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선박자재 국산화 기수 조성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 글·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2013-01-23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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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핸디캡 0을 그리워하다

    ‘티잉~’ 호쾌한 드라이브샷에 골프공 소리가 바람을 가른다. 새 한 마리가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다. 워터 해저드는 아직 꽁꽁 얼어붙었지만 햇살은 제법 따스한 기운을 전하고 있다.

    1월 8일 부산시 금정구 선동 동래베네스트 골프클럽. 멀리 우뚝 솟은 금정산이 코스를 굽어보고 있다. 조성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65)의 마음은 홀가분해 보였다. 조 회장은 1월 2일 35년간 이끌었던 BN그룹의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됐다. BN그룹은 1978년 부일산업으로 출발해 조선기자재 산업부문 세계 1위에 올랐고, 2011년 대선주조 인수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연 매출이 7000억 원에 달하는 부산의 대표기업이다. 조 회장은 지난해 초 맡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일에 좀 더 열중하고, 자신을 도왔던 동생 조의제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룹 회장에서 물러났다.

    조 회장의 골프 스윙은 리드미컬했다. 무심 타법이다. 스윙 궤도는 크지 않지만 스피드 있고 임팩트도 강했다. 스윙 동작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것처럼 독특했다. 20년 전 겨울에 스키를 타다 4m 아래로 굴러 떨어져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친 뒤부터 스윙 동작이 엉뚱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상처는 나았지만 원상회복이 되지 않아 근육이 움츠러들었다. 그 조건에 맞춰 스윙을 하려다보니 자신만의 독특한 스윙 동작이 나오는 것이다.

    다치기 전 그는 핸디캡이 ‘0’이었다. 베스트 스코어는 68타. 생애 기록을 세운 그 라운드에서 버디 여섯 개를 잡았다. 드라이브샷에서 OB를 하나 내고도 그런 스코어를 냈다. 요즘 평균 핸디캡은 13.



    “10년 전까지만 해도 다치기 전의 상황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지요.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250m는 됐고, 유명 프로 선수와 대결해서 이기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다친 근육을 어떻게든 회복해서 전성기 때의 몸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지요. 지금은 그 생각을 놓았습니다. 나이도 들고 골프 스코어에 대한 욕심도 버렸으니까요.”

    조 회장은 세컨드샷으로 ‘온 더 그린’에 성공했다. 첫 홀부터 파를 기록했다. 덕분에 동반자들도 덩달아 ‘일파만파(첫 홀에서 실제 스코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파를 주는 것)’의 혜택을 받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비거리 대신 어프로치샷 승부

    인코스 12번홀에서였다. 숲에서 갑자기 고라니 한 마리가 나타나 페어웨이를 성큼성큼 가로질러갔다. 금정산 일대에 서식하는 야생 고라니다.

    “서울에서 손님 오셨다고 고라니가 축복해주네요.”

    조 회장이 그 말을 한 뒤 마침 이 홀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동반자 한 명이 행운의 버디를 기록했다. 페어웨이를 나란히 걸으며 조 회장에게 “남자가 비거리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드라이브 비거리가 크게 줄어 물론 아쉽긴 했지요. 그런데 새 전략을 세웠습니다. 비거리를 늘리기보다 어프로치샷을 정교하게 해서 스코어를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저는 어프로치샷을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머리를 들지 않고 어프로치샷을 연습하면 정교한 샷이 가능해집니다.”

    워터 해저드가 얼어붙어 의외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기자가 친 공이 워터 해저드에 떨어졌지만 얼음에 튕겨 페어웨이에 올라앉았다. 크고 작은 위기 때마다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골프를 하면서 저는 늘 ‘골프는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연습과 노력 없이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고, 드라이브샷이 좋아도 방심하면 세컨드샷에서 OB를 내 그 홀을 망치기도 하죠. 나쁜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면 행운을 만나기도 합니다. 골프를 잘하게 되면 골프에 대한 식견뿐 아니라 삶에 대한 식견도 높아집니다.”

