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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③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하찮은 도장이라고요? 도장은 그 사람의 인품을 담은 신분증입니다”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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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와 함께 한 인생

그가 이렇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된 현실 탓이 컸다. 그는 젊은 시절을 얘기하며 “어디에도 뿌리내릴 곳 없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첫아들을 낳고 병원비가 없어 아내가 퇴원하지 못했던 일을 회상할 땐 목소리가 잠시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그는 아들 욕심을 낸 아버지의 아홉째 자식으로 늦둥이 막내였다.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방학 때면 고모부의 한문서당에도 다닌 덕에 공부도 잘했다. 아마도 그가 한자를 주로 다루는 인장 명장이 된 데는 일찍이 눈뜬 한문 실력이 큰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어릴 때 한 공부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만 아버지께서 ‘너는 구학문을 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늘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인생이 힘들어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타계하고서부터다. 졸업식에서 장수면 면장상을 탄 그에게 면장님은 “새로 세운 중학교에 들어오면 학비를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먹고살 길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1963년, 그는 단돈 600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인생이 시작됐다.

“이발소 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공부하고 싶어서 종로5가 한국서예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월급 1500원을 받고 사환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글씨 공부를 했어요.”



한 달 방세가 1800원이 넘었으니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서예학원의 베니어 칸막이 너머로 펜글씨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덕택에 중앙여중·고에 필경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 학교 공문서와 시험문제는 등사해 만들었는데, 이른바 ‘가리방(등사판)’ 글씨를 쓰는 일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중학교 수학과 영어는 그때 시험문제를 ‘긁으며’ 혼자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은 지난해 주부학교를 졸업하면서 마쳤고요.”

1960년대 말부터 5년간 중앙여중·고에서 일하다 군대에 들어가게 됐는데, 군대에서도 그는 필경사로 활약하며 사령관 표창장을 받았다. 제대 후 금곡고등학교에서 잠시 필경사로 일했지만 곧 인쇄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윤전기와 복사기가 등장하면서 ‘가리방’ 필경사는 점점 인기 없는 직업이 되어가던 때였다.

“당시 인쇄소에는 도장 파는 이와 필경사가 같이 있어서 명함이나 도장, 직인 등을 만들어주었어요. 처음에는 필경사 일만 하다가 차츰 도장 파는 일에 흥미를 느껴 배우게 됐지요. 글씨를 베껴만 쓰다가 도장으로 파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매번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는 기쁨이라고 할까요.”

그때 몸담았던 창신동의 인쇄소 ‘동양문화사’에서 도장 파던 ‘조씨 아저씨’가 그를 도장의 세계로 이끈 첫 스승인 셈이다. 그러나 배우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짜 ‘기술’은 좀처럼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도장 파는 일은 보조가 필요 없이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술을 전수하는 스승 제자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지요.”

그렇게 답답하던 차에 인장협회 선배들이 모여 마련한 야간 특별교육 과정을 듣게 되었는데, 이때 많이 배웠다고 한다.

“인장인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초심자에 속하니 석 달 동안 배우면서도 질문 한번 제대로 못하고 수료했어요. 그래도 열다섯 분 강사 각각의 장점을 다 배울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도장포를 개업해 독립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도장을 파고 또 팠다. 그가 이렇게 미친 듯이 일한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셋방살이하며 애 셋을 키우는데,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큰애를 사립학교에 넣었어요. 그러자 둘째도 그 학교 다니겠다고 나서고, 딸인 셋째도 안 보낼 수가 없게 된 거지요.”

그러다 보니 살림은 쪼들릴 수밖에 없었고, 자존심 강한 그는 평생 빚지고 못 사는 성미라 온 식구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 자신 옷 한 벌 사지 않고, 술도 못 마시니 친구도 만나지 않고 그저 일만 했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컸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을 때까지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여겨 그렇게 절약했던 것인데 가족에겐 상처가 되었어요.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삽니다.”

이제 자식 셋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건물도 한 채 마련했으니 그의 인생은 완전히 뿌리를 내린 셈이다. 아니,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꽃까지 피우고 있다. 그 꽃을 피우기까지 그는 장인다운 집념으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해왔고,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작은 공간에 큰 예술 담는 인장 명장 1호 최병훈

그는 도장 재료로 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돌 종류는 파기 쉽지만 깨지기 쉽고, 상아는 우리 기후에 맞지 않아 금이 잘 간다. 그러나 나무는 뒤틀려도 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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