결합된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국문이 매서웠다는 말을 포졸들에게 전해 들었는걸요.”

“그렇긴 하다. 아무튼 정말 때맞춰 잘 와주었다.”

“무슨 때 말씀이신데요?”

옥사 문 앞으로 바싹 다가앉은 허균이 긴장한 어투로 속삭였다.

“네가 네 아비 엄충정이 했던 역할을 대신 해줘야겠다.”

“무슨 역할입니까?”

“강릉으로 돌아가게 되면, 당장 장서각 책 가운데 일부를 다른 곳으로 옮겨라!”

눈이 휘둥그레진 젊은이가 되물었다.

“어떤 책을 어디로 옮기라는 말씀입니까?”

“장서각 서가마다 네 아비가 책을 정리하며 특별히 표시해 둔 게 있을 게다. 그중 태극 표시가 된 서가 책갑을 열어 네 아비 이름이 인장으로 찍힌 것은 모조리 빼내 은밀한 곳으로 옮겨라.”

“어떤 책들인데 그러십니까?”

“아직 조선에 보여선 안 될 책들이다. 하지만 언젠간 꼭 필요해질 책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미래의 책이다.”

“미래의 책이라 그 말씀입니까?”

“그렇다! 먼 서방 땅에서 건너온 불교 밀경들과 서방인들이 지은 천주교 교리서들이다. 그리고 양명학 서적도 꽤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라.”

“어디 숨깁니까?”

“강릉 외가인 애일당 안에 밀실이 있다. 그리로 옮겨라.”

젊은이가 입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허균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다만, 혹시 내가 이번 횡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만에 하나 그리 된다면, 네 아비에게 맡겨뒀던 내 문집은 불태워 버려라.”

“그 아까운 것을 왜 불태웁니까? 잘 보관했다 누군가에게 물려주면 되지요?”

“아니다. 없애야 후환이 없다. 내가 입만 열면 혹세무민이라 난리를 피우는 조선 선비들이 아니더냐?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다. 특히 한글로 쓴 소설은 아예 그 존재를 입도 뻥끗 말거라.”

한참을 땅을 쳐다보던 젊은이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그 소설은 제가 썼다 하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만 쉽게 고치면 너무 재밌을 것 같지 뭡니까?”

상대를 맥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허균이 입을 벌려 히죽 웃었다.

처형

인정전 앞 국문 장소로 끌려나온 허균은 단단히 벼른 사람처럼 임금과 대면을 요구했다. 하지만 임금은 나타나지 않았다. 국문도 더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이첨만이 잠시 나타나 허균을 물끄러미 쏘아봤다.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허균은 자신이 곧장 처형될 것임을 깨닫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형리들이 다가와 허균을 압송할 채비를 차렸다. 처형을 감독할 의금부 관리 손엔 역모죄를 자복하는 문서가 들려 있었다. 허균이 그곳에 수결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역적이 될 운명이었다. 모든 게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궐 밖으로 끌려 나가던 허균이 임금이 앉아 있을 인정전 안쪽을 향해 울부짖었다.

“신에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소이다!”

인정전 쪽에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고요하고 또 고요했으며 언뜻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허균이 다시 한 차례 소리쳤다.

“한 마디만 더 하게 해주시오! 꼭 드릴 말씀이 남아 있나이다!”

결국 그게 허균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 이 작품은 허균의 ‘엄처사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2년 9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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