    골프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조 회장은 논어의 ‘욕속부달(欲速不達)’ 문구를 되새긴다. 제자인 자하가 한 마을의 촌장이 되어 마을을 다스리는 법을 묻자 공자가 답한 말이다.

    “빨리 하려고 욕심을 내면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는 말이지요. 모든 일에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골프도 무리하게 욕심을 내다보면 가야 할 방향과 목표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저는 우선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고 마음을 비웁니다. 이번 타의 목표 지점만 생각하고 호흡을 고릅니다. 그러면 정신이 가다듬어지고 금세 공에 집중할 수 있게 돼요. 이런 습관은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신뢰의 조성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조성제 회장이 골프를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골프가 대중적인 스포츠는 아니었고, 골프를 즐기는 층도 대부분 60대 이상이었다.

    “당시 저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연세가 많은 분들과 라운드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골프가 인맥을 쌓고 사업을 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됐지요. 외국 투자자나 고객과도 함께 땀을 흘리고 운동을 하면 언어라는 장벽도 없어지고, 저의 사업 포부와 신념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그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신념 하나는 상대에게 믿음을 주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기업 경영에서도 그는 이를 무척 중시한다.

    “기업이 혁신적인 기술로 제품을 개발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BN그룹의 경영이 안정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신뢰관계가 기반이 됐다.

    “1986년 일본 미쓰이(三井) 조선소에 처음 납품할 때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저희 회사가 막 성장기로 접어들 무렵이어서 제품 국산화에 성공하고 해외 수출까지 하게 됐어요. 미쓰이 조선소에서도 우리 제품을 믿고 구매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사용했던 염료에 문제가 생겨 야외에 둔 강판이 변색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아찔했습니다. 그때 저는 눈앞의 돈보다는 신뢰를 선택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제품을 전량 회수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납품했습니다. 회수 비용이 수출 금액의 3~4배에 달해 회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후 ‘위기는 곧 기회’로 바뀌었다. 미쓰이 조선소 사건이 있은 후 조선업계에서는 ‘신뢰의 조성제’라는 별명이 생겼고 일본뿐 아니라 대만 등 다른 나라로도 수출량이 급증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고라니가 지나간 페어웨이의 응달에 얼어붙은 눈이 간간이 보였다. 겨울엔 공의 라이가 좋지 않을 경우 흔히 윈터룰(winter rules)을 적용한다. 공이 페어웨이의 디봇이나 맨바닥, 얼음에 떨어졌을 경우 6인치 이내에서 페널티를 받지 않고 공을 이동시킬 수 있는 이 로컬룰은 R·A(영국왕립골프협회)에서도 용인한다. 클럽을 휘두르다 얼어붙은 땅을 치면 손목이나 팔, 어깨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에 대한 믿음”
    조 회장은 부산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와 현대중공업에서 선박 설계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는 국내 조선업이 성장하는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선박 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선박 자재 국산화를 목표로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초심을 잃지 않고, 위기 때마다 통찰력 있는 결정으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2011년에는 대선주조를 두고 재벌기업과 벌인 인수전에서 이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부산상의가 안고 있는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부산 소재 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입니다. 그들이 경쟁력을 갖추고 강소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산상의는 역내 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또 가덕도 신공항 건설 등 부산의 굵직한 경제 현안을 해결하는 데도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인코스 16번홀 파4. 그의 드라이브샷이 사원하게 날아가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그린까지 100m 정도 남은 거리에서 그는 피칭 세컨드샷으로 공을 깃대 7m 옆에 갖다 붙였다. 자칫 놓치기 쉬운 내리막 퍼팅이었지만 그는 침착한 퍼팅으로 버디를 낚았다. 그린 왼쪽의 대숲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이날 조 회장의 스코어는 79타.

    그는 도전정신을 갖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창업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껏 쉼 없이 새로운 일을 만들어왔다. 학문에도 빠져 7년 전 나이 쉰여덟에 부산대에서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6월 그는 제주 더클래식 골프앤리조트에서 첫 홀인원을 기록했다. 속설처럼 이후 그는 3년간 큰 복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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