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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중종의 능묘 이전, 조선시대 싱크홀 ‘지함(地陷)’

  • 하승현 |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강대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중종의 능묘 이전, 조선시대 싱크홀 ‘지함(地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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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중종의 능묘 이전 - 하늘은 탐욕에 복을 내리지 않는다

하승현 |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선거를 앞두고 조상 묘를 이장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큰일에 앞서 묘를 이장하는 배경에는, 후손이 복을 받으려면 조상의 묏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풍수 관념이 자리한다.  

명종 14년(1559) 4월 23일, 임금은 빈청에 모인 대신과 예조 관원에게 중종의 능을 옮기겠다고 전교했다. 중종은 먼저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와 함께 고양에 있는 정릉에 안장됐다.  명종은 이때 와서 중종의 능을 옮겨야 할 이유로 △그 땅은 처음부터 불길하다는 의논이 분분했고 △세조가 직접 가서 보고는 “좋은 땅이 아니므로 쓸 수가 없다”라고 한 점을 들었다.

이 자리에 있던 영의정 상진은 “풍수설은 허황된 것이고 능을 옮기는 것은 중대한 일이기에 더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청했다. 하지만 명종은 예부터 능을 옮긴 일이 없지 않았으며, 고양의 능 자리가 전에도 여러 차례 거론됐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 풍수설을 믿기 어렵다 하여 길흉을 가리지 않아선 안 된다고 고집했다. 그러고는 길지(吉地)를 정하고 길일(吉日)을 택해 아뢰라고 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사간원에서는 천릉(遷陵)하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했다.

“어제 내리신 전교를 보았습니다. 주상께서 선왕의 능침이 있는 곳이 길지가 아니라고 여겨서 능침을 옮겨 선왕을 편안히 모시는 도리를 다하려 하시니 신민(臣民)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능침의 위치를 그곳으로 정해 영원한 안택(安宅)을 만든 지 15년이 됐습니다. 하늘에 계신 혼령이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오르내리시는데, 하루아침에 능침의 위치를 다시 정하면 도리어 옮겨 모시는 와중에 불편하게 여기실까 염려됩니다. 혼령에게 여쭤 봐도 산 사람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풍수설은 후손들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 의견이 분분해 정설이 없으니 어떻게 일일이 다 믿고 갑작스럽게 이런 중대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생각하시어 능침의 위치를 바꿔 정하라는 명을 취소하소서.”(명종실록 14년 4월 24일)

가차 없는 비판




사간원을 비롯한 여러 관사가 오랫동안 아뢰었으나 명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명종 17년(1562) 8월 22일 중종의 능을 부왕 성종이 안장된, 봉은사(奉恩寺) 근처의 선릉 옆으로 옮겨 모셨다. 이 천릉에 대한 사관의 견해를 보자.




풍수설은 허망하고 근거가 없으니 삼대(三代, 중국의 하·은·주) 이전에 풍수설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 우리나라만이 혹세무민하는 말을 믿고 묘소의 규모를 지나치게 키우느라 남의 무덤을 파내고 백성의 농토를 없애버리니, 이미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대비마마는 중종이 장경왕후와 같은 묘에 있는 것을 꺼려서 강압적으로 명해 능침을 옮기고, 죽은 후에 중종과 같은 묘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요망한 중 보우(普雨)가 밖에서 꼬드기고, 간신 윤원형이 안에서 성사시켜 선왕이 15년 동안 편안히 계시던 능침을 함부로 옮기려 했다.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이 떠나기를 주저할 뿐 아니라 묘소를 파헤치는 와중에 분명 동요하고 놀랄 것이다.

또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일이 있다. 당초 헌릉 부근에 있던 장경왕후의 능을 고양으로 옮길 적에 관을 바꾸고 염습을 다시 했는데, 그때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의복이 옥체에 딱 달라붙어 대꼬챙이를 써서 겨우 떼어냈다. 지금도 그 말을 듣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다. 중종을 고양 정릉에 모신 지가 오래됐으니, 천릉하게 될 때 이러한 뜻밖의 변고가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신하 된 자가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대신은 힘을 다해 간쟁했어야 하는데, 감히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예예’ 하며 물러갔으니, 저런 재상을 어디에 쓸 것인가.

                                                             -명종실록 14년 4월 23일





또한 발인(發靷)하여 도성을 지나 새 능으로 가는 날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에 사나운 부인이 시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지만 이미 죽어 유명(幽明)을 달리한 뒤까지 시기하여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의 무덤에서 멀리 떼어놓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당시의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19년 동안 편안히 모셔진 선왕의 옥체가 하루아침에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데도 막지 못했으니, 하늘에 계시는 중종의 혼령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다. 아! 애통하다.
-명종실록 17년 8월 22일


천릉 후 변고 잇따라


사초가 당대에 공개되는 자료라면 차마 하지 못했을 말들을 가감 없이 적어놓았다. 사관은 대비인 문정왕후가, 중종과 장경왕후가 같은 묘에 있는 것을 시기해 억지로 떼어놓게 했는데도 영의정 상진 등 대신들이 이 일을 막지 못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명종 17년 9월 13일, 천릉으로 인해 피해를 본 광주와 고양의 전세(田稅)를 반으로 줄여주라는 전교에 대해서는, 천릉이라는 중대한 일을 타당한 이유도 없이 오직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진행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국고의 재물을 고갈시켜 놓고, 몇 고을의 조세를 감면하는 조그마한 인정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비판한 기록도 보인다.

그렇다면 중종과 같은 묘역에 묻히려 한 문정왕후의 계책 때문에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도 없이 진행된 천릉은 성공적이었을까.

지금의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정릉은 한강 물이 불어나면 홍살문까지 침수돼 제물(祭物)을 수송하기 위해 정자각(丁字閣)까지 작은 배를 타고 왕래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천릉한 이듬해인 명종 18년에는 순회세자가 죽고, 이어 명종 20년 문정왕후도 세상을 뜨는 등 변고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실록은 ‘사람들이 모두 천릉한 응보라 했고 명종도 그렇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사후 중종의 묘역에 묻히려 한 문정왕후의 계획도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명종은 “능을 옮긴 뒤로 국가에 길한 일이 없었다”라며 문정왕후의 능을 현재 서울 공릉동의 태릉으로 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도굴하고 시신까지 훼손했다. 풍수설은 수백 년간 사설(邪說)로 치부되면서도 그 뿌리가 아직까지 남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무리하게 욕망을 채우려는 자에게 하늘이 과연 복된 땅을 내릴까. 풍수설에 일리가 있다 해도, 명당에 누운 자의 기운과 후손의 기운이 모두 복될 때라야 동기감응(同氣感應)해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선시대 싱크홀 ‘지함(地陷)’ - “공허한 말만 하며  재변이 사라지길 바라니…”

강대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뜻의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다. 옛날 중국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디로 피해야 할까 염려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분명 주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걱정도 팔자라고. 그런데 오늘날 도시에서 땅이 꺼지면서 구멍이 생기는 싱크홀을 보면서 기우가 기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도 싱크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싱크홀에 대응하는 당시의 용어는 무엇일까. 하늘이 무너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땅이 꺼졌다는 기사는 실록에 간간이 보인다. 땅이 꺼졌다는 뜻인 ‘지함(地陷)’이 그것이다.

지함에 관한 기사는 ‘세종실록’에 처음 보이는데, 세종 18년(1436) 12월 황해도 황주에서 지함이 발생했다. 이어 세종 21년(1439) 5월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문종 2년(1452) 4월에는 함경도 용진현에서 지함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황해도 황주에서 땅이 꺼졌는데, 둘레가 9자, 너비가 3자, 깊이가 70여 자이고, 밑에는 물이 있었다.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세종실록 18년 12월 8일)

“황해도 감사가 ‘해주에서 땅이 꺼졌는데, 너비는 5자 2치, 깊이는 29자 6치, 물 깊이는 18자 3치입니다’라고 보고하니, 해괴제를 지내라고 명했다.”(세종실록 21년 5월 17일)

“함경도 용진현에서 땅이 꺼졌는데, 제사를 지내 재앙이 사라지게 하라고 명했다.”(문종실록 2년 4월 24일)


해괴제(解怪祭)와 반찬 가짓수


조선시대에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 ‘자’는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30cm 안팎이므로 1자를 30cm로 보면 그 규모를 대강 가늠할 수 있다. 황주의 지함은 너비 1m, 깊이 21m 정도, 해주의 것은 너비 1.5m, 깊이 9m쯤 된다.

지함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 수령은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바로 해괴제를 지내게 했다. 해괴제는 괴이한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 액을 풀어 주거나 하늘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다. 과거에는 자연재해를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을 때 하늘이 내리는 재앙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지진이나 지함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재해가 발생하면 해괴제를 지내 천지신명의 분노를 달랬는데, 해괴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태조실록’에서부터 보인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임금은 정전을 떠나 다른 장소에 머물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등 근신하는 한편 구언(求言)을 했다. 구언은 신하들에게 정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른말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백성의 원성이 줄어들고 하늘의 분노가 풀려 나라가 안정된다고 여겼다.

명종 11년(1556) 11월 16일, 명종은 “평안 감사가 땅이 꺼졌다고 보고해 왔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승정원은 알고 있으라”라는 전교를 승정원에 내렸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이때의 지함을 두고 “대동강 근처 100보쯤 되는 큰길에서 땅이 꺼졌는데 그 둘레가 25자, 너비가 7자, 깊이가 8자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승정원에서는 “지금 땅이 꺼진 일은 무서운 재변(災變)입니다. 대개 임금들은 재앙이 닥쳐도 반성하지 않는데, 주상께서는 이런 재앙이 닥칠 때마다 반성하십니다. 재앙이 닥쳐와도 덕을 기르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재앙을 상서로운 일로 바꾸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명종의 조처가 훌륭하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명종은 “평소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않았는데 재변이 날로 심해지니 더욱 두렵고 조심스럽다”라면서 더욱 자신의 마음가짐을 단속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의 사관은 천재지변의 원인이 임금과 신하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됐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참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



천재지변이 닥치자 임금과 신하가 그럴듯한 말을 하며 서로 경계하기는 했지만 형식적으로 옛일을 따라 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하늘을 감동시켜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요즘 들어 겨울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함몰된 것은 모두 음양이 조화를 잃고 땅의 기운이 안정되지 못해서이니, 재변 중에서도 큰 재변이다. 이러한 때에 재변의 원인을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모후가 국정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군자는 재야에 있고 소인은 조정에 있으며, 중들이 멋대로 날뛰고, 오랑캐가 침략해 들어왔으니, 이것들이 불길한 기운과 천재지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다. 임금과 신하 모두가 이것은 도외시한 채 고민조차 하지 않고, 덕을 닦아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느니 두려워하고 반성하겠다느니 하는 공허한 말만 하면서 재변이 사라지기를 바랐으니, 참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명종실록 11년 11월 16일





재변은 음양이 조화를 잃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진단한 뒤 문정왕후가 국정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외척 윤원형이 권세를 쥐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소인들이 세력을 잡고 승려 보우가 활동하는 것을 음양의 조화를 깨뜨리는 원인으로 보았다. 그런데도 임금과 신하들은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허울 좋은 말로만 근심하고 괴로워하니 재변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들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대형 사고가 터지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원인을 규명하고 안전대책을 마련한다며 부산을 떨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기억 저편에 묻어버린다.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재해를 두고 조선시대처럼 해괴제를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기우는 기나라 사람만의 걱정으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